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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아나키즘과 분열증의 언어 - 2005년의 젊은 시집들 - / 이광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7. 24. 21:34

시의 아나키즘과 분열증의 언어 - 2005년의 젊은 시집들 -  / 이광호
   
  이것은 폭발이다. 2000년대 들어와서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다른 시’의 징후는, 2005년에 이르러 폭발적인 양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젊은 시인들의 실험적인 시집이 잇달아 출간되면서 한국시단의 지형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돌이켜보면, 90년대의 시는 80년대 초반의 전위적 에너지로부터 소비사회의 대중문화적 상상력으로 전이되는 한편, ‘신서정’과 ‘생태시학’으로 명명된 서정시적 문법으로의 회귀 양상을 보여주었다. 2000년 이후의 젊은 시인들은 90년대의 장정일, 유하, 이원 이후의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던 전위적인 미학을 재충전하여 낯선 시적 감각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소설 장르가 여전히 출판시장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과는 달리, 젊은 시인들은 시의 그 반시장적인 운명을 첨예하게 밀고 나감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문화적 활력을 회복한다. 2000년대 초반의 이장욱, 김행숙, 진은영으로부터 이미 그 단초를 보여주었던 이 새로운 미학은 2005년 장석원, 이민하, 황병승, 이성미, 신해욱, 김민정, 유형진, 박진성, 김언 등 젊은 시인들의 첫 시집의 출간으로 집단적인 움직임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이 집단적인 양상에는 물론 세대적인 이미지가 스며들어 있다. 새로운 대중문화적 감수성을 보여주었으나 여전히 서정시적 세계관의 자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 이전 세대들에 비해, 이들은 더욱 근원적인 방식으로 탈서정시적 글쓰기를 실현한다. 이들의 집단적 등장이 ‘문학운동’적 차원의 의식적인 전략의 소산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이들 내부에서도 다양한 시적 편차가 존재한다. 또한 이들을 한데 묶어 그 집단적 동일성을 규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어쩌면 억압적인 가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시적 전선의 지점들을 점검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이들의 시적 특징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호명할 수 있겠지만, 서정적 형식의 중심으로서의 시적 자아를 지우고 그것을 탈주체화하는 것을 시쓰기의 전선으로 볼 수 있다. 재래적인 의미에서 서정시는 일인칭 주체의 투명한 영혼과 그에 대응하는 단일한 목소리에 의해 구성된다. 서정시에 서사적 요소를 도입한 이른바 ‘민중시’의 경우나, 우울하고도 건조한 모던의 감수성을 드러낸 시들에서도, 시적 담론을 통어하는 일인칭 주체는 언제나 완강한 지위를 가진다. 서정시적 주체는 하나의 서정시의 일관된 정조와 구조적 동일성을 유기적으로 관장하려는 위치를 갖지만, 이들의 시에서 이러한 서정적 주체는 근본적으로 분해된다. 서정적 주체 자체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작업을 통해 서정시의 언술은 심각한 혼란과 균열의 상태에 처한다.

 

 

  이 탈중심화된 언어를 가령, ‘분열증적인 언어’라고 부를 수 있다. 보수적인 이론의 입장에서 ‘분열증’이란, 주체가 아버지의 부성적 기능, 즉 법의 역할을 담당하는 상징계적 질서 안에서 ‘정상적’으로 안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롯된다. 임상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부성적 시니피앙의 위계 질서에 편입하지 못한 소외를 의미한다. 그러나 역으로 혁명으로서의 분열증은 부성적 위계질서와 상징계의 와해를 뜻하는 ‘해방’적인 것이다. 언어적인 의미에서 분열증적인 언어는 부성적인 위계와 예속의 관계를 포함하지 않고 특권적 시니피앙과 유기적인 질서를 거부하는 내용과 표현의 무제한적인 흐름만이 있는 언어이다. 

