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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흥 시집 『천지연폭포 天地淵瀑布』:자연과의 대화와 생명의 판타지Fantasy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3. 29. 16:49

跋文

자연과의 대화와 생명의 판타지Fantasy

나호열 · 문화평론가

서정시의 출발

 

세계의 자아화는 시 특히 서정시抒情詩를 이야기할 때 당연히 그러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명제이다. 세계를 주관적 관점에서 자아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이를 좀 더 설명하자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자연)은 – 이 글에서의 세계는 우주, 또는 자연과 동일한 의미로 쓰기로 한다 - ‘나’를 포섭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나’와 유리되어 있는 그 무엇이다. 노자老子의 ‘돌아가는 것은 도의 움직임(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는 주장이나, 주역周易의 ‘극에 도달하면 되돌아간다(극즉반極則反)’는, 자연의 섭리에 대한 이해는 자연을 대상으로 의식하는 ‘나’와는 불화의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실세계의 인간은 자연의 비가시적인 규칙적 운동을 감지하기보다는 변화를 통한 삶의 추동推動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자도지동이나 극즉반과 같은 자연의 규칙은 유한한 ‘나’의 삶에 깨달음을 주는 나침반이 될 수는 있으나 완벽한 위안은 되지 못한다. 이렇게 볼 때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서정시의 본령을 자연에의 귀의나 완상玩賞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시의 발화자인 ‘나’의 의식이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자연의 의미 또한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는 사태로 이끌리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과학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자연을 마주하는 태도에 있어서 생태주의 보다는 환경주의에 관심을 갖는다. 생태주의는 앞에서 이야기한 거시적 안목에서의 자연의 규칙인 반자도지동이나 극즉반의 적극적 수렴을 주장한다. 이는 수많은 ‘나’의 동의와 동참을 요구하는 것으로 현실적 삶이 추구하는 편리함의 이익을 버릴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환경주의적 관점은 과학기술은 삶의 쾌적함과 신속한 편리성과 만족감을 주며, 이에 파생되는 여러 문제들, 이를테면 환경파괴와 같은 폐해는 과학에 근거한 기술로 충분히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시를 쓰는 나의 시각이 생태나 환경 어느 쪽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서정시의 밀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나를 비추는 거울, ‘나’를 각성覺醒 시키고 삶의 태도를 수정하게 하는 도구, 추악한 세계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 등, 그 어느 것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세계의 자아화라는 서정시의 개념은 다양한 형태로 진화할 것이다. 요할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김석흥 시집『천지연 폭포』는 작금의 현대시의 양상 특히 서정시의 영역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자연을 향해 가는 길

 

『천지연 폭포』는 김석흥 시인의 첫 시집이다. 시집에 수록된 82편의 시들은 해방 이후 전란과 정치적 혼란과 맞물린 산업화의 틈새에서 격동의 한 시대를 살아온 시인의 회고와 우리 사회의 근대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근대近代의 개념은 정치, 사회적 발전단계에서 모더니티modernity라 일컫는. 인간 이성理性의 힘으로 세계를 구성하고자하는데서 출발한다. 자연과 신神의 슬하에 있던 인간이 자연과 신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서거나 더 한 발 더 나아가 신을 버리고 자연을 인간의 문명으로 억압내지는 통제하는 인간 중심의 사회로 진입하는 것으로 근대를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의 존엄은 자유와 평등으로 발현된다.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으면서 정신적 기반은 여전히 르네상스 이후의 근대정신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오늘날의 물질적 풍요는 자본주의와 결합된 바로 이 근대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서 부지부식不知不識간에 개개인의 생애를 디지털digital로 압축된, 속도와 편리성의 궤도에 올려놓았다. 이 디지털문화는 앞서 언급한 환경주의적 관점과 길항하면서 자연과 인간을 더 멀리 떼어놓는 형국으로 이끌고 있다. 한 마디로 오만한 이성理性은 자연 생태의 파괴와 멸종을 야기하면서 현대문명의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시집 『천지연 폭포』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러한 완성되지 못한 슬픈(?) 근대를 헤쳐 온 이순耳順을 넘어선 삶을 오버랩 시키면서 독특한 서정의 세계를 펼쳐보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언덕길을 올라가는 것만 더딜 줄 알았는데 / 이제 내려가는 것도 더딘’ (「기계적 인간」첫 부분) 나이에 이르러 그가 당도한 세상은 이렇다.

