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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지오 칸타빌레 adagio cantabile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5. 24. 00:29
 

아다지오 칸타빌레 adagio cantabile


                                                      나 호 열



  모든 것이 느려지고 있다.



  한 인생의 완성이 죽음에 있다면 그 걸음은 더 한껏 느려져도 좋을 것이다.


  한껏 느려진다는 것은 속도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 이를테면 마라톤 경주에서 42.195㎞를 누가 빨리 달려갈 수- 혹은 달려올 수- 있는가에 내기를 건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도대체 42.195㎞가 마라톤의 한 단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합리적인가, 이런 등등의 세속적 의미 부여의 양식을 버린다는 것이다.


  한 때 나는 마라톤에 집착하여 써브 쓰리 - 마라톤 풀코스를 3시간 안에 주파하는 것-를 해보고자 무진 애를 썼었다. 애시 당초 무리한 목표였지만 나름대로는 주법을 연구하고, 나에 맞는 신발을 구하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으며 지구력 강화를 위한 여러 가지 훈련 방법들을 들춰 보기도 하였다. ‘한 때 나는’ 이라는 표현 속에 함축되어 있는 바 이지만 나는 써브 쓰리의 목표를 버렸다. 달리는 것도 좋고 걷는 것도 좋지만 ‘~ 안에’ 라는 속박은 정신의 긴장이 아니라 자유롭고자 하는 정신에 압박을 가하는 폭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찾아왔기 때문이다. 정신을 앞세워 ‘몸’을 혹사하는 것이 ‘적당히’ 라는 수식어를 앞세운다고 하여도 몸에 대한 압박과 폭거를 행하는 것에 면죄부를 주지 못한다.  다시 속도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면 ‘속도’라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인간의 주관적인 의미부여에서 시작된 오만한 발상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은 것이다. 시간은 존재하지만 그 시간의 단위는 인간의 자의적인 속도개념에 의존하게 될 때 문명의 탈을 쓰게 된다. 일단 문명의 탈을 쓰게 되면 시간은 한없이 뒤틀리고 왜곡되면서 아주 볼쌍 사나운 모습으로 인간의 정신과 몸을 간섭하려 달려들게 될 것이다.


