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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6. 18. 23:03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힘


                                                           나 호 열

 결코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노자도덕경 5장의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만물을 풀 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의 의미가 새로운 것은 인간이 만든 온갖 것들에 대한 회의와 불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선거니, 월드컵이니 하는 사건들, 그리움이니 사랑이니 하며 떠드는 관념들, 지진과 화산 폭발,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의 잣대를 허무하게 만들어 버린다. 인간의 관점에서 세상은 복마전이고, 판도라의 상자이다. 안으로 파고들수록 알 수 없는 세계,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한 생이 끝나고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인 까닭은, 세상이 아름답지 않다는 인식을 넘어서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 희망은 물질의 만족을 향하는 것도 아니고, 경쟁을 넘어서 승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궁핍과 좌절 속에서 분노와 패배감을 배우지 않고 오히려 화해를 배우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몸부림을 멈추지 않는 것이라고 할 때 이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 이유가 타자가 아닌 바로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자각을 지닌 존재들이 떠오르게 된다.
그들은 바로 시인들이다. 시인들은 말을 다루면서 말을 아끼고, 말로써 세상의 강철 같은 껍질을 부숴내려고 한다. 강철에 온몸을 부딪치면서 자신의 영혼 속으로 스며드는 핏방울로 자신을 증언하려고 하는 것이다.
결코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는 강한 부정은 그 속에 강한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아름답기 때문에 세상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天地不仁을 노래하는 아름다움을 시인은 가져야 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관점에서 도종환의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과 박찬일의 『모자나무』는 시인의 삶에 대한 태도와 시는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시의 새로움은 어떻게 빚어지는 것인지를 극명하게 대비되는 관점으로 보여준다,

   새 해 동안 나는 그저 간소하고 단순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특별히 무엇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저 나를 빈 밭처럼 내버려두었습니다. 전처럼 그 밭에 무엇을 심을 것인가 몇 모작을 할 것인가를 궁리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모여 그 밭에서 농사지은 것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토의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사례를 만들어 남에게 자랑할 거리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밭도 그렇게 그냥 있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내 생의 겨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위의 글은 시집 말미에 붙은「산방에서 보내는 편지 」의 일부분이다. 시인이 예상하지 못했던 병마와 그로 인한 세상과의 격리를 통해서 그는 천지불인의 세계를 터득해 나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로서 자신의 삶을 증언하고 있다. 자신을 스스로 교육하는 힘, 유폐와 소외가 커지는 만큼 커지는 속세의 욕망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 또한 아무 일이 아니다.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도종환의 시 「산경」전문
 
 「산경」은 山徑(산길)이며 山景이며 山經이다. 그 무엇으로 읽던 뜻이 통한다. 절절한 체험과 통찰이 아니면 결코 빚어낼 수 없는 경지이다. 기교도 없고, 장식도 없지만 시 속에 함축된 경지는 깊고 너르다.

   박찬일은 도종환과는 달리 ‘시인이 세계에 대한 울분이나 불만 대신 존재 증명에 실패한 자의 전말기를 쓰고 있음을 가리킨다’ 는 정과리의 해석처럼 철저한 일상성과 상식에 갇혀버린 현대인의 좌절에 대한 기록으로서 시를 움직이고 있다.

   물은 물일 뿐이다. 그러나 그릇에 따라 물은 다르게 보인다. 컵에 담긴 물은 마시는 물이 되고, 세면대에 담긴 물은 세수할 물이 된다. 새로운 그릇을 만들어내는 것, 그래서 내용은 같지만 새로운 쓰임새를 만들어내고 (유익함), 새로운 감동 및 새로운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 (즐거움), 그것이 문학이 아닐지, 시가 아닐지, 시인은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는 자가 아닐지

   시집에 붙은 「아포리즘. 기타」51에서 시인이 가지고 있는 문학(시)의 의미는 그의 시편들이 왜 낯설고 불편하며 불쾌한지를 한 마디로 대변해 주는 것이 된다. 그는 한 마디로 관념론자이다. 세상에 실재하는 것은 영혼 - 그것이 존재하는 지 아닌지도 명확하지 않지만-에 불온하게 붙어있는 전단지와 같은 관념일 뿐이다. 그는 대학교수이고, 잡지의 편집자이고, 시를 쓰는 시인이지만, 그는 산본 역과 을지로 삼가 역을 떠도는 유령이다. 도종환의 幽寂과 박찬일의 유적은 지리적 위치는 다르지만 관념상에서는 등가일 수밖에 없다. 유령의 말은, 관념의 말은 이 세상에 유입되는 순간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시로 발언하는 것, 발언할 수밖에 없는 것.

