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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대상과 방식 - 나호열 시집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8. 20. 23:13

그리움의 대상과 방식 - 나호열 시집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소설가 전 예 숙


시가 이미지와 직관을 포착해 내는 작업의 소산이라 한다면, 그 이미지를 감성적으로 잡아내 형상화 시키는 일, 그것이 시인의 몫이 아닐지.
시인의 작업 중에 빠져서는 안될 것이 있는데, 바로 작가의 세계관?철학이다. 왜냐하면 문학은 사유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좋은 시라고 말하는 작품들을 생각해 보라. 삶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함께 읽어갔을 것이다. 결국 사유를 떠난 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억지 같은 논리를 체험하게 된다. 또 어떤 문학 작품에서든 그 속에는 인간이 들어앉아 있는데, 작가는 그 인간을 여러 각도로 탐구하게 된다.

 나호열 시인의 시에서도 인간에 대한 사유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데, 그 인간 존재 방식이 흥미롭다. 인간의 존재방식이, 그리움 혹은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 멀리 있어 지금은 다가갈 수 없는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그리움의 대상은 늘 '나'라는 존재 사이에 갇혀 있을 수 있지만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처럼 '이 세상에 없고 저 세상'에 있는 이미지를 그려 보이고 있다. 그러나 나호열 시인이 플라톤이나 한용운과 차별화 되는 것은 그리움의 대상 혹은 님을 간절히 희구하는 방식이 아니며, 그 존재가 외롭고, 그립고, 너무 멀리 있어 손에 닿지 않는다는 점이다. '갈증을 가득 안은 채 사막을 건너'서 존재하며, 혹 손에 닿으면 형상이 바뀌고 만다.

 먼저, 나호열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사랑, 혹은 그리움의 대상을 무작위로 뽑아 보았다.

 

  내가 묻고 내가 대답하는 그의 먼 안부 ― 「밤에 쓰는 편지」

  갈증을 가득 안은 채 사막을 건너가는 사람 … 이제는 내가 귀인을 찾아 나설 차례다 ― 「귀인을기 다리며」

  얼마나 숨차게 나에게 달려오고 있는지/ 그는 부재중이다 ―「그 겨울의 찻집」
 

  당신에게로 가는 먼 길 / 맞부딪쳐오는 바람에 / 눈 감아버리는 밤길
                                                                                            ― 「 두메 양귀비꽃 」

  이 세상에 살아 있으나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에요 ― 「다인 이라는 사람」

  그대를 향하여 가는 길이 어디 먼 곳에 있던가/ 문신처럼 마음 속에 또아리 틀 물의 길, 바람의 길, 하늘의 길이 아니었던가 ― 「산길을 돌다」- 삼릉↔포석정

  손길 닿으면 언제든지/ 꽃이 되는/ 손길이 닿으면 금방/ 무너져 버릴 것 같아/
이만큼 바라보던/ 사랑이 있다 ― 「742호의 촛불」

 

  왜 이토록 그리움의 대상이 멀리에만 있는가. 왜 두 사람 사이에는 닿지 못할 거리감이 존재해야 하는가. 손에 닿을 수 있는 공간에 혹은 시간에 서 있을 수는 없는 것일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이 세상에 살아 있으나 만날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리움의 폭은 한없이 넓어 독자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만 그리움의 대상과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남기고 있어 시적 화자와 더불어 함께 기다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나호열 시인은 「산길을 돌다」- 삼릉↔포석정, 에서 그대에게 가는 길이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 '멀리'라는 시어에는 거리 개념을 초월하고 있다. 그 길은 '문신처럼 속에 또아리를 튼 물의 길, 바람의 길, 하늘의 길'이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현 존재에서 찾고 있었던 님 혹은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물과 바람과 하늘의 공통 분모를 놓칠 수 없는데, 그것은 바로 움직임이다. 생성과 소멸이 있고,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움직임. 그런 마음은 시인의 내면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그리움의 대상 또한 시적 자아의 내면에서 찾아야지 현 존재를 찾아 나선다면, 시인의 의도를 놓치고 말 것이다. 자연의 이법을 따라 가는 곳에 님의 존재가 있고, 손에 닿을 수 없으며, 멀리 있고, 시간과 공간 밖에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그 대상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다음 싯귀를 주목해 보자.

 

 혼자 차 오르고/ 혼자 비워지고/ 물결 하나 일지 않는 /그리움의 저수지
                                                                      ―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

 벽에 너울대는 제 그림자를 그토록 지우려 애썼을까.
                                                                      ― 「내 마음의 벽화 ?4」
 

 나 이제/ 가을 호수가 되었습니다 / 그리움의 들 물길이/ 외로움의 날 물길보다
/ 깊어 ― 「가을 호수」

 그림자 가득한 자신의 얼굴을/ 누군가에게 보여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 「꽃다발을 든 사내」

 

