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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날의 장미빛 초상 - 강인한의 ' 율리의 초상'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8. 12. 23:29

젊은날의 장미빛 초상 - 강인한의 ' 율리의 초상'
        

                                   김재홍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율리의 초상

 

 

의사의 딸 율리.
여하교 때 반장을 하던 단발머리
촉촉하게 젖는 오월의 밤이슬이
외로울 때 맺히곤 했다
내 싱거운 이야기에 곧잘 끄덕이고
항상 눈이 흰 겨울을 살고 싶다는 율리,
네 따스한 손바닥에
내 작은 생애를 얹어 보고 싶었다.
때때로 술에 취하면 화가 나서
난폭하게 편지를 쓰고
마리안느의 사슴처럼 장미빛의 피 흘리며
네 곁에서 죽고 싶었다.
아카시아 향내가 네 눈에서는 풍겨
안타까운 너의 꿈을 찾아간
오월의 어느날
그날 밤 거리에는 안개가 피어올라
네 피로스런 단발머리를 빗질하며 있었다.
율리, 너는 별이 뜨는 오렌지쥬스를 마셨고
불붙는 위티를 나는 마셨다.
깊은 밤 빠알갛게 타는 불씨를 보며
네 순한 고집을 꺾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나 율리,
떠나오는 내 여행은 언제나 비에 젖는다.
차창 밖으로 뿌려지는 산골짜기의 꽃무데기
주정을 던지고 던지는 나에겐
적막하게 웃는 율리, 네가 보였다.
어머니의 가슴에 자줏빛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돌아서 조용히 우는 내 착한 누이.
네가 지금 보인다.
저 먼 불빛이 우는 내 착한 누이.
네가 지금 보인다.
저 먼 불빛이 영그는 풀잎 사이로
걸어가는 조브장한 어깨.
주일이면 까만 성경책 위에 얼굴을 묻고
자그마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오래 기도하는 율리,
네 작은 손바닥에 가만히
낙엽같은 내 이름을 얹어 보고 싶었다.

 

▶작품 감상 -----------------------------------------------

 젊은 날의 뜨겁고 순수한 연애감정을 아름답게 노해한 또 한 사람의 서정시인을 기억하시겠지요. 근년에 시집 [우리나라 날씨]를 간행해서 주목을 받은 바 있고, 지금 광주 사fp지오고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멋쟁이 시인 姜寅翰을 말이니다. 일찍이 李嘉林, 朴正萬 등 전주고교가 배출한 뛰어난 젊은 시인군의 선두주자로서 이름을 날리던 그 사람을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최근 시는 60년대 그의 시와는 매우 달라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나라 木版本의 가을/한쪽으로 기러기떼 높이 날아/칼끝처럼 찌르는 일 획의 슬픔/갈대여/ 끝끝내 말하고 죽을 것인가/어리석은 山 하나/말없이 저물어 스러질 뿐/역사란 별것이더냐/피묻은 백지, 마초 한다발> ([가을悲歌] 전문)이라는 그의 시에서는 날카로운 절제의 정신과 비극적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지요. 또한 서정적인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단호하고 엄격한 지사적 기품이 스며들어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고양시키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오히려 지난날 그의 연애시들을 더 즐겨 읽곤 한답니다. 그의 연애시들은 저에게 시를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에는 젊은날을 설레이게 하던 <촉촉하게 젖는 오월의 밤이슬>과 <장미빛의 피/아카시아 향내>가 살아 숨쉬고 있으며, <비에 젖는 여행>과 <장미빛의 피/아카시아 향내>가 살아 숨쉬고 있으며, <비에 젖는 여행>과 <불붙는 위티>가 담겨 있고, <밤안개가 피어오르는 거리>와 <눈이 흰 겨울> 풍경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기 때문일 겁니다. 또한 그 속에는 <네 따스한 손바닥>처럼 젊은날의 체온이 간직되어 있으며, <적막하게 웃는>쓸쓸한 추억이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아울러 사랑하던 소녀 율리와 어머니 그리고 누이가 등장하는 것도 설레임을 더하게 해주는 것이겠지요.
 
 마치 朴寅煥이 1950년대의 폐허 속에서 [木馬와 淑女]를 통해 분위기 있게 사랑과 애상, 허무주의라는 시대정신을 표현해 낸 것처럼, 강인한도 60년대의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 마치 김승옥의 『서울1964년 겨울』이라는 작품집처럼 사랑과 애상을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박인환의 경우처럼 이 시에도 일견 서구풍의 시적 감수성이 멋스럽게 깔려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소의 유치함과 감상성을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땅의 50∼60년대를 관류하던 한 유행적 징후였음에야 어찌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시는 먼저 다양한 감각들이 섬세하게 교직되어 현란함을 더해줍니다. 즉<오월/장미/이슬/피/별/안개/불씨/비/꽃무데기/풀잎/성경책/낙엽>등과 같이 서정적인 시어들이 <촉촉하게 젖는/눈이 흰/따스한 손바닥/술에 취하면/아카시아 향내/단발머리를 빗질하며/오렌지쥬스를 마셨고/깊은 밤 빠알갛게 타는 불씨/비에 젖는다/먼 불빛이 영그는 풀잎>등의 공감각적 이미지들과 다채롭게 어울려서 젊은날의 싱싱하고 열정적인 모습을 형상해 주고 있지요. 어쩌면 거기에는 젊은날을 지배하던 알지 못할 애상적인 광기와 함께 지적 허영도 깔려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실상 그러한 것들 자체가 순수함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무엇보다도 이 시에는 물과 불의 대립적인 심상들이 서로 갈등하면서 그 뼈대를 이루고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물의 심상은<이슬/눈/안개/비/풀잎/울음/>등의 하강적인 정감들로 연결되고, 불의 심상은 <술/피/불/꽃무데기/불빛>처럼 상승적인 熱부의 정감으로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물과 불이라는 대립적인 심상들이 서로 부딪치며 들끓고 있는 것은 실상 절은날의 정리되지 않은 혼돈과 열정 또는 갈등과 모순의 반영이라 할 겁니다. 어쩌면 그러한 복합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와 모순의 작용이야말로 사랑의 한 원형적인 모습일 게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아울러 이 시에 짙게 흐르는 여성주의, 즉 페미니즘(feminism)과 비애의 정조도 실은 그 젊은 날의 순수에의 지향을 반영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이 시는 낭만적인 애상을 바탕으로 하여 물과 불의 대립적 심상을 감각적으로 묘사람으로써 환상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젊은날의 연정을 화사하게 펼쳐 보인 60년대 사랑시의 한 표본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쉬임없이 내리는 여름 장마비 속에서 우리 젊은날 회상의 불길을 지피면서 그 그리운 시절로 다시 한번 추억여행을 떠나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시인약력 ------------------------------------
1944년 전북 정주출생. 전북대 국문과 졸업. 1976년 조선일보로 데뷔. 현재 광주사레지오고교교사. 시집으로 [강인한시집], [우리나라날씨]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