  사형수가 감방에서 사형 집행장 까지 걷는 길을 그린마일이라고 한다. 한계적 상황의 길이다. 그린마일을 걸으며, 한계적 상황을 걸으며, 사형수에게 떠오르는 것은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가장 소중한 장면, 가장 소중한 사람이, 마치 바닷물 속에 억지로 집어넣은 부표가 다시 힘차게 떠오르듯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상황에서 떠오르는 것이 만약 ‘말 (언어)’로 바뀌어진다면 그것은 ‘절규 같은 ’말일 것이다. 접속사, 조사, 부사 등은 생략되는 절규 같은  말일 것이다. 온전한 문장으로서의 말이 아닐 것이다. 명사 위주의 말 일 것이다. 문법도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사전에 없는 말도 나올 것이다.

   ‘아포리즘. 4’는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의 인식과 그 인식을 담는 도구로서의 언어의 쓰임새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절실함’, ‘절규’.... 생의 해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와 있는 生의 해답을 복기하는 것이 詩라는 것이다.

똥을 눗고 싶을 때 눗고
오줌을 눗고 싶을 때 눗고
똥을 계획적으로 눗는 사람? 너?
오줌을 계획적으로 눗는 사람? 너?
나도 그렇다
술을 계획적으로 마시지 않고
욕을 계획적으로 하지 않는다
인간은, 나를 포함하여, 계획적이 아닐 거다
왜 계획적으로 살라 하는가
논리적으로 강요하는가
오줌을 눗고 싶을 때 눈다
똥을 눗고 싶을 때 눈다
사랑하고 싶을 때 사랑한다
세 라 비 C'est la vie
                     박찬일의 시,「땅 하늘 오줌 똥」전문

  시인에게 있어서 체험은 매우 소중한 자산일 것이다. 시의 중요한 축의 하나인 상상력이라는 것도 체험 없이는 생성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체험에 시가 너무 밀착해 있으면 진술에 가깝게 되고 상상력을 너무 확장해 놓으면 공허한 말장난으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그래서 체험이기는 하되, 상식에서 벗어난 관찰과 기발하고 새롭기는 하되 체험에 뿌리를 둔 상상력을 거두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인생의 강을 건너기 위해얕은 여울을 따라당신이 나 몰래 놓아준 징검다리 디디며돌 하나에 깡충 웃음을 딛고돌 하나에 깡충 추억을 딛고돌 하나에 깡충 사랑을 딛고돌 하나에깡충 세월을 딛고 징검다리 깡충깡충 뛰어 건너건너 와서 돌아보니내 젊음이 저쪽 건너편에서 환하게 웃고 서있다

전순선의 시「징검다리」는 발상이 새롭고 ‘깡충깡충’, ‘딛고’, ‘건너건너’ 등의 의태어와 반복 배치를 통해서 리듬감이 잘 살려진 작품이다. 지금은 흔하게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징검다리의 기억은 대부분 가지고 있는 심상일 것이다. 분명히 징검다리를 건넌 체험이 시인에게는 부여되었을 것이다. 굳이 이 시를 분석한다면, 징검다리를 놓아 준 것은 ‘당신’이고, 그 다리는 그 당신이 ‘몰래 놓아 준 것’이고, 그 다리는 ‘인생의 강’을 건너기 위한 것이다.
건너고 보니 저 쪽 건너편에는 젊음이 환하게 웃고 있다. 다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는 절실함이 묻어나지 않는다. 시의 話者의 절실한 회한도 드러나지 않는다. 세월의 무상함은 이미 드러나 있는 해답이다. 해답의 되새김, 복기가 시의 기능이라고도 이미 말했다. 그렇다면 이 시의 경쾌한 리듬감은 감각적 이미지로 반영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내 젊음이/저쪽 건너편에서/환하게 웃고 서 있다’ 라는 진술이 ‘어떻게 감각적 이미지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인가? ’가 시인이 해결해야할 문제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 공    간 : 토끼풀이 흐드러진 강변의 산책로
▶ 등장인물 : 여자1. 44세 천천히 걷기운동을 하는 여자
              여자2. 풀밭에 앉아있는 대략 50대 초반의 여자                  

여자1 : 네잎 클로버가 그렇게 많아요?
여자2 : 그럼요, 한 번 쓰윽 훑으면 네 잎은 눈에 확 들어오는 걸요.
여자1 : 그래요? 
        세 잎 세 잎 세 잎 세 잎… 
        어 네 잎!
        세 잎 세 잎 세 잎 세 잎…
        또 네 잎! 어 어 자꾸 네 잎
        어라? 이번엔 다섯 잎!
(삼십 분 만에 스물 여개의 행운을 잡은 여자1)
여자1 : 참 행운이 흔한 세상인가 봐요. 이렇게 흔한 행운은 의심부터 들지 않아요?
여자2 : …
여자1 : 이 토끼풀밭은 마구잡이 세일을 하는 마트나 백화점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이 중에서 진품은 역시 세 잎 클로버 같아 보여요
        봐요 모양이며 색깔이며 클로버다운 단정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토끼풀을
        네 이파리는 사람으로 치면 분명 변종일 거예요 그렇죠?
여자2 : 맞아요. 토종보다 변종이 더 흔한 세상이잖아요
여자1 : 변종이라도 싸고 흥미로우면 누구에게라도 인기가 많은 걸 어쩌겠어요.
(여자1. 2는 변종 행운이라도 상관없다는 듯 웃으며 헤어진다.)