 

멀다고 여겨지던 길이 가까이 다가오고

높다고 느껴지던 산마루가 낮아 보인다

물장구치며 놀던 개울물이 졸아들고

옹기종기 모여 있던 집들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편의점, 마트, 카페, 호프집, 갈비집, 모텔, 아파트......

새로운 것들은 어색하기만 하다

마주치는 사람들마저 낯설다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철없이 장난치던 동네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가 버렸는지

 

오백 살 먹은 느티나무와

밤하늘 총총한 별들이 아니었으면

나는 너를 못 알아볼 뻔했다

 

- 「낯선 고향」전문

 

어느덧 인생의 반을 살아온 시인은 민주화와 산업화가 길항하는 현대사現代史의 와류 속에서 일구어낸 풍요와 그 풍요를 얻기 위해 버려지고 만 소중한 삶의 가치들을 소환하고 있다. 멀다고 여겨지던 길은 직선으로 뚫리고, 산마루는 깎여 낮아진 고향에는 낯 선 사람들이 인사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데, 그래도 고향에는 여전히 살아있는 오백 살 먹은 느티나무와 오염되지 않은 밤하늘에 총총한 별이 돋아나 위안을 준다. 어째든 이순耳順에 닿은 고향은 낯 선 땅이 되고 말았다. 청운의 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회에서 퇴출(?)되는 안타까움도 함께 찾아오는 이순은 이제는 인생 후반기의 첫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과 풍경, 오래 전 이야기들을 찾아 새로운 여행을 준비한다. 시집 『천지연 폭포』는 사회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시인이 발견한 미물들의 생명력을 찾아 떠난 여행기라 보아도 무방하다. 시인은 그의 시 쓰기가 지금껏 가보지 않은 길에 늦깎이로 들어섰다고 술회했지만 그의 시업 또한 새롭게 시작하는 또 하나의 삶의 여행임이 틀림이 없다. 무크Mook『르네포엠』으로 등단한 지 3년 만에 내놓은 시편들은 그의 인생의 후반부를 시작하며 갈고 닦은 심안心眼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의 시작詩作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안다. 일일이 밝힐 수는 없지만 시집에 실린 스무 여 편의 시는 시인이 건너온 불혹不惑 즈음의 작품들이다. 아마도 그 시절은 삶의 신고辛苦가 생계와 사회적 상승욕구와 맞물려 치열했던 때이었을 것이다.

 

‘말을 잘 들어야 한다 // 못마땅하다고 고개 쳐들면 / 머리를 몇 대 더 맞는다 ...(중략)... 두들겨 맞아도 참자, 한순간만 / 탈 없이 오래 사는 길이니까’(「못」부분)이나 ‘매를 맞아야만 살 수 있다고 한다...(중략)...온몸을 휘갈기는 채찍이 두렵다/ 돌고 또 돌다 보니 구역질이 난다 ’ (「팽이」부분)

 

일찍이 서양에서 발화되었던 개인이 누려야 할 자유와 계급을 넘어서는 평등을 근거로 하는 근대정신은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미완인 현재 진행형이다. 뿌리 깊은 유교문화의 영향은 사회 곳곳에 능력과 무관한 장유유서長幼有序와 상명하복上命下服의 부조리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못」과「팽이」는 이와 같은 삶의 신산함을 감상感傷에 떨어뜨리지 않은 채, 시인 앞에 주어진 사물이나 현상을 객관적 관찰을 통해 공감의 영역으로 이끌어낸 노작勞作이라고 보여지지만 이런 공력은 김석흥 시인의 초창기 시「애벌레」에서 그 단초를 찾아 볼 수 있다.