  외로움이 극에 달한 것일까. 혼자서 차오르며 혼자서 비워내는 저수지와 그리움의 들 물길이 외로움의 날 물결보다 깊어서 호수가 되었으니 저수지와 호수는 동격의 의미로 놓아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그러나 이런 모습, 그리움과 외로움에 사무친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지만 대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좋아하는 한 묶음의 꽃다발'을 가슴에 안겨주려 온 세상을 다 헤매다녔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다. 이쯤해서 포기하는 것이 상책인듯 싶기도 하다. 드디어는 「꽃다발을 버리다」라는 시가 얼굴을 비집고 나오지만, 포기하는 모습에서 그는 자신을 돌아보며 '온통 빈 벌판인/ 내 마음속 뿐이다'라고 고백한다. 나 없이도 세상을 잘 살아낼 사람, 그런 사람을 떠나보내며 자신의 빈 벌판을 상상하는 일에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이쯤 분석하고 나니 속단(續斷)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랑하는 대상은 「그 겨울의 찻집」에서처럼 나에게 달려오고 있어 그는 부재중이었고, 나비「나비, 환생」에서처럼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어야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그리움의 존재 대상을 포기한 것을 보니 서운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본다. 시인은 실존하는 대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대한 존재를 '대상'으로 두고 물고 늘어진 것은 아니었던가. 나 스스로 바로 직립하기 위해 달려가고, 집착을 버리려 했고, 나의 존재는 세상 속에서 「내 마음의 벽화」시리즈에서처럼 소박한 구도를 갈구한 것은 아닌가. '나'를 객체로 보고 참에 가까운 나를 설정하고, 무두질해댄 것은 아닐까. 그래서일까. 시인이 원하는 자신의 존재방식은 지나치게 소박하기만 하다.

 

 내 마음의 벽화는/ 말하자면/ 거실 한 쪽 벽에/ 못 박혀있는 /동양화 액자와도 같은 것이다 /있어도 없는 듯 하다가/ 가끔 눈길이 가면/ 푸른 하늘
                                                               ― 「 내 마음의 벽화?1」

혼자만의 아침 식탁은 시작된다 / 어디쯤에서 바라보아야 꽃은 가장 아름다울까
                                                               ― 「나비, 환생」

 

 사소한 것 같지만, 이런 싯귀가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는 삶에 대한 깊은 사유에서 나오는 진솔한 자기 반성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상이 제멋대로 로그 아웃되는 수가 있지만, 그는 제멋대로 삶이 로그 아웃되지 않기 위해, 살펴보았듯이 진실된 삶을 그리워했기에 누구보다도 더 시인은 외로움을 타고 있었다. 목소리를 높혀 구호화하지 않고, 욕망에 집착하지 않고, 조급하지 않는 시 정신은 그대에게 가는 길은 내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순간임을, 사랑의 대상도,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방식 또한 스스로에게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나호열 시인의 시 정신은 「만월」에서 정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의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화두가 아닌가 싶다.

 끝으로, 「만월」을 감상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마음에 등을 달아 놓으려다
 그만
 바람결에 끈을 묶어 놓았다

 헤진 솔깃 기울 수 있을 만큼만
 불 밝혀 놓으면
 길고 모진 밤도 서럽지 않아
 너울대는 그림자도 친구가 되지

 바람 따라
 날아가 버린 등은
 저 혼자 차 올라서
고개 마루턱에 숨차게 걸려 있다

 이 밤
 먼 길 떠나려는 사람의 발 밑에
 또르르 굴러가는 이 마음은
 왜 이리 시리기만 한가

                                                      - 만월(滿月) - 전문


<산문>
킹스톤에서의 하루 [ △TOP ]
나 호 열

1. 촛불을 켜며

촛불을 켜다

밝고 맑은 날에는 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둡고 길 잃어 힘들어질 때
저는 비로소 당신 곁으로 달려가
당신의 발 밑에 엎드리는 작은 불빛입니다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저는 예비합니다
밝고 맑은 날에도 저는 영혼의 심지를 올려
어둡고 비바람 치는 날이 오지 않기를
사랑의 촛대 위에 눈물을 올립니다

저녁 식탁에 혼자 앉아서 책을 읽을 때나 와인을 마실 때, 편지를 읽을 때 촛불을 켠다. 촛불이 만들어내는 너울거림, 그림자와 음영이 가져다주는 펄럭임이 불필요한 시선을 삭제해주고 명징과 혼돈 사이의, 빛과 어둠의 경계를 부드럽게 나누어주기 때문이다. 일 주일의 여행기간 동안 빨간 양초 두 자루가 늘 내 곁에 있었다. 암호화된 카드를 넣어야 열리는 호텔의 방문, '이리 오너라!' '나야, 문 열어!'와 같은 살 겨운 외침이 없어도 그 문은 무뚝뚝하게 열리고, 왈칵 어둠을 쏟아내면 나는 전등 대신 초에 불을 당겼다.
수없이 불러보는 나의 이름과 뒤로 사라져버린 시간들의 틈새로 촛불은 바구니 속에서 고개 숙이는 장미 꽃잎으로 가만가만 나를 대신해서 울어 주었다. 슬플 때 울지 않고, 기쁠 때 웃지 않고 슬플 때는 웃고, 기쁠 때 눈물 흘리는 또 하나의 단단한 가면이 이국의 검푸른 어둠 속에서 그렇게 차곡차곡 내려 쌓이고 있었다.
나는 촛불을 켜고 시를 쓰고, 편지를 썼으며 한 켜씩 떨어지는 그 빛 속에서 육신의 아름다운 마멸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우리의 생명이 잠시 숨결을 멈추는 촛불처럼 쉬임이 있던가