문숙자의 「행운찾기」는 시의 형식상의 새로움을 추구해 보려는 의지로 보여진다. 새로움이란 형식과 내용의 측면에서 다같이 궁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는 바람직하지만, 굳이 희곡의 형식을 차용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질문 앞에서는 마땅한 대답을 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네 잎 클로버가 흔하게 찾아지는 토끼풀밭에서의 삶에 대한 인식은 전통적인 시의 형식을 통해서 오히려 더 밀도있게 그려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겨주는 것이다. 양애경은 「관계의 해체」라는 글에서 지난 우리 시의 역사를 되짚으면서 시의 새로움이란 문제를 놓고 볼 때 형식상의 새로움보다는 시의 내용에 있어서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양상이 설득력을 갖는다고 말한 바 있음을 되새겨 보고 싶은 것이다.
시의 새로움을 찾는다는 것은 도종환과 박찬일의 시를 일별하면서 느낀 것과 같이 주어진 체험과 상식을 뒤집어 보는 것이다. 뒤집어 본다는 것이 발견이라고 해도 좋고 깨달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징검다리’를 체험하지 않은, 이를테면 도시의 아이들과 같이 구체적 체험을 동반하지 않는 경우에도 우리는 ‘징검다리’라는 기표를 통해서 얼마든지 상상력을 작동할 수 있다. 체험을 뒤집어 놓음이 절실할 때 상상력은 그만큼 강력해지고 상상력이 강력해지는 만큼 우리는 비유의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태양으로 섬기고 살던 사람이 조금씩 뜨거운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을 나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렇다고 차가운 달로 변하는 것도 아니란 것을 여전히 알아채지 못하고 지내왔던 건 아닌지 태양 같던 그 사람의 눈 그늘이 점점 짙어지고 가슴 속 수심이 깊어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모르는 척 했었던 건 아닌지 봄비치고는 유난스레 많이도 쏟아지던 날 한 밤중 어둠 속에서 무슨 기척인가 있어 눈을 뜨고 보니 분명 내 집 방안에서 자고 있었다고 기억하는데 이상하다 …… 잠결에 헛것을 보았을까 별이 보인다 그 별빛이 둥둥 떠다닌다아, 여태껏 태양으로 알고 있던 그 사람이 내 머리 위에서 별빛을 띄우고 서 있었다초저녁부터 몹시 고단해하던 저 사람은 밤 깊도록 왜 잠들지 못하고 이 좁은 방에서 서성이는지를, 며칠 전까지 끊었다던 담배를 다시 피워 물고 유성처럼 떠다니는 그 이유를 나는 알면서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모른 채 돌아누웠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혹시라도 저 슬프도록 외로워 보이는 별빛이 속 절 없이 흐르는 눈물 속에 흘러 갈 것 같아서 내가 태양이라 믿었던 그 사람은 이제 없다 그 사람은 한밤중 방안에서만 떠오르는 차가운 별이 되었다
                    한옥순의 시 「밤이면 별이 되는 사람이 있다」전문

위의 시는 여성의 시대에 힘을 잃어가는 가장의 외로움을 그린 작품이다. 여성들보다 남성들이 이 시를 읽는다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그렁거리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체험의 뿌리를 가지지 못한 젊은 시 들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땀냄새 나는 현실의 체험 속에 젖어 있으면서도 삶의 아름다움과 즐거움과 슬픔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시를 읽는 기쁨이고 위안이 아니겠는가? 물론 이 시에도 적지 않은 아쉬움이 따라오고 있다. ‘봄비치고는 유난스레 많이도 쏟아지던 날’ ‘ 초저녁부터 몹시 고단해하던’ 등과 같은 상황 설명은 시의 긴장감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그런 경우는 앞서 언급했던 시 「징검다리」에서인생의 강을/ 건너기 위해/얕은 여울을 따라/당신이 나 몰래 놓아준/ 징검다리 디디며 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우리는 쉽게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 이유를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아름답지 않은 세상이 바로 ‘나’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깨닫는 존재이다. 그 깨달음은 여러 방향으로 길을 낼 수가 있다. 아름답지 않은 자신을 깨달을 때 그런 자신을 증언하는 방편으로 시가 쓰여질 때 비로소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솟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