 

녹음이 짙어가는 숲 속에서

우화를 꿈꾸는 애벌레들

익숙한 몸짓으로

나뭇잎들을 둘둘 말아 집을 짓는다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들 중 몇 마리만이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삶도 이와 같이

저마다 품은 꿈 이루려 하지만

끝내는 아쉬운 회한만을 남겨둔 채

짧은 여정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해정한 숲 속의 한나절

애벌레들의 공중묘기가 끊임없이 펼쳐지고

이따금 줄을 놓친 어린 것들이

톡 톡 톡!

땅위에 내려 앉는다

 

- 「애벌레」 전문

 

이 세상은 먹고 먹히는 살벌한 약육강식의 현장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나비가 되지 못하는 많은 애벌레들의 죽음은 우리네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삶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시「애벌레」의 마지막 연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하강下降이 결코 소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생성을 준비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먹이사슬은 냉엄하지만 모든 생명체는 땅으로 귀의한다. 땅은 생명이 소멸하는 무덤이면서 동시에 생명이 깃드는 집이기도 하다. 시인이 포착한 ‘톡 톡 톡!’의 의성어를 통해서 구현되고 있는 약동하는 숨소리를 받아내는 땅은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 더 깊고 넓은 눈으로 바라보면 이 세계는 승패勝敗와는 무관하다. 영원한 승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너도 이기고 나도 이기는(win –win) 인드라망의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반추를 넘어가는 반성의 시

 

시집『천지연폭포』는 이와 같이 대상(오브제)이 지니고 있는 속성을 객관적 관찰을 통해 우리의 삶을 암유하는 기법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특정한 장소의 경관 景觀 - 천지연 폭포, 회암사지, 구둔역, 갯벌, 숲, 강 등-을 다룬 시들이나, 나무나 꽃, 새, 등 사물을 모티브로 잡은 시편들이 시집『천지연폭포』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한 마디로 시집『천지연폭포 天地淵瀑布』를 요약한다면 서정시가 빠지기 쉬운 대상에 대한 과도한 영탄詠嘆 이나 어설픈 체념, 치열한 고뇌의 사유가 빠져 있는 달관의 포즈를 취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삶을 곧추세우는 반성의 기록으로 보여질 때 시인의 진정성이 깃들여 지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시 한 편을 읽어본다.

 

대나무는 속을 비워가며

마디 마디를 단단히 키운다

악기들도 속을 비움으로써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새들은 뼛속이 비어 있어

하늘을 나는 자유를 얻었고

수도자들은 속을 비워내서

영혼이 맑다고 한다

내 가슴 속 한구석에도 빈 자리가 있어

내가 들어설 수 있다

 

하지만 비우기는커녕

평생을 채워넣기만 한 나

얼굴이 붉어진다

이제부터라도 속을 비워내야겠다

 

- 「속 비워내기」 전문

 