 

  물론 2000년대 이전에도 탈서정시적 문법을 시험한 사례는 적지 않다. 가령 황지우를 비롯한 80년대의 전위적인 시들에서 탈서정시적 화자를 채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 경우 그러한 화자의 선택은 전략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런 ‘횡설수설’의 뒷면에서 그것들을 통어하는 함축적 화자의 일관된 의도가 감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페르소나의 대체이지, 페르소나 자체의 분열증적인 와해는 아니었다. 이러한 위장된 페르소나의 채택은 70년대의 시에서, 가령 민중적 화자를 선택한 신경림과 자기반영적 화자를 채택한 황동규, 오규원의 경우에서도 등장한 바 있다. 이런 경우에도 ‘진정한 화자’는 언제나 그 뒤에서 서정적인 혹은 비판적인 주체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미학적 사태는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수준의 것이다. 분열증적인 화법의 뒷면에 그것을 통어하는 함축적 주체의 존재감이 없다. 이들에게 분열증적 언어는 전략적인 차원이 아니라 존재방식 그 자체이다. 그것은 새로운 페르소나의 등장이 아니라, 페르소나 자체의 와해이며, 시적 자아라는 관념 자체로부터의 탈주로 부를 수 있다.1)

이것은 이들의 문화적 감각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90년대의 시에서 대중문화를 다루는 방식이란 유하의 시가 보여주는 것처럼 주류 대중문화에 대한 매혹과 그 반성적 거점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주류 대중문화에 침윤되어 있으면서, 그것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시적 자아가 등장했다. 그런데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은 하위문화적 상상력을 실존적 존재방식의 하나로 육화하고 있으면서, 경계를 무화하는 혼종적 글쓰기의 놀이를 보여준다. 하위문화적 글쓰기는 주류 대중문화라는 새로운 문화적 권력의 주변부에서 꿈틀거리고 흘러넘치는 무제한적이고 탈경계적인 움직임이다. 거기에는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거리와 반성적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하위문화적 공간의 상대편에 다른 서정적 공간을 만들지 않는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그 이전 세대의 전위적인 시학이 ‘망명정부’의 그것에 가까웠다면, 이 세대의 문법은 ‘무정부주의’의 것에 훨씬 가깝다. ‘망명정부’로서의 시학에서 중요한 것은 ‘저항’과 ‘반성’의 코드이고, 현실의 억압과 타락을 대체할 시적 공간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 시학에서 이제 지상의 순결한 서정적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서정적 주체화 작업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서정시의 미학적 위계와 인식론적 주체를 무화시킨다는 맥락에서, 이들의 시적 ‘아나키즘’은 2000년대 시의 가장 첨예한 미학적 전선을 이룬다. 2005년에 출간된 시집들에서 이러한 시적 탈승화 과정을 날카롭게 보여주는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만나보자.

 

 

원숭이가 앞구르기를 한다
틀어쥔 목의 사슬을 놓아주는 주인
꺾인 꽃처럼 나를 놓아주던
검은 눈동자에 어리는 아버지

내가 지니고 있던 무덤 밖으로
검은 나비 날아간다
짐승이 바라보는 별처럼

검은 나비를 쳐다본다

 나비야, 나는 두개골에 숱 많은 털을 달고 있는 포유류, 어머니의 젖꼭지를 빨며 절망을 체득한 원숭이, 지능을 방패삼아 진실을 회피하는 유인원, 세계를 거짓으로 채색하는 언어를 지니고 날숨마다 허상을 뿜어냈지. 나도 그처럼.……모든 것이 현재진행형으로 멸종되고 있는 경동시장 네거리에서, 나비야 나비야……

                  - 장석원, <나의 전부는 거짓이었다>(「아나키스트」 문학과지성사)

 

 