나는 요즘 ‘변화’의 구호를 앞세워 시간을 세분화하고 속도화 하는 문명에 대해서, 기꺼이 그 문명에 복종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보편적 상식에 대해서, 좀 더 명확하게 말한다면 나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중이다. 피에르 쌍소 Pierre Sansot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속도에의 경도를 신화 神化하는 현대인들에게 ‘느림’의 가치를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느림에의 권유가 우리 모두에게 행복한 삶의 양식이 될 수 없다는 데에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우리 중의 어떤 사람들은 속도의 가치를 재빨리 알아차리고서 그 속도에 의해 세속적 영화를 획득할 수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 만들어진 속도의 가치에 굴종하고 어쩔 수 없이 휩싸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시간 자체를 박탈당한 채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느림’의 획득은 속도를 체감하고 속도에 동의한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맞이하는 ‘여유로움’ 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사유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피에르 쌍소가 ‘느림’으로 가는 행동의 실천을 권유할 때보다  그가 주장하는 ‘느림’이 상대적 개념으로서 문명화된 시간이 아니라 ‘몸’ 으로 상징되는 생명의 호흡에 주의를 기울일 때 생성되는 주관적 느낌이라고 말할 때 기꺼이 나는 그의 견해에 동참하는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자들이 피곤이 어떤 것인지를 도무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지극히 불만스럽다. 우리를 강하게 자극하고, 잠을 방해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훼방놓는 피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 생애를 통해 조금씩 우리의 신체를 점령해서 파고드는 그런 피곤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우리는 문득 손의 악력이 점점 느슨해지고, 눈가에 주름살이 잡히는 순간을 예감하게 된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겨나는가? 그것은 그동안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맡았던 과제를 잘 해낸 덕분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곤이라는 것은(사랑처럼, 배고픔처럼) 육체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피곤이 찾아올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며, 필연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다른 기쁨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그 피곤 역시 조금씩 키워 왔던 것이다. 이 피곤은 우리가 노력으로 얻어 온 것들을 다시 검토해 보고, 기억해 보며, 우리의 육체 속에 새로이 확인시켜 놓는다. 피곤한 얼굴과 신체가 고귀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가, 다시 말해서 우리의 문화 속에서 은폐되어 왔던 육체가, 감동적일 정도로 진지하게 다시 우리 눈에 그 모습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정신이 무너지는 순간이 아니라, 정신이 근육의 움직임과 뒤섞이는 그런 순간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제 2악장을 꼼꼼하게 듣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알다시피 베토벤의 서른 여섯 개의 이르는 소나타 중에서도 3대 소나타 곡 중의 으뜸이 이 「비창」일 것인데, 비창 悲愴이 뜻하는 바의 비탄의 정조 보다는 - 음악 전문가들 중에는 이 곡을 열정, 또는 정열로 해석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 시원을 달리하는 두 강물이 하나로 합해질 때의 설레임과 아낌없이 서로를 받아들일 때의 고요하고 그윽한  눈빛으로 영상화되는 느낌으로 나에게는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오랜 달리기와 걷기의 후유증으로 병원을 찾았을 때, 무릎에서부터 사타구니의 끝에 까지 연결되어 있는 인대가 늘어졌다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졌을 때에도 나는 언뜻 비창의 유장한 강 흐름을 연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디지오 칸타빌레, 클래식 음악에 문외한인 나는 먼저 인간이 스스로 체득해낸 속도의 규정에 유의하면서 사전을 펼쳐 보았다. <<아디지오: 느리게>>, <<칸타빌레: 악보에서, 천천히 노래하듯이 연주하라는 말>> 베토벤의 비창은 아디지오 칸타빌레의 속도와 느낌이므로 한 마디로 말한다면 “느리게, 노래하듯이 아름답게” 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곧바로 이 정의가 얼마나 부정확한 정의인 것을 알아차릴 것이고, 따라서 그 부정확만큼의 자의적인 확장된 자유로움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비창 전곡을 연주하였다는 훌륭한 사람에게 도대체 아다지오 칸타빌레가 어떤 의미인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친절한 답신을 보내 왔다.


  당신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악보를 다시 펼쳤습니다.


어떤 곡의 악보에는 ''♩=72'' 형식으로 박자 표시가 되어있습니다.


이것의 뜻은 ''1분 동안 ♩(4분음표=1박자)를 72번 치는 빠르기''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숫자가 클수록 해당 곡은 빠른 곡이고 숫자가 작을수록 해당 곡은 느린 곡이라는 것이지요.


제가 펼친 베토벤 비창 2악장 악보에는 오직 ''Adagio cantabile''만 표기되어 있을뿐,


참고된 박자 표기는 없었습니다. 자, 이제부터 자의적인 해석 들어가겠습니다.


동일한 ''adagio''(느리게)라고 하더라도 호흡이 긴 사람의 그것과 짧은 사람의 그것은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저는 조급증(?) 환자와 같은 증상을 보이며 매우 가쁜 숨을 몰아쉰다는...그래서 저의 아다지오 칸타빌레는 타인의 그것보다 빠르답니다. 자, 메트로놈의 이야기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저와 같은 박자치를 위하여 멜첼이라는 위인이 위와 같은 박자기를 만들었답니다.


피아노 학원에 가면 방마다 구비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저희 집에는 없습니다.)


보통 메트로놈이라는 박자맞추기 기계 가운뎃줄에 보면 숫자가 쓰여져 있습니다.


가운데 추를 해당 숫자에 맞추면 녀석은 기가 막히게 박자를 세어주죠.


똑딱똑딱똑딱똑딱~ 매우 경쾌합니다. 빠르기말과 메트로놈 속도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박자 빠르기를 지칭하는 용어는 매우 다양합니다. 그러나 대략 제가 말씀드리는 정도만 이해하시면 충-분합니다.