2. 킹스톤 가는 길

문호리 예배당


청량리에서 한 시간
가슴까지 차 오르는 강이
오르고 내리는 버스를 타면
출렁이는 물 향기
사랑하는 사람에게 서 너 장의
편지를 썼다 지우고
억새풀로 흔들리는 잠결에 닿는 곳
가끔, 깊은 산골로 가는 기차가
경적을 울리면
길은 무섭게 한적해진다
건널목 지나
토닥토닥 몇 구비 돌고 돌아도
보이지 않는 마을
멀리서도 예배당 종소리는 울려
마을이 가깝다
작은 언덕 허리 굽혀 올라가는
오래된 예배당
아름드리 느티나무
바람에 곡을 붙여
풍금을 타고
먼지 내려앉은 나무의자에 앉아
꽃 꺾은 죄를 고백하는 곳
그 돌집 옆
모래알로 쌓아올린 큰 예배당
더 많은 죄인들이 드나들어도
아직은 견딜 만 하다고
열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영혼 속으로
숨어들 만 하다고
청량리에서 한 시간
종점까지 와서 만나는
그대는 나의
작은 예배당


* 문호리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다리를 지나 서종면 면사무소에서 좌회전하여 청평쪽으로 가면 문호리이다. 마을 입구에 작은 예배당이 있는데 나는 그 예배당 지나치며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지금은 바로 옆에 큰 교회를 세웠는데, 큰 교회, 큰 절집을 볼 때 마다 죄지은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서종면 시무소에서 문호리 가는 길에 북한강이 흐르는데 강물이 길과 같은 높이로 흘러 마치 내 가슴 속을 흘러가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저녁때쯤 되돌아오면 노을이 아름다웠던 곳이다. 지금은 문호리에서 청평댐까지 땅을 돋우어 도로가 확장되고 길과 강이 멀어져 카페 ,음식점, 숙박시설이 무분별하게 들어서서 옛날의 흥취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렇지만 그 문호리 예배당은 내 마음 속에 숨은 듯 늘 서 있다.

속력을 올리면 차는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길은 넓게 열려 있었으나 아무래도 바퀴 쪽에 이상이 있는 듯 싶었다. 타이어의 압력이 일정하지 않거나 균형이 맞지 않을 때 생기는 현상으로 생각되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그저 무사히 운전을 마칠 수 있기만을 기도하면서 떨리는 운전대를 움켜쥐었다. 바퀴가 이탈하면 어떻게 하나, 왼쪽 바퀴 하나가 떨어져 나간다면, 앞바퀴 두 개가 동시에 떨어져 나간다면 어떤 사태가 발생할까? 우선 거울을 통해서 뒤따라오는 차량의 흐름을 파악하고, 재빨리 갓길로 차를 빼야하며, 동시에 비상등을 켜고,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안 된다. 시속 90킬로에서 100키로 사이에서 들려오는 마모음이 경고하는 의미를 되씹으면서 내 삶을 해체시키는 요인들에 대해서 오랜만에 경건하게 무릎을 꿇었다. 해체는 집착이 강할수록 급속하게 진행된다. 명예에 대해서, 부에 대해서, 안락에 집착하면 할수록 그것으로 말미암아 부서지는 삶을 무수히 보아 왔다. 인생의 굽이굽이를 돌아오면서 이제는 텅 빈 겨울 들판 같은 내일이 버티어 서 있다고 해도 두렵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는 말인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지금 나는 기계의 완고함과 매커니즘에 안도하면서 이렇게 가슴을 벌름대고 있지 않은가? 이 세상에서 가져가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면서 어떤 집착에 나는 몸을 기대고 있다는 말인가?
유람선은 시간이 맞지 않았다. 바다와 같은 너른 호수 사이에 떠 있는 섬을 바라보고 노을을 바라보기에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손바닥만한 도시를 누비는 시티투어 버스를 기다리며 의자에 앉는다. 옆에 있어야 할 나의 그림자, 촛불로 타오르는 손길이 자꾸 어깨 근처에서 흘러내렸다. 늦봄의 바람은 스쳐 지나가는 한 여행자의 꿈처럼 눈에 물기를 담아낼 뿐, 나는 거기에 있었으나 나는 부재중이었다. 시청 앞에서 버스가 출발하고 50분 동안, 작은 도시의 골목길을 누비면서 노랑머리의 젊은 여자 가이드는 한시도 쉬지 않고 150년이 채 안 되는 그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내가 해독할 수 없는 낯 선 언어로 토해내고 있었다. 차라리 나는 꾸깃꾸깃해진 한 편의 시를 내 옆에 보이지 않게 앉은 그에게 보여주고 파파라치에 대해서, 폐광과 늙은 여자의 그로테스크한 대비를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더 행복했는지 모른다. 하루 종일 나와 동행했던 죽음에의 공포와 관음증에 노출된 윤리와 회귀해야 하는 시간의 유효성은 나와 함께 하면서도 좀처럼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물어보라, 그대가 벤취에 앉아 응시한 저 쪽에 누가 있었는가? 한 장의 사진 속에 그대를 담아주기 위해서 누가 빛나는 그대의 생애의 셔터를 눌러 주었는지 물어보라