  장석원은 그 이전 세대가 보여준 저항과 전복의 열정을 간직한 채로, 시적 자아를 새로운 존재로 이전시킨다. 이 시에서는 경동시장 네거리의 사슬에 묶여 재주를 부리는 원숭이와 그의 절름발이 주인으로부터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추출된다. 그것은 헤겔 철학이 인간의 인정투쟁의 욕망을 설명하는 하나의 논리이다. 원숭이를 통해서만 자기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주인이 역으로 원숭이의 노예가 되는 변증법적 과정. 그런데 이 시에서 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다른 차원으로 옮겨진다. 우선은 ‘나’와 ‘아버지’ 사이의 외디푸스적 관계에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비유적으로 언급된다. 그런데 ‘아버지’는 “꺾인 꽃처럼 나를 놓아준”다. 그리고 “내가 지니고 있던 무덤 밖으로” 날아가는 ‘검은 나비’가 돌발적으로 출현한다. 이탈의 이미지를 발산하는 ‘검은 나비’의 상징적 의미를 찾아내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문제는 ‘내’가 ‘나’를 다시 호명하는 방식. ‘포유류’, ‘원숭이’, ‘유인원’ 등으로 나를 재호명함으로써 ‘나’는 ‘역진화’의 경로를 밟는다. 이 호명은 주체를 주체화하는 이데올로기적 호명이 아니라, 인간 주체를 ‘짐승’으로 호명함으로써 그 주체화를 저지하는 분열증적인 호명이다. 탈승화의 호명을 통해 인간적 주체로서의 ‘나’로부터 포유류로의 역진화가 이루어진다. 이 역진화의 사건에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인간학은 이제 의미가 없으며, 외디푸스적 관계의 상징 질서도 무화된다. 짐승의 세계에서 인정투쟁의 변증법적 과정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 짐승-되기의 세계에서 ‘나’는 “허상을 뿜어내는” 존재이며, 시의 제목처럼 “나의 전부는 거짓”이다. 이런 주체의 역진화는 그것이 놓인 ‘경동시장 네거리’라는 물질적 공간 자체를 “현재진행형으로 멸종되는” 자리로 만든다. 그리하여 이 시는 원숭이와 주인을 보는 시적 주체의 시선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 시선을 자기 내부의 것으로 옮겨오고, 다시 ‘자기’의 주체화 자체를 부정하고 세계의 멸종을 체험하는 사태로 진행된다. 이 한 편의 시는 대상에 대한 시적 주체의 시선이 다시 그 시선의 주체성을 무너뜨리는 탈주체화의 ‘호명’으로 전복되는 하나의 드라마이다.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처럼 깊숙이
당신도 가지고 있지요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백 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 할머니도 됐다가……

                 

                - 황병승 <커밍아웃> 일부 (「여장남자 시코쿠」 랜덤하우스중앙)

 

 

  장석원의 시에서 ‘포유류’의 차원으로 역진화했던 시적 자아는 황병승의 시에서는 신체의 일부로 찢겨진다. 우선 이 시의 제목은 ‘커밍아웃’이다. 이것은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적 취향과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행위를 말한다. 넒은 의미에서 그것은 사회적 시선에 의해 왜곡된 자신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사회에 대한 주체의 진정한 자기 고백이자 선언에 해당한다. 이 시에서 커밍아웃의 내용은 기괴하다.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라는 첫 문장에서 보이는 것처럼, ‘나의 진짜’는 ‘뒤통수’이거나 ‘항문’이다. ‘나’의 정체성을 ‘뒤통수’와 ‘항문’으로 선언하는 것은, ‘나’의 공개적인 ‘전면’이 아닌, ‘나’의 신체적인 뒷면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그런데 ‘뒤통수-되기’ ‘항문-되기’의 선언은 진정성의 담화이기보다는 일종의 모든 것을 혼종적으로 뒤섞는 시쓰기의 유희에 가깝다. ‘커밍아웃’이라는 개념 속에는 자아정체성에 관련된 ‘진짜/가짜’의 이분법의 위계가 남아 있다. 하지만 이 분열증적인 ‘커밍아웃’의 세계에서는 ‘진짜’의 놀이는 타자와의 일그러진 소통 속에서 무의미한 유희가 된다. 이 시에서 끊임없이 호명되는 2인칭 ‘당신’은 서정시의 일반적인 2인칭의 세계에 속해 있지 않다. 그것은 ‘나’의 서정적 대상으로서의 ‘당신’이 아니라, “부끄러운 동물을” 잔뜩 그 속에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나’일 뿐이다. 이 시에서 ‘나’와 ‘당신’은 이미 존재론적으로 타자이며, 이 분열된 타자들의 세계에서 ‘나’와 ‘당신’은 더 이상 주체와 대상의 위치에 있지 않다. ‘당신’은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하는 “백 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 할머니도 됐다가” 하는 불안정하고 실체 없는 존재이다. 이 과정에서 ‘나’와 ‘당신’의 서정적 위계는 뭉개진다. 시적 자아로서의 인격적인 주체는 비인격적인 신체의 일부로 혹은 죽은 자의 이름으로 변모한다. 이런 사태에 따라 여기서의 ‘커밍아웃’은 정체성의 사회적 승인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호명된 자아정체성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교란에 직면한다.

