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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28] 즐겁게 올바로, 좋은 언어를 품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5. 20. 14:22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28] 즐겁게 올바로, 좋은 언어를 품고

입력 2025.01.22. 23:50업데이트 2025.01.23. 11:09
 
 
 

진흙에 내린

아름다운 눈송이

진흙이 되네

どろ ふ ゆき どろ

泥に降る雪うつくしや泥になる

 

텅 비었다. 그런 기분이다. 지난 연말부터 쭉. 혼돈에 빠진 정국 탓인지,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계 정세 탓인지, 아니면 그저 내가 나이를 먹은 탓인지. 풍선에 바람이 쭉 빠지는 기분이랄까. 얼른 바람구멍을 찾아 막아야 하는데. 요즘 일본은 어떤 상황인가 싶어 뉴스를 살펴보니 일본 아이돌의 원조 격이었던 SMAP의 리더 나카이 마사히로가 후지TV로부터 여성 아나운서 성 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돼 열도가 발칵 뒤집혔다. 여기도 어질어질하다. 이 나라나 저 나라나 구석구석 썩어 있던 부분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시기인가. 고름을 째고 나아가는 중인가.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거라면 참을 만하다.

자연으로 눈을 돌려보자. 치유를 위해서는 자연만큼 좋은 것도 없으니. 오가와 게이슈(小川軽舟·1961~)는 눈 내리는 겨울날 이런 시를 썼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것이 결정되어 있는 인간처럼, 내리는 순간부터 녹을 것이 결정되어 있는 눈이 내린다. 눈송이의 일생이 마치 잠시 잠깐 빛나는 인생과도 같구나.

시인은 자기 시를 이렇게 설명한다. ‘진흙탕으로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진흙과의 대비로 눈이 한층 아름답게 보입니다. 아, 아름답구나.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눈은 곧 진흙이 됩니다. 그렇기에 진흙에 퍼붓는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텅 비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눈을 마지막까지 지켜보고 열일곱 자의 언어로 만드는 일, 그리고 하이쿠 모임에서 동료들의 공감을 얻은 일을 통해 텅 비었던 제가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것이 하이쿠입니다.’

 

텅 비었다. 이런 기분이 꼭 나쁜 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이 마음의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까. 문득 동화 작가이자 시인이자 시골 학교 선생님이었던 미야자와 겐지가 동생에게 썼던 편지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는 즐겁게 올바로 나아가자꾸나. 고통을 즐길 수 있는 자가 진정한 시인이란다. 만약 바람과 빛 속에 나를 잊고 세상이 나의 정원이 되어, 혹은 은하계 전체가 한 사람의 나라고 느낄 수 있다면 즐겁지 않겠니.’ 그렇다면 전쟁도, 미움도, 차별도 없을 텐데. 즐겁게 올바로, 좋은 언어를 품고, 다시 가득 나를 채우자. 진흙에 닿기까지 아직 약간의 시간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