3. 정적 한웅큼

면벽面壁

돌아 왔습니다
침묵 앞으로
적막 속으로
나지막히 인사 합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얼굴 씻고
흐린 세상 바라본
눈도 꺼내어 씻고
무심코 만졌던 탐욕
두 손을
마지막으로 씻었습니다
침묵 앞에 무릎 꿇습니다
적막 속의 길로 들어섭니다
돌아 왔습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준 것은 정적이다. 나는 가끔 그에게로 가서 정적과 몸을 비빈다. 정적은 단순한 숨죽임이 아니다. 정적은 운동의 정지가 아니며, 페허의 잔영이 아니다.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삶의 원동력이 되는 숨결이 그 속에 있다. 언어의 그물을 뚫고 나오는 싹이며 가장 보잘 것 없는 생명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다. 건봉사나 회암사 절터 폐허에서 만나는 정적은 참 아름답다. 신 새벽 황토 숲길에서 만나는 정적이나, 이별을 예감하며 잠깐 깜박거리는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도 아름답다. 내년에 꽃 피우기 어렵다고, 장담 못한다고 누구의 스승이 되지도 못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라고 제자가 보내온 호접란 한 盆이 두 달이 넘도록 꽃 피어 있는 모습을 몇 시간을 싫증내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정적의 힘이다.
정적은 건너갈 수 없는 강이며, 너무 높아 올라갈 수 없는 산이며, 아직 읽어낼 수 없는 삶의 경전이기도 하다.
나는 정적을 덮기도 하고, 발길로 차기도 하며, 정적을 펼쳐 세상과 장막을 치기도 한다. 정적으로 밥을 먹고, 정적의 향기를 맡고 풍선처럼 정적을 이 똥막대기에 가득 채워 스모그 가득한 하늘 위로 밀어보기도 한다.
그가 나에게 준 것은 정적이다. 정적과 대화를 해보았는가? 영어, 일어, 중국어 어느 언어로도 정적과 대화를 할 수는 없다. 수화나 점자를 동원해도 그것은 마찬기지이다. 도(道)라고 해도 기(氣)라고 해도, 열반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 정적은 내가 인식하는 만큼만 나에게로 온다. 부피로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부피로, 무게로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무게로, 너비로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비로 다가온다.
그 정적은 나이가 마흔 아홉이고, 66 킬로그램의 무게와 173센티미터의 신장을 가졌다.

4. 사랑하기 위하여

가을 호수


이제
가을 호수가 되었습니다

그리움의 들 물길이
외로움의 날 물길보다
깊어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없습니다

길이 없어
흰 구름만이 철새처럼
발자국을 남기고
눈도 씻고 가는 곳
당신의 얼굴
가득히 담아
바람은 가끔
물결을 일렁이게 하지만
당신이 놓아준
작은 숨결들을
속으로만 키우는 기쁨입니다


이제
가을 호수가 되었습니다
당신만을 비추는
손바닥만한
거울이 되었습니다

나는 우민(愚民)이면서 나는 우민(憂民)이다. 세상은 더럽고, 누추하고, 오물 덩어리 같다. 그 오물을 몸에 묻힌 채로 참 오래 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럽다 더럽다 외치면서 나는 브루조아의 달콤함을 잊은 적 없다. 세금 꼬박꼬박 내면서 그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 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남북이 통일되어야 하는데, 세상은 해체되고, 해체된 이성은 이제는 제멋대로 갈 길을 가는데, 나는 브루조아가 아닌데, 이제는 꿈에서 깨어날 때도 되었는데, 우리 애들 보다도 철이 부족하다. 시인이라면 적어도 불의의 세상에 돌멩이 하나라도 날릴 수 있어야 하는데, 취로봉사 나가는 구부정한 노인들의 옆을 매연을 풍기며 지나가는 아침에도 나는 꿈만 꾸고 있다. 할 말이 많은 것이 시인의 첫 번 째 자격인데, 변혁과 혁명과 미의 찬미자 이어야 하는데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사랑에 대해서 탐구하는 일 일 뿐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네 옆에 내가 서 있을 때 내가 아름다워지기 때문이고, 네가 내게 필요한 것은 내가 네 곁에 서 있을 때 네가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내가 해놓고도 잊어버린 말을 어느 학생이 다시 내게 들려주었다. 몇 해 전 봄 학기 강의 때였을 것이다. ‘딱딱한 철학 얘기 집어치우고 사랑 얘기나 합시다’ 라고 떼쓰는 학생들에게 아무 생각없이 떠든 이야기를 용케도 기억하고 있는 그 학생에게 나는 은연중에 나의 시 쓰기의 일단을 보여준 것은 아닐까 싶다. ‘사랑은 죽음으로 완성된다’ 이 말은 어느 시집의 짧은 글에 수록했던 기억이 나고 사랑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면서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영원히 향유할 수 없는 인간의 이상일지 모르기 때문에 그 비극성이 두드러지는 것이라고 나는 느낀다. 마더 테레사처럼,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을 구해 내려고 전생을 바친 독일인처럼, 불특정 다수를 향한 선행, 예수나, 석가모니나 공자같은 성인들, 그 모두가 인간임을 안간힘을 쓰며 찾아내려고 했던 구도자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욕망의 분출이 왜 금기시 되어야 하는가? 그들 또한 상대방을 향해서 형극의 사막을 걸어가는 순례자가 아닌가? 정의를 내리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멀어지는 관념이 사랑이다. 그래서 나는 끈질기게 인간의 유전자에 달라붙는 그 관념에 대해서 말을 걸고 싶어진다.
절친한 시인과 장충동 족발 집에 간 적이 있다. 무엇이든 잘 된다 싶으면 너도나도 원조의 간판을 내어 단다. 냉면, 갈비, 아이들이 좋아하는 떡볶이, 설렁탕, 순두부..... 원조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내밀한 욕구는 무엇일까 잠시 생각 해본다. 가짜에 너무 많이 속았다는 것이다. 국민을 위한다면서 사리사욕을 채운 정치 지도자들, 배움 따로 실천 따로인 지식인들, 그러고 보니 나도 가짜 시인일 지 모른다.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손님들로 가득한 첫 번 째 집에 주차를 부탁했다. 손님이 많아서인지 내다보지도 않고 문전박대다. 저 만큼 아래에서 어느 아주머니가 손짓을 한다. 차를 옮기고 족발을 먹으면서 그 시인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을 모나게 산다는 것은, 내가 모남으로서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둥글게 산다는 것은 세상을 적당히 살자는 게 아니라 적어도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만큼 둥글어져야 한다는 거지요’ 나는 반성한다. 올바로 걸어간다고 하면서 나는 타인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사랑은 직접적인 대상을 향해서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간접적으로 이 세상에 영향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데 주인 할머니는 이렇게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가 아니라 ‘ 고맙습니다. 맛있게 드셨습니까? 손님, 돈 많이 버세요’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씀 ‘돈 많이 버세요’ 이런 말은 처음 들었다. 돈을 주는 것이 아니지만 그 인사말은 며칠동안 내 머리에서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시가 무엇이란 말인가? 시를 쓰는 내가 즐겁고, 내 시를 읽는 독자들이 즐거우면 나는 그들에게 무량의 사랑을 주는 것이다. 어느 시를 쓰고 난 후 30분이 즐거운가 하면 어느 시는 하루가 가고, 삼일 동안 기분 좋아지는 시가 있다. 그러나 일 주일이 기분 좋고, 한 달이 기분 좋아지는 시를 아직 나는 쓰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시인이 아닌 것이다.

