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20] 가을밤에 떠오르는 것들
첫사랑이여
등롱에 다가가는
얼굴과 얼굴
初(はつ)恋(こい)や燈(とう)籠(ろう)によする顔(かお)と顔(か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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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잘 익은 단감처럼 몰랑몰랑해지는 계절이다. 문득 목덜미로 훅 불어 드는 찬 바람에도 그리움에 사무치고, 어두운 수풀 뒤에서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에 잊었던 추억들이 떠오르며, 가로등 불빛 아래 느릿느릿 걷는 고양이의 뒤태가 사랑스러워 달려가 껴안아 주고 싶은 걸 꾹 참는다. 유독 지난여름의 아스팔트가 잘 달구어진 뚝배기처럼 극심하게 뜨거웠기 때문일까. 잔혹한 더위를 다 같이 이겨낸 인간, 벌레, 개, 고양이, 새가 모두 동지처럼 애틋하다. 오래전 촛불로 날아들어 타죽는 벌레들을 보다 못한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무언가 씌울 것을 명하여 등롱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작은 것들을 보살피는 그런 고운 마음씨까지도 닮고 싶어지는 아름다운 가을밤이다.
그런 가을밤 등롱을 바라보며 첫사랑의 시를 읊은 건, 에도시대 서민이 사는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단 다이기(炭太祇, 1709~1771). 시인은 사랑에 빠진 앳된 얼굴과 얼굴을 본다. 분명 첫사랑이겠지. 두 얼굴이 등롱의 불빛에 물들어 사과처럼 붉다. 설렘과 떨림, 부끄러움과 두근거림, 기쁨과 불안, 생애 처음 느껴보는 감정들이 그들의 눈에, 뺨에, 입술에 드러나 있어 시인은 붓을 들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하늘거리는 등롱의 불빛 그림자마저 종잡을 수 없는 첫사랑의 마음을 비유하는 듯하다. 얼굴과 얼굴이 가까이, 가까이, 지금도 가까이 다가가고 있을 것만 같은 생생한 현장감. 그러니 읽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첫사랑을 떠오르게 한다. 그래, 어디 보자, 나의 첫사랑은 어떤 얼굴이었지?
그러고 보니 나의 첫사랑에도 불빛이 아른아른하던 기억이 있다. 열아홉 살. 롯데월드 야간 개장 알전구 아래. 야외 계단에 앉아 꿈처럼 시원한 호수 밤바람에 땀을 식혔던 기억이 난다. 분명 이맘때.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는 계절. 반짝이는 전구 아래 앳된 얼굴과 얼굴이 가까이, 가까이. 역시 첫사랑의 얼굴에는 선선한 가을밤, 은은한 불빛이 제격이다. 불길로 날아들어 온몸을 불태우는 날벌레와 같은 사랑은, 십 년 이십 년 후의 일이다. 그리고 시간이 더욱 흘러, 깊이 사랑하는 이가 죽음이라는 피안에 이르렀을 때, 단 다이기가 남긴 또 한 줄의 멋진 시를 중얼거리게 될까. ‘너의 죽음은 그저 부재중이고 꽃은 한창때(死なれたを留守と思ふや花盛り)’ 너는 없는데, 바깥은 애먼 꽃 천지이고, 그러니 이리 생각하는 수밖에. 무슨 볼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웠구나. 곧 돌아오겠지. 곧 돌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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