 

 

  내가 날 굽는 냄새가 피어오르자 해골들과 부위 모를 뼈다귀들이 앞다투어 모여든다 석쇠 위에 고여 있던 핏물이 선지로 돌돌 말아 빚은 완자처럼 지져져 더욱 더욱 쫀쫀해진 내가 날 엿가위로 한 입 두 입 잘라 굽는다 따각따각 아귀 터지게 턱 벌리는 해골들에게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을 바싹 태워 먹여준다 오일 바른 상아같이 매끈매끈한 뼈다귀들의 몸에 날 잘라 구운 살점을 파스처럼 붙여준다 불가에 모여 앉은 해골들과 뼈다귀들이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을 먹고 입고 점점 나로 살쪄간다 일곱의, 스물의, 스물입곱의 제각각의 내가 날 쳐다보며 나야 나야 손을 흔든다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들을 다 트림하고 나로 자란 그대들의 방방마다 걸린 액자 속으로 걸어들어가 찰칵찰칵 기념촬영을 한다 내가 날 잘라 구워 먹고 난 달궈진 석쇠 위에는 열세 개의 꽃삽만이 꽃게처럼 익어가고 있다

 

          -김민정 <내가 날 잘라 굽고 있는 밤 풍경> 일부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열림원)

 

 

  악몽과도 같은 이미지들이 펑키적인 상상력에 의해 무제한으로 질주하는 김민정의 시에서도 시적 자아의 인격적 신체적 동일성은 여지없이 분해된다. 분열증적인 수다와 비명으로 가득찬 검은 카니발리즘의 언어들에서 서정시의 율법인 함축과 절제의 미학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사방으로 들끓고 흘러넘친다. 그 범람하는 언어들이 생성하는 것은 경계 없는 악몽의 풍경이다. 그 풍경은 온갖 금기의 언어가 폭발하는 불경스러운 ‘탈승화’의 장면을 연출한다. 이 시에서 1인칭 화자는 자신의 몸을 요리하는 장면을 현재형으로 중계한다. 물론 그 장면은 엽기적이며, 끔찍하다. 그러나 이 무제한의 엽기에는 펑키적인 유머가 묻어 있다. 이런 신체적인 위해와 전시는 동일적인 인격적 주체를 근본적으로 분해한다. 이렇게 자기 신체를 요리해 먹는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내’가 ‘나’를 요리해 먹는 상황에서 ‘나’의 순결한 1인칭 신체와 인격은 근본적으로 무화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가 요리하는 여성 신체의 일부에 대한 불경스러운 전시의 방식이다. ‘배꼽’, ‘음핵’, ‘콧구멍’, ‘젖꼭지’, ‘난소’ 등의 신체 부위들은 일반적인 여성성에 대한 신체적 판타지를 전복해버린다. 시는 좀더 나아가 “해골들과 뼈다귀들이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을 먹고 입고 점점 나로 살쪄간다”라는 장면을 보여준다. ‘내’가 요리한 ‘내 신체’를 먹고 삼인칭 ‘해골’과 ‘뼈다귀’들이 일인칭인 “나로 살쪄간다”. “나로 자른 그대들”이라는 표현에서처럼 1인칭의 육체는 철저하게 분해되어 3인칭과 2인칭에게 공급된다. 그런데 이 분식된 육체들은 ‘나’의 다른 시간을 호출한다. ‘액자 속의 사진들’의 묘사 속에 암시되는 것처럼 이 분식된 ‘나’의 육체들은 타자들의 시선에 의해 인화된 ‘나’의 시간 속의 이미지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시는 타자들의 시선의 지옥 속에서 내던져진 여성 신체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여성 신체를 물신화하는 저 외부의 시선들에 대해, 그 물신화의 극단인 분해된 신체를 선물함으로써 시선의 상징 질서를 붕괴시키는 방식. 1인칭 여성 신체의 분해를 통해 여성적 자아는 3인칭과 2인칭의 시간 속의 육체로 분식되어 퍼져 나가며, 되돌아온다. 이런 방식으로 1인칭의 여성 신체는 자기 육체의 시간 위에 새겨진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탈주한다. 자기 혐오와 검은 유머가 뒤섞인 무제한의 탈승화적인 미학, 혹은 서정시의 바깥으로 넘쳐나는 무의식의 폭발적인 분출.