5. 촛불을 끄며

742호의 촛불

불을 당기면
가만가만 어둠을 밀어내는
손이 보인다

멀리도 말고
손끝에서 발름대는 향기 스치듯
호접란이 방금 날개를 펼치듯
펄럭이는 긴 소매 속에서
한 타래의 이야기가
둘둘 풀린다

누구를 생각할 때나
혼자서 술잔을 기울일 때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혼자 식탁에 앉아
부칠 수도 없는 편지를 쓸 때
촛불은 이인칭의 슬픔이 된다


나에게는
점점 키 작아지는
양초 몇 개가 있다
손길 닿으면 언제든지
꽃이 되는
손길 닿으면 금방
무너져버릴 것 같아
이만큼 바라보는
사랑이 있다


742호의 촛불을 쓰면서 742호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742호는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아파트 호수인가? 아니면, 병원의 병실? 객사? 나는 사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사랑이라는 행위의 분출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나는 단언코 말할 수 있다.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해도 두렵지 않은 마음이 사랑의 첫 출발이다. 목숨을 내놓고도 불안해하지 않는 그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랑은 가짜다. 올초에 金時羅 시인이 작고했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거지들의 삶을 그린 품바를 기획하고 민중들에게 마당극으로 알린 인물이다. 대학로에서 그의 추모공연이 있어서 간 김에 머리에 남는 대사 하나를 옮겨 적는다. 거지 왕초가 거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거지 왕초: 너희들 거지에 대해서 정의를 내려 봐라!
...중략
거지 왕초: 거지란, 있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연습을 시키는 사람을 말한다. 알았냐?

거지 아닌 존재는 없다. 우리는 서로 서로 구걸하는 존재다. 갈구만 하고, 소유만을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742호의 촛불은 742호의 장소성에 따라서 여러 갈래의 심상을 불러일으킬 것인데, 나의 의도를 이 땅의 광인狂人 송명호 시인은 적확하게 짚어내어 이런 글을 보냈다. 모골이 송연할 만큼 그는 예리하게 나를 찾아내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짜 시인은 언제든지 탄로가 나기 마련이다.

이 시는 빠스쩨르나끄의 「의사 지바고」를 연상시킨다. 지바고는 라라가 잠들었을 때 그녀와 그녀의 딸 옆에서 울면서 기도한다. ‘신이여, 이 아름다운 여인이, 이 순결한 것이 모두 저의 것입니까’
작품에 나타난 라라는 러시아 대지를 상징하고 러시아 대지는 시인 철학자를 사랑한다 뜻의 지바고를 사랑한다. 이 시에서의 촛불은 시인의 고결한 내면을 비추는 불꽃이다

그의 글을 읽고 나는 확실하게, 내가, 아직까지도 가짜 시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의사' 지바고'의 기도를 읽고 그 아름다움에 반해 끝내 러시아어를 독학했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촛불을 끈다. 얼마간은 말을 잃어버릴 것 같다.

<산문>
절망, 너에게 쓰는 편지 [ △TOP ]

나호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이 글을 쓴다. 길어야 보름 남짓 지상에서의 짧은 삶을 위해 십 년을 땅 밑에서 보내는 매미의 일생이 처연하리만큼 아름답다. 어디 아름다운 것이 매미뿐이겠느냐. 잠자리, 거미로부터 시작해서 아무 곳에나 풀석풀석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풀꽃 하나 하나가 다 눈물겨운 생명의 묵시록이 아니겠느냐. 우리에게는 미물에 불과한 저것들이 나에게는 경전이 된다. 회초리가 된다. 이제야 철이 드는지 세상이 초점이 잡히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이 뿜어올리는 안개, 존재와 존재 사이에 가득한 안개, 서로를 떨어뜨려 놓기도 하면서 더욱 서로를 껴안아 주는 저 이상한 힘을 이제야 똑바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안개를 시로 쓰고 싶다. 종이 위에 방울방울 이슬로 맺혀있다가 눈길이 닿는 순간 안개로 가득 피어오르는 시, 그리하여 결국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안개의 시, 시의 안개......
그 안개를 절망으로 쓰기도 하고, 희망으로 읽기도 하며 사랑과 외로움으로 뒤바꿔 보기도 한다.그 모두가 오역일 뿐인줄 알면서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어
그 자리에 놓여진 것들 탐내지 않고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고
부드럽게 감싸안을 줄 아는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어
처음에는 더듬거리고 막막해 하다가
한 걸음씩 고개 숙여 걸어가다 보면
엷은 슬픔의 축축한 옷 안개의 속마음을 알게 되지
껴안을수록 나의 두 손은 허허로운 가슴께로 모두어지고
헤쳐나가면 나갈수록 무겁게 다가서는 생을 사랑하게 되었어
한 걸음 벗어난 아득한 벼랑 너머에도
하늘과 땅 밑에도 길이 있음을 눈감고 알게 되었어