Grave :♩=40 Largo :♩=50 Adagio :♩=60 Andante :♩=70 Andantino :♩=80


Moderato :♩=90 Allegretto :♩=110 Allegro :♩=130 Vivace :♩=150


Presto :♩=170


Moderato(보통 빠르기)를 기준으로 위로 올라갈수록 느린 것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빨라진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그러나 나는 위와 같은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디지오 칸타빌레의 선연한 이미지를 포획하는 데에는 실패하였고, 그럴수록 그 이미지가, 그 느림이, 그 노래하는 듯한 아름다움이 이 세상에 실재하고 있다는 그만큼의 신념이 차오르고 있음을 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느림이 쌍소가 지적한 바대로 정신의 무너짐이 아니라 정신과 근육이 뒤섞이는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며, 그것은 강제된 지각이 아니라 허용된 정신의 풀림이라고 확신할 때 떠오르는 열정이었던 것이다.


양수리라 부르는 것보다 두물머리 라고 부를 때 훨씬 가깝게 다가오는 그곳은 서쪽으로 팔당댐이 보이고 남한강과 북한강이 오래된 신발을 버리고 기꺼이 맨발로 서로를 부둥켜안는 곳이다. 그 양안에 마현(마재)과 분원리를 어깨동무하고 있는 그곳에선 물소리를 들을 수 없다. 더 명확하게 말한다면 물소리뿐만 아니라 물의 속도도 느낄 수 없는 곳이다. 사실 두 물줄기가 서로 아무 거리낌 없이 엉켜 붙는 것인지, 강폭을 둘로 나누어서 사이좋게 흐르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소리가 없다는 것은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며, 느리다는 것이다. 이인삼각 경주처럼 뒤우뚱 거리면서도 호흡을 맞추어 앞으로 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고, 냉정과 열정 사이를 화해의 이름으로 등 돌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나머지 나의 생을 느리게 걷기로 작정한다. 나의 느림은 뒤쳐진 자의 체념도 아니고 짐짓 스스로를 위안하려는 과장된 제스츄어도 아니다. 사실, 적당한 체념과 그 체념에서 비롯된 위안은 적당한 속도의 문명에서 안온을 찾을 것이다. ‘빠르거나, 느리거나’ 가 상대적 개념에서 비롯된 허상임을 깨달을 때 느림은 오히려 고통스러울지 모른다. 천천히 걸어가거나 빠르게 걸어가거나 그 누구도 이 세상의 끝에 닿은 사람은 없다. 느림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시간이 빨리 가서 우리가 서러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생성이 생각할 수없을 만큼 느리게 변화해 가서 한 자리에서 오래 기다릴 수 없는, 참을성을 배우지 못한 우리의 거룩한 운명 때문에 서러운 것이다.


  동토에서 싹이 돋아 오르고, 잎을 내고 꽃을 피우며 이윽고 시들어 가는 꽃과 허공에 팔을 얹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는 나무들의 힘겨움과 작은 알로 태어나 부화하고 날개가 돋고


이윽고 창공을 박차 오르는 새들의 눈물겨움과 변태를 거듭하는 파충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시간 단위로 측정해버리는 사소한 일들이 그들에게는 그들의 전 생애를 거는 싸움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기 느림이라고 간단히 기술해 버린 시간의 굴레가 그들에게는 축복받은 운명이라는 것을 나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그래서 늙어간다는 것은 이 세상의 끝에 가닿을 수 없는 우리가 자신을 허용하고 용서하는 일이다. 느림은 순간순간을 지나쳐 가면서 한걸음도 소홀함 없이 내 앞에 부딪쳐 오는 먼지와 같은 사소한 것에도 두 팔을 벌려 안음으로써 벌어지는 정신과 근육의 뒤섞임이다. 비창과 아디지오 칸타빌레와 강물과 두물머리와 내가 가보지 않은 매화가 피는 마을을 마음으로 건너가는 이 겨울이 느릿느릿 뒷모습을 남기며 떠나갈 즈음,


나는 행복하다.








  

이 글과 관련된 시 「강물에 대한 예의」,「안아주기」,「아다지오 칸타빌레」,「선물」, 「내일이면 닿으리라」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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