마네킹은 아무런 대꾸없이 또 다른 모퉁이를 돌아간다. 길가 벤치에서 잠을 자던 노파가 마네킹을 보고 아는 체를 한다. 노파의 아가미에서 비린내가 났다. 군데군데 살점이 뜯긴 축축한 몸을 소나기가 파먹고 있었다. 넝쿨 같은 비가 마네킹을 덮쳤다. 마네킹은 얼굴에 들러붙는 나뭇잎을 뜯어내려고 손을 뻗친다. 이마에서 두 팔이 뻗어 나와 공중에 흩어진다. 마네킹은 연기처럼 찢어지는 두 팔을 보며 서른 번째 모퉁이를 돌아간다. 뼈끝에서 살이 찌는 구두와 장갑이 무거워 횡단보도 앞에 잠시 멈춘다. 문이 닫히기 전에 정육점에 가야 한다. 차도에는 질주하는 바퀴들이 핏물을 튀기고 있다. 마네킹은 목을 꺾어 뒤를 돌아본다. 사람의 앞면을 지닌 마네킹들이 걸음을 재촉한다. 타닥타닥 뼈 부딪는 소리가 바닥을 질질 끌고 모퉁이를 돌아간다.  

                    

                               -이민하 <환상수족> 일부 (「환상수족」 열림원)

 

  이민하의 시에서 1인칭은 아예 존재하지 않고 ‘마네킹’이라는 물화된 삼인칭의 존재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마네킹은 성별조차 암시되어 있지 않다. 이 시에서 마네킹은 마치 살아 있는 인간처럼 거리를 활보한다. 시는 그 거리의 모퉁이들을 활보하는 마네킹의 동선을 따라간다. 거리의 산책자로서의 모더니티의 주체는 이제 마네킹의 몸으로 거리의 모퉁이들을 돌아간다. 그 거리에는 ‘앉은뱅이 소년’과 ‘물고기를 닮은 계집아이’와 ‘아가미에서 비린내가 나는 노파’가 있다. 마네킹은 “쓸모없는 구두와 장갑을 팔러 정육점에 간다”. 그런데 사실 마네킹에게는 ‘구두’와 ‘장갑’ 이 없다. 마네킹은 ‘텅빈 소매’를 하고 있으며, ‘무릎뼈’로 보도블록을 걷는다. 마네킹에게는 손과 발이 이미 없는 것이다. ‘검은 구름’은 마네킹에게 손과 발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네킹은 “뼈끝에서 살이 찌는 구두와 장갑이 무겁”다고 느낀다. 시의 제목처럼 그것은 ‘환상수족’이기 때문이다. 환상수족이란 실체 없는 수족의 존재감을 느끼는 상태를 말하지만, 마네킹은 그 자체로 사물화된 몸이다. 여기서 이 시에서 시적 주체를 지우는 방식은 두 겹의 층위를 갖는다. 마네킹-되기 혹은 마네킹의 인간-되기의 차원이 그 하나라면, 그 마네킹이 보유한 환상수족의 허구적인 존재감의 층위가 있다. 첫번째 층위가 물신화된 주체의 악몽을 그린다면, 두 번째 층위는 주체의 병리적 환상 자체를 보여줌으로써 주체의 신체적 동일성이 실체가 아닌 하나의 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런 세계에서 인간과 사물, 인간과 물고기, 인간과 자연, 식물과 동물은 뒤섞이고 엉키면서 모든 상징적 위계와 경계가 허물어진 묵시록적 풍경을 연출한다. 이 풍경을 지배하는 인간 주체의 시선과 지위는 이미 허물어져 있다. 2005년, 젊은 시인들의 시집 속에서 시적 언술은 시적 자아의 몸 밖으로 뛰쳐나와 검은 세상을 돌아다닌다. 인격도 신체도 갖지 못한 이 시적 유령들에 의해, 한국 시가 이제 자명한 경계들과 결별하고 있다.

 

 

◈ 筆者 : 이광호  문학평론가 |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1)

물론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선배 시인들의 앞선 시적 모험이 있었다. 가령, 자신의 시적 방법론을 끊임없이 갱신해온 오규원의 탈인간적 시점과 ‘날이미지’ 시나, 박상순의 탈내 향적인   인접혼란의 시언어들, 김혜순의 여성적 시쓰기와 그 환유적 모험과 같은 시적   자아를 탈중심화, 탈주체화하는 ‘진보적인’ 사례들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시적    주체의 문제에 관한 한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작업은 그 연장에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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