졸시, '안개' 전문


누구나 한 번은 그 자리에 무너져서 땅 밑으로 꺼져버리고 싶은 절망에 휩싸일 때가 있다. 절벽 위에 서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 핸들을 꺾어 침범해서는 안될 금지의 노란 선을 건너가야할 것 같은 유혹......나는 배웠다.'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는 없다'고, 단지 무엇무엇으로부터의 제한된 자유만이 허용될 뿐 이라고....
그러므로 나는 용케도 절망의 유혹으로부터 빚어진 죽음을 벗어날 수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길들여진 기계적인 사고방식과 무한한 욕망의 사슬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절망을 안고 뒹굴며 절망과 한 몸이 되는 것이었다. 함부로 절망을 입에 올려서는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희망을 떠벌려서는 더욱 더 안되리라.



방법은 세 가지다
가고 없는 사람 앞에 서성이듯
스스로 그 벽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기다리거나
아예 그사람 잊어버리듯
벽을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벽을 뚫고 벽을 넘어서거나


그러나 오늘도 나는
내 앞에 버티고 선 우람한 벽을
밀어보려고 한다
사실은 꿈쩍도 하지 않는데
사실은 벽 때문에 조금식 뒤로 밀리고 있을 뿐인데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다라고
한 줄이면 다 끝나버릴 텐데

- 시집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중에서


그동안 몇 편의 영화와 몇 번의 짧은 여행이 나의 절망과 동행하였다. <애나벨 청 스토리>,<섬>,<반칙왕>,<주유소 습격사건>,<박하사탕>,<정>,<심동>,.....경주 남산, 진천, 김제......
250명의 남자와 섹스를 하면서 욕망으 한계를 깨닫고 그것 마저 극복해 보려 했던 한 여자, 고립된 저수지에서 치명적인 사랑을 나누고 스스로 파멸해 버리는 두 남녀, 억압으로 다가오는 사회의 가위눌림을 온몸을 짖고 부수는 프로레슬링의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반칙으로 치환하는 은행원, 저마다의 상처를 휘발유와 같은 분노로 폭발시키는 철없는 젊은이들,공룡과 같은 권력의 무모한 파괴 앞에서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짐으로서 항거하려 했던 전직 경찰관, 아이를 낳지 못하고 버림받았으면서도 오히려 그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연민을 보내고, 부모로부터 버려진 한 아이에게 정을 주며 평생을 산 여인, 사랑하면서도 인생의 길을 엇갈리며 지나가는 사람들, 그들의 삶에 나의 삶을 대입시키면서 얼마나 많은 자아들이 안개처럼 뭉친 채로, 아니면 안개처럼 분열된 채로 내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쥐 죽은듯 잠복해 있다가 어느 순간에 탈옥하는 죄수처럼 뛰쳐나오는 자아의 파편들, 짧은 여행은 그런 자아들을 짐짓 모르는 척 하며 깊은 산 속에, 저수지에, 길가에, 바다에 방목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사랑은
꽃이 아니다
꽃 지고 난 후의 그 무엇
사랑은 열매가 아니다
열매 맺히고 난 후의 그 무엇


그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이 지상에 처음올 피어나는 꽃
이 지상에 마지막으로 맺히는 열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 시집,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중에서

너는 결코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감포에서 구룡포를 지나 포항, 영덕으로 가는 밤길은 너무 길었다. 너는 아는 것이다. 어떤 사태를 관념화함으로써 우리는 망령 하나를 새롭게 갖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너는 믿음직스럽다.


그는 실종 되었다. 나는 실종된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매복해 있던 안개가 불쑥 튀어나올 때 마다 급히 핸들을 꺾어야하는 밤길을 달리며 그를 생각해 본다.
바다에 가서 바다에게 물어 보라. 외롭다고 말하면 바다는 더 큰 목소리로 외롭다고 말하고, 슬프다고 말하면 더 슬픈 몸짓을 바다는 보여준다. 그래서 결국엔 면벽하듯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의 침묵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윽고 이른 아침, 긴 방파제 끝에 서 있는 자동차와 그의 구두, 옷가지들을 수습했다. 아무도 그를 보지못했다고 했다. 두 병의 소주를 마셨던 그 밤을, 그를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허물벗듯 버려두고 간 사물들, 그런데도 바다는 너무나 푸르러 눈물이 아리다. 꿈이었던 것이다. 그가 터벅거리던 해안도로와 그림자,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등짐이었던 외로움이 다 허상이었던 것이다. 사막에 부는 바람을 그리려 하는 화가처럼, 나는 안개를 온전한 안개로 써낼 수는 없을까?


