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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기억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5. 28. 00:46
 

6월의 기억

                                      나호열(시인)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 6월 나는 푸른 제복을 벗었다. 미제 GMC 트럭을 타고 의정부를 지나고 동두천 너머 한탄강을 건너고 하염없이 비포장도로를 북으로 달려갈 때, 남녘 출신 훈련소 동기 이등병은 눈물을 쿨럭거리며 연신 먼지 내려앉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는데, 그 친구는 사고로 부상을 당해 조기 제대를 해 버리고 나만 영문 營門을 빠져 나왔다. 34개월 하고도 15일의 군복무를 마치는 날 아침 ,유월의 하늘은 유난히 맑았고 바람은 신선했다.


 훈련기간 4개월을 빼고 3년 동안 서부 전선의 한 모퉁이에서 청춘을 보냈다고 하니 가슴 한 켠이 아릿해지면서 울컥 목젖을 치고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는 교련 혜택이라는 것이 있어서 대학 2년 동안 필수과목으로 교련을 이수하면 6개월의 군복무 단축이 주어지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교련혜택을 받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전쟁 전후에 태어난 우리와 같은 세대는 어찌 보면 억세게 운이 없는 세대인지도 모른다. 어려서는 힘든 경제사정 때문에 늘 배고픔이 따랐고, 오늘날처럼 앞뒤 좌우를 넉넉하게 살필 수 있는 똘레랑스의 시야가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반공교육을 받으면서 평양에는 땔감이 없어 을밀대, 부벽루 기둥까지 뽑아갔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을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3년 동안 교련교육까지 끊임없이 받아왔으니 공산주의와 북한 정권에 대한  증오는 맹목적 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각들이 바뀌게 된 것은 남북화해의 물꼬를 트기 위해 평양으로 밀사가 다녀오면서부터이다. 텔레비전에 흑백으로 평양시가지가 나오고 부벽루, 을밀대가 영상으로 비칠 때 그동안 내가 믿어왔던 이데올로기의 허울이 무너지는 기분을 무엇으로 형용할 것인가! 대학에서의 교련 시간은 이미 고등학교 때 받은 교육의 반복이었으므로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과정이었으나 이른바 교련거부자로 이름이 오른 까닭에 6개월이라는 금쪽같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았다. 유신 반대의 돌멩이 몇 개 던졌다고 낙인이 찍혔을지도 모를 일, 6주간의 기초훈련과 주특기 교육을 마치고 전방 포병부대에 배치가 되고 120명의 포대원 중에서 대학 물을 먹은 병사라곤 두 서넛, 나는 원하지 않은 관심병사가 되었다. 농사를 짓다 온 농부, 전자회사에서 공원으로 일하다 온 공원, 돈이 없어 중학교만 마치고 밥술이나 뜰까 입대한 병사들, 눈 씻고 보아도 말 상대가 될 사람을 찾기 어려운데, 거기다가 먹는 것, 입는 것, 잠자리까지 불편하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군 생활을 하면서 거쳐야 할 것을 모두 경험했던 것 같다. 불결한 모포에서 옴이 옮아 한 겨울을 고생했고 지금도 한 겨울 내복을 입지 못하는 결벽을 만들어 준 지긋지긋한 이, 발을 신발에 맞추다 보니 한 쪽 발은 평발이 되었고 체력이 부족하여 장거리 행군에서 낙오하여 체면을 구겼던 기억도 지울 수가 없다. 도시에서 살아 싸리나무 한 번 본 적이 없으니 빗자루 맬 싸리가 홍싸리인지 흑싸리인지 어찌 알겠는가? 낫을 잡아보지도 않은 창백한 손으로는 잡초를 베는 것보다 뜯어내는 것이 오히려 나았다.


 그러나 남들이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전방 생활에서 잃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자주 미군들과 합동훈련을 하곤 했는데, 그들의 풍족한 물자와 후생 시스템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한 나라인지 알았고, 그래서 우리도 잘 살아야 한다는 자각도 생겼고, 분단이라는 민족의 고통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 해답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도 정치적 신념이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민족의 분단도 전쟁도 가난도 다 우리가 약소국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복학을 하게 되면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다는 설익은 결론을 내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남자들이 축구와 군대 이야기를 빼면 할 말이 없다는 우스개소리도 있지만 그 강렬한 시련 속에서 자신을 단련했던 사람들에게 군 생활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문신과도 같은 것이리라.


 세월이 흘러 30년이 지니고 지금은 막내 아들이 군 생활을 하고 있다. 몸이 약하여 보충역을 받도록 조처를 할까도 생각해 봤으나 시련을 극복할 줄 아는 기개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입대를 권유했고, 나의 권유를 받아들인 아들은 지금은 씩씩하게 군 생활을 하고 있다. 입대 전 보다 패기도 있어 보이고 건강도 많이 좋아진 것 같아 한결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어떻게 하던 군 생활을 피하려고 하는 세태 속에서 많은 청년들이 군복무 문제에 고민을 갖고 있다.  군복무를 하건 하지 않건 사회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기 때문에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현역 복무를 피하고 싶어한다. 20대의 소중한 2년의 시간을 나라에 바치고도 군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누가 장병이 되려고 하겠는가? 남녀 양성평등주의를 강조한 나머지 국가공무원 응시 시 가산점 몇 점 주자는 데도 인색하다면 이 나라는 앞으로 네팔의 구르카 용병처럼 군인까지 수입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6월은 보훈의 달이다. 반 세기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골육상쟁의 아픔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 이름 모를 산과 들판에 육신을 누인 전몰 무명용사는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오늘의 이 땅은 젊음을 바치고 피를 뿌리며 산화해 갔던 그들에 의해 지켜진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가끔 30년 전의 나로 되돌아가 본다. 나는 지성인의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유신 독제에 항거했던 지사도 아니었고, 불의를 못 참는 열혈의 청년도 아니었지만 이 땅의 역사가 흘러온 길과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를 군 생활을 통해서 얻었던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물론 지금도 아주 드물게 입영통지서를 받는 가위눌림을 경험하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