대나무의 속성인 곧음이 속이 비어 있음에서 이루어진 것을 관찰한 시인은 자신의 마음에서도 탐욕을 비워내야겠다고 말한다. 김석흥 시인은 일관되게 그가 마주하는 대상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는 자세를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치과에서 X- Ray 사진으로 드러나는 뼈를 보면서 저것은 내가 아니라고 우기다가 ‘때 놓치지 말고 빨리 치료하세요!’라는 권유를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더 늦기 전에 철들라는 말로 듣’(「자화상」마지막 부분)는다든가, 시집『천지연폭포』에 드물게 보이는 사회 또는 문명 비판의 시 -「마장동 골목에서」,「대한어국 大韓魚國」등 –에서 조차 자신의 삶을 정돈하려는 수기修己의 자세를 잊지 않는다. 마장동은 축산물 가공과 식육점으로 유명한 곳이다. 육류 소비는 적어도 개인 소득이 오천 달러 이상이 되었을 때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소와 돼지, 닭들은 오직 인간의 식욕을 위해 태어나고 죽는다. 적어도 10년 이상의 수명을 지닌 생명들이 길어야 2년, 짧게는 이 개월 이내에 상품으로 도륙되는 상황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아마도 싱싱한 고기를 맛보기 위해 마장동에 들렀을 것이다. 그 때 시인은 ‘골목 끝에서는 / 두려움에 떨고 있는 누런 소가 / 큰 눈을 껌벅이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마장동 골목에서」3연)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화자)은 느닷없이 속이 울렁거리고 ‘스마트폰에서 채식주의자라는 말을 찾아’(「마장동 골목에서」마지막 연)본다. 여기서 유의해서 보아야 할 점은 시인(화자)이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채식주의자라는 단어를 검색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 언명이 함의하는 바는 ‘우리’라 불리는 대중은 고귀한 삶의 가치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현실에서는 행동하지 않고 실천하자 않는 방관자에 머물고 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부끄러운 냉소는 오늘날의 정치현실을 비판하는 「대한어국大韓魚國」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좌우左右나 보수 / 진보의 명확한 정의의 정립도 없이 목소리를 높이며 제 밥그릇을 차리는 탐욕의 아수라장에서 힘없는 방관자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졸지에 / 한쪽으로 쏠린 눈을 가진 물고기로 넘쳐나는 / 대한어국이 되어버린’(「대한어국大韓魚國」마지막 연)막막함을 마주할 뿐인 자신을 들여다 볼 뿐인 것이다.

 

 

문여기인文如其人을 향해 가다

 

그렇다면 오롯이 자신의 삶을 곧추세우는 과정의 반성으로 시를 읽어야 한다는 어림짐작은 시집『천지연폭포』에 어느 만큼 구현되어 있을까? 자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지혜를 얻게 해 주고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해주는 성소聖所로 받들여진다. 쉽게 말해서 이런 삶의 지혜나 치유는 시에 있어서 식물적 이미지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계절의 변화에 따른 생명의 순환, 부동不動의 상징으로 곧바로 일깨워주는 ‘나무’나 ‘숲’은 영감을 얻는 훌륭한 소재인 것이다. 김석흥 시인에게도 이와 같은 소재들은 아름다운 많은 시편을 낳게 하였다. 그 중에서 꼿꼿함, 굳음과 상승上昇의 기개를 상징하는 나무를 소재로 한 몇 편의 시를 살펴 보겠다.

 

숲에 사는 나무들은 박애주의자다

생김새가 다르다고 다투기는 하나 미워하지 않는다

키가 좀 작다고 허리가 굽었다고 업신여기지 않는다

언제나 주어진 자리에 서 있을 뿐

결코 남의 자리를 욕심내지 않는다

숲에 들어서면 가슴이 환해지는 이유다

-「숲, 나무에서 배우다」1연

 

 

만약 내가 나무가 된다면

마을 어귀를 지키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되어야지

 

( ...중략...)

 

그러다 나이가 들어 쓰러지면

물결과 구름과 바람의 문양을 뽐내며

옷장과 책장과 장식장으로 다시 살다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면

기꺼이 땔감으로 온몸을 불사르는

그런 잊혀지는 나무로 살아야지

 

- 「아낌없이 주는 나무」 1연, 마지막 연

 

그렇게 벌거숭이가 되어

바람과 눈송이를 끌어안고

몸 속 깊숙이 차곡차곡 씨앗을 잉태하며

아무도 모르게

눈부신 산란을 준비하는 것이다

 

- 「겨울나무」마지막 연

 

정처 없이 헤매는 떠돌이가 되기 싫어

한 자리만 지키는 파수꾼이 되기로 했지요

불나비 같은 사랑을 구걸하기 보다는

고고한 학처럼 홀로이기를 택했어요

 

- 「나무」 1 연

 