그를 만나러 감포에서 울진으로 간다
얼마나 먼 곳에서 숨차게 달려와 쓰러지는 것인지
너울대는 포말이 순간 흰 꽃으로 핀다
피었다가 지면서 파도를 움켜쥐며 날아오르는 갈매기
망막을 할퀼 때 마다 길은 급하게 왼쪽으로 꺾인다
그를 만난 지 오래 되었다. 사랑을 잃고 타향에 몸 붙인 그를
이제야 만나러 간다
그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 밤길을 달려 방파제 끝에서 서성였는지를
왜 막막한 바다에 줄을 던져놓고 마시지 못하는 소주를 두 병씩 마셨는지를
밤바다의 울음이 두통을 일으킨다
흐드러지게 핀 흰 꽃들은 일제히 고개를 꺾어 길을 막는다
그가 말하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서둘러 이야기 한다
외로운 사람이 바다로 간다
외로운 사람보다 더 외로운 것이
바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바다로 간다
그는 울진 방파제에서 실종되었다


졸시, 밤바다 , 전문


나의 막막한 구애 앞에 너는 결코 흐트러짐이 없다. 경주 남산을 넘으며 바위에 아로새겨진 천 년 전의 석불을 옆 눈으로 보면서 나의 굳은 생애에 깊이 새겨진 너를 생각했다. 오체투지하듯 온 몸을 부벼대며 산을 넘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훌쩍 산을 넘어가는 가벼운 구룸, 너에게 가는 길이 곧 세상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주름진 나의가슴에 알듯 모를듯 미소인듯, 울음인듯 울려 퍼지는 종소리, 안성 칠장사 아침 햇살이 가득한 모란 잎에서도 너를 보았었는데, 그것이 신기루였다고 너는 말한다.


누가 이렇게 이뿐 이름 걸어놓고
황홀하게 죽어갔는가
무지개
그 양쪽 끝에서
터벅거리는
사랑
사막
지옥


- 졸시, 실크로드, 전문

김제 금산사에서 도영 스님을 만난 것은 뜻 밖이었다. 수많은 산사를 순례하였지만 스님들과 대화를 해 보지는 않았다. 그들의 수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될 수 있으면 경내에서는 발자국 소리조차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팔공산 파계사에 갔을 때였던가, 인기척소리에 호기심이 일었던지,사미승이 살짝 문을 열어 내다보다가 눈길이 마주쳐 황급해 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인연에 대한 말씀을 듣는다. 눈빛이 맑다. 참 맑다. 청정한 바람으로 씻은 눈. 적막으로 내려 앉힌 묵직한 음성, 그는 인연을 이야기 한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으며 오늘의 마주침은 과거의 인연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늘 자중자애하여야 한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곧 '너를 사랑하는 것'이다. 끈질기게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절망이여! 이제 이쯤에서 이별을 해야하지 않겠는가. 올가미처럼 옥죄어오는 절망이여! 그 올가미가 녹슬어 스스로 끊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는가.

떠난다는 것은


그리웁다는 것은 그 무엇이 멀리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행하면서도 등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등 돌린 채로 등 돌린 채로
아무리 불러봐도 뒤돌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웁다는 것은 아직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대가 있어 아름다운 세상 곁에
나도 가만히 서 있어 보고싶다는 것이다.


- 시집,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중에서

나는 이제 그립다고 너에게 말하지 않으려 한다. 나에게 절망이며 희망인 너에게 내 곁에 있어야 한다고 윽박지르지 않으려 한다. 너를 이제 밤하늘의 별로 남겨 두어 오래오래 경배하려 한다. 항아리 속에 깊이 슬픔의 열매를 거두어 들이고 눈물을 가득 부어 안개 가득한 세월의 마당에 묻어두려 한다. 그 어느날, 참지 못하도록 고운 향기가 퍼질 때 그대 나그네처럼 나에게 오기 바란다. 은은한 향기 가득한 시심의 항아리를 지금 나는 서둘러 빚어야 한다.

<산문>
나에게로 가는 길 [ △TOP ]

나호열


변화없는 삶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내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곡절많은 몇 해가 지나갔다.분칠을 해서 변한 것 인지 아니면 허물을 벗어서 변한 것 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세간에 몸을 두고 있으되,정신은 변방으로 하염없이 떠밀리어 갔다는 점이다.
가까웠던 사람들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규격화된 질서로 부터 몸을 빼면 뺄수록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옥죄어오는 불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던 시간들 이었다.그동안 많은 시를 읽었으나 시를 쓰지는 못하였으며 외로웠으나 그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한 어떤 몸짓도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렇지 않다! 낡을대로 낡아서 툴툴거리는 차를 달래가면서 악을 쓰듯 여장을 꾸렸던 것이 몇 번이었던가! 쫓기듯 떠났다가 쫓기듯 되돌아왔지만 나는 격포바다 노을을 만났으며,정선 아우라지의 물빛,새벽 내소사 숲길의 정적을 걷기도 하였으니 내다버린 발품은 헤아릴 길이 없다.지난 몇 년 동안의 행보는 바람과 같이 정처 없으면서도 나의 모든 삶의 어떤 기간보다도 치열했으며 순수했다.걸레처럼 육신을 현실에 문질러대면서 나를 미워하고 그리고 용서했다.

지난 해 여름,글공부하는 친구들과 동해로 떠났었다.정동진에서 바다를 보고 일출을 보면서 새벽에 나누는 커피 한잔의 낭만을 꿈꾸었지만 그보다도 고성 지나 건봉사와 속초 바로 위 청간정이 더 내 마음을 설레이게 했다.
서울에서 동해로 가는 길은 여럿 있지만 홍천,인제로 해서 한계령이나 미시령을 넘는 길을 버리고 홍천에서 어론으로 빠지는 구룔령 길을 우회해서 동해로 가는 길을 나는 좋아한다.너무 한적해서 눈물이날 지경인 도로와 고갯길을 더듬어가며 나는 청간정을 찾았었다.관동팔경 중의 하나였다는 과거 속의 정자,나는 비오는 저녁 그 누에 올라 대책없이 전개될 삶에 대해서 바다에게 물어 보았다.막막하기는 바다도 마찬가지여서 바다는 말없이 오징어배를 보여주었고,인간의 노동을 가물거리는 오징어배 불빛으로 보여 주었으며, 그 불빛은 처연한 눈물로 내게 돌아왔다.
그 다음 날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물어 물어 건봉사에 들어갔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새롭게 조성한 멀끔한 절간이 아니라 광막하게 비어있는 폐허였다.푸르르게 잡풀이 이름모를 풀꽃들을 피워내고 그 사이 사이로 빗줄기가 내려꽂히던 너른 공터에서 나는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할 길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내 몸과 마음을 낮추는 것.....그리고 그 해 여름이 가기 전,타성처럼 내 입으로 들어오던 월급봉투와 결별했다.

나는 친구들에게 비어있어 아름다운 건봉사와 청간정을 곡 보여주고 싶었다.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그들은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들은 어서어서 모래시계의 추억과 고현정 소나무를 보고 싶어 했으므로 서둘러 그 곳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80년대 초반,고적한 어촌이었던 정동진에는 인공으로 찍어만든 허위의 추억과 수다스러움만이 널브러져 있어 더욱 외로울 수 밖에 없었다.
백복령을 넘어 정선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강능에서 태백으로 가는 길도 좋지만 처음 넘는 백복령도 숨이 막혔다. 아우라지에 도착했을 때 산으로 둘러싸인 고독이 내 마음 어느 한구석에서 고즈녁한 풍경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이 물과 저 물이 합치고 침묵으로 버티고 누운 돌맹이 몇 개를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길고 긴 강물과 동행하여 서울로 돌아왔다.지금도 마음 한 구석에는 내 눈길을 받은 아우라지 돌맹이 몇 개가 제멋대로 굴러 다니고 있다.

나는 지금도 여행을 꿈꾼다.주마간산으로 이 곳 저 곳을 다니는 것이 아니라,한 곳에 오래 머무르며 계곡 물소리를 싫증나도록 듣고,꽃이 벙글면서 개화하는 순간 순간을 끈기있게 들여다 보고 싶다.밤이면 소쿠리로 가득 넘쳐나는 별들을 밤새도록 세고 싶다.너무 숨차게 달려온 길을 될 수 있으면 천천히 되새김하고 싶다.

사람에 실패하고 낙향한 처갓집 하동가는 길. 문득 차의 속력을 늦추자 주변의 사물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논둑길을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농부와 누렁소가 손에 잡힐듯 거기에 있었으며,화순 그 어디메쯤에는 청청한 대나무숲이 바람을 갈아엎고 있는 것이 보였으며....낙엽,잔솔 가지로 밥 짓는 연기가 사람 사는 마을이 어디쯤인가를 넌즈시 일러주고 있었다.아내는 꽉 쥐었던 손잡이에서 손을 풀어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엑설레이터에서 힘을 빼자 도착해야 할 곳이 아직 멀었다는 느낌보다 오히려 내가 도달해야할 곳을 이미 지나쳐버린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올 봄, 팔 년 동안 10만 킬로미터가 넘게 마음 속을 맴돌았던 차와 이별했다.이 놈의 고물차,버리고 말거야 속으로 되내이던 것이 몇 번 이었던가,익숙해진다는 것,길들여진다는 것,그런 습관을 하루 아침에 지워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손길과 눈길이 닿아 있는 이제는 퇴색해 버린 고물차는 혹시 내 자신이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다.시인이 될 수 있을까? 시가 나를 벼리는 날카로운 칼날임을 알아차린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내가 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나를 사람답게 만드는 것 임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만일 이별을 해야 한다면 나전이나 통리같은 오지마을에 가서 해야할 일이다.쉽사리 가지도 못하겠지만 쉽사리 되돌아 올 수 없도록 싸리꽃 슬프게 핀 저녁쯤 눈물 거두고 싶다.
싼 웃음이 아니라 숯검뎅이 묻은 눈물을 시로 쓰고 싶다.벼랑에 서서 뛰어내릴까 말까 망설이는 시가 아니라 백척간두 진일보를 외치며 아득한 벼랑 아래로 나뒹글어진 참담한 비명같은 시를 쓰고 싶다.
어느날 문득 이 모든 추억들이 스멀거리며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듯이 기어나오고 있었다.나는 보던 책을 덮어두고 오래동안 거들떠 보지 않았던 휴대용 컴퓨터를 꺼내 들었다.먼지가 뽀얗게 앉은,손길이 닿지 않아 너무나 적요했던 내 마음의 조각들이 화면에 밀려오고 있었다.어떤 것은 새벽바다의 암석에 부딪치며 하얀 포말이 되기도 하였고 어떤 것은 벌써 염전의 흰 소금으로 변해 가기도 하였다. 용케 버려지지 않은 시들이 여기 남아 있다.

사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