시 「속 비워내기」에서 살펴 보았듯이, 여러 편의 나무를 소재로 삼은 시들은 비유를 통하지 않은 직접 화법을 통해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편안함을 준다. 누구나 쉽게 나무가 주는 상징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많은 시인들이 즐겨 소재로 삼은 바 친숙한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무 시편들은 누구에게나 삶의 전형典型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곧음과 인내와 고고 孤高의 품격을 일깨워주는,『천지연폭포』를 대표하는 시편이라고 독자들에게 권유하고 싶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시, 시집의 첫 번째 시를 고르라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시집의 표제인 시「천지연폭포天地淵瀑布」를 꼽으려 한다. 이 시 또한 수많은 기행시의 한 편으로서 위에 언급한 시에 비해서 비유의 적절함이나 완성도에 있어서 더 낫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시는 김석흥 시인의 앞날을 예견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김석흥 시인은 이 시를 무엇 때문에 시집의 표제로 삼았을까?

 

시집에는 폭포를 다룬 시「폭포」가 있다. 나무와 마찬가지로 폭포도 많은 시인들에게 영감을 준 소재이며 그만큼 명편名篇도 많다. 니무와 마찬가지로 폭포는 하강적 이미지를 드러내지만 나무의 부동, 수동적 속성과는 달리 역동적인 광물적 이미지가 강하다. ‘나를 놓아 버려야 새로 태어난다 / 천 길 낭떠러지에서 / 멈추거나 물러서지 않고 /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내딛는다’(「폭포」1연)는 구절은 생명의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는 가히 압권이다. 그러나「천지연폭포天地淵瀑布」에는 다른 시에서 볼 수 없었던 서사敍事가 들어 있다.

 

천지연 폭포는 제주도 서귀포시 계곡에 있는 폭포로서 정방폭포와 천제연폭포와 더불어 제주도를 대표하는 삼대 폭포이다. 총 6연으로 이루어진 시「천지연폭포天地淵瀑布」는 시「폭포」의 1연에서 보이는 장엄한 현상을 넘어서서 푸른 소沼에 고래가 살고 있다는 상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낙하하는 물줄기를 고래가 뿜어내는 숨소리로,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여 어미고래와 헤어진 아픔과 그리움의 서사를 회화적 기법으로 표현한 것은 대상과 시적 자아의 대칭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도로서 김석흥 시인의 시업의 새 출발을 알리는 징표로 삼을 만한 것이다. 거기에 고래가 표징하는 자유와 그 자유를 억압하는 삶에서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는 분투를 폭포를 통해서 보여주려고 하는 시도는 값진 것이 아닐 수 없다.

계곡을 뒤흔드는 우레 같은 울음소리

하늘 높이 솟구치는 거대한 물기둥

 

저 낭떠러지 아래 푸르른 소沼에는

가슴 저린 고래 한 마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바다와 뭍으로 갈라지던 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새끼 고래가

절벽 깊숙한 곳에 어미 모습 새겨놓고

 

숱한 날을 사무치는 그리움에 몸부림치며

밤하늘 검푸른 물속을 유영하는 별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나 여기 있다고 어미 고래에게 전해달라며

쉼 없이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서러운 울음으로

 

- 「천지연폭포天地淵瀑布」 전문

 

시인의 길

 

시는 언어를 도구로 삼는다.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언어는 항상 사회적 약속으로 작동하면서 시를 구속한다. 그러나 시의 언어는 그러한 사회적 소통을 벗어나서 비유의 영역을 지향해 간다. 비유는 애매성을 이끌면서 문장을 이루는 표현의 아름다움을 함유한다. 표현의 아름다움은 교언영색巧言令色이나 서사의 절실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숙성을 거친 사유와 혼탁한 세상을 맑은 눈으로 바라보는 심성의 연마에서 오는 것이다. 시인 김석흥과 시집 『천지연폭포』는 표현의 과도한 장식을 걷어내고 문여기인文如其人의 길을 걸어가려 하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든든한 결기를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시를 포함한 예술에는 완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전인미답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시인에게 주어진 운명임을 잊지 않는다면 더 높고 더 넓은 세계를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