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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 대한 성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7. 19. 00:25

언어에 대한 성찰
                                                               나 호 열


텔레비전 연속극은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생활의 한 단면을 드러내주기도 하고 또 삶의 꿈을 불러 일으켜 주기도 한다. 어째든 분명한 것은 그 수많은 연속극들이 한결같이'남녀의 사랑'을 극 전개의 필수요소로 채택하고 있으며. 그 결말은 대개가 기쁘고 행복하게 마무리 된다는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뻔한 주제를 가지고도 수 십 년 동안 시청자들을 울고 웃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사랑'에 얽힌 주제는 대동소이해도 등장인물의 배경과 사건이 색다르다는 데에 있다. 우리의 삶은 비슷해 보여도 다른 점이 너무 많고, 너무 다른 것 같아도 비슷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글을 쓰는 것도 연속극의 속성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른 듯해도 비슷한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 우리의 글감은 무수히 존재한다. 어찌 보면 최근의 문학이론처럼 우리가 쓰는 일체의 글은 어딘가에서 무의식적으로 베끼거나 모방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것이 패스티쉬의 기법이던 키취이던 간에 이전에 우리가 읽고 보았던 어떤 텍스트의 인상이 마치 새로운 오늘의 창작물로 둔갑되는 듯한 인상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수많은 시인들이나 작가는 끊임없는 懷疑 속에 빠진다. '정말 이 글이 이 세상에서 최초의 나만의 글인가?' 그리고는 그러한 회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새로운 문장과, 기법과 새로운 이미지의 탐험에 기꺼이 나서기로 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탐험의 중심은 '언어'이다. 시인이나 작가들에게 '언어'는 표현의 도구이면서 자신이 도달해야할 최종 목표이기도 하다.

시각적인 예술은 이미지를 던져주기 때문에 그것이 사유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그것으로 사유할 수는 없다. 언어 없이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접했을 때, 그로 인해 어떤 이미지나 느낌, 생각의 편린들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언어로 구체화되기 전에는 다만 무정형의 덩어리로 머릿속에 들어 있을 뿐이다. 시각적인 예술도 그 밑바탕에는 언어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2005년 3월 12일자 조선일보에 게제된 채호기 시인이 발표한 글의 일부분이다. 이 글은 영상매체의 발달과 생활화가 자칫 사유의 깊이를 저해하며 사유의 근본이 '언어'에 있음을 주장하는 것을 논지로 하고 있다. 새로울 것도 없고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조금 더 읽어 내려가다 보면 우리가 숙고해야할 문제가 제기된다.

언어는 사용하면 할수록 세련되고, 민감해지고 까다로워진다. 거꾸로 촌스러워지거나, 둔감해지거나 느슨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물며 늘 새로운 언어를 찾는 문학언어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빠르고 심하다. 뿐만 아니다. 언어는 사유의 깊이나 정황의 복잡성에 따라 그 표현도 까다롭고 어렵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한 때 쉽고 잘 읽히는 작품들이 선호된다는 이유로 그것을 지향하는 문학적 경향들이 있었다. ..중략... 문학 언어의 추세나 점점 복잡해지는 세계상황을 볼 때 '쉽고 잘 읽히는 작품'을 선호하는 것은 거꾸로 가는 길이다. ...중략... 과감하게 문체를 실험하고 새로운 언어를 개척하는 젊은 문인들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있더라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쓴 것은 뱉고 단 것을 삼키는 행동은 학습효과가 아니라 본능이다. '쉽고 잘 읽히기'를 지향하는 것은 독자들의 본능적인 욕구이지만, 창작자가 그런 요람의 유혹에 빠져서는 작가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작가로서의 부끄러움은 '박학다식의 결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자신만의 應戰의 사유를 정형화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이다. 삶의 고통은 불전이나 성경 읽기와 이해, 각종의 종교활동을 통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는 삶의 고통과 아픔에 더해서 그 속에 숨어있을 '아름다움'을 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언어 이론은 개념 단위의 언어가 애매한 관념의 덩어리임을 주장한다. 언어에 의한 개념은 무한히 분화되는 관념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에 의해서 시각적 이미지를 불가피하게 파생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눈으로 보여지는 시각적 감각보다 언어로부터 자극되어지는 관념 또는 이미지에 더욱 집중해야할 필요가 있다.

 언어에 대한 자각은 몇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로는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회화에 사용되는 언어들과 문학에서 사용되는 언어들이 다르다고 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런 근거 없이 문학 작품에 일상적인 언어가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작품의 현실성과 극적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 사투리나 비속어, 유행어가 한정적으로 차용될 수 있지만 그런 자각의 의도가 없이 무차별하게 사용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둘째로 비유의 참신성을 위한 노력이다. 많은 부분에서 직유는 그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고 은유의 기법도 환유의 기법에 그 영역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쉽지 않은 작품들은 복잡한 은유의 중복적 구조와 언어의 유추가 확대되고 깊어졌다는 데에 그 어려움이 있다. 일부러 독자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 전문적인 평론가들을 향해서 글을 쓰는 작가는 없다. 작가들은 쉽게 왔다가 쉽게 바람처럼 떠나는 독자들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세계에 다가오는 깊은 사유를 지닌 독자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환타지 소설이 오늘날 크게 유행하고 있는데 그런 소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상상력이 없다면 어떻게 진행될 수 있겠습니까. 시는 사실과 허구의 접점에 서 있는 것이며, 체험과 상상력이 절묘하게 버무려진 밀가루 반죽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밀가루 반죽으로 빵을 만들거나 국수를 만들거나 자장면을 만들거나 그것은 만드는(글을 쓰는) 사람의 자유이겠지요. 제 결론은 체험과 상상력이 모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시에 따라 체험이 우세하면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이 될 것이고 상상력이 우세하면 모더니즘이나 상징주의 계열의 작품이 될 것입니다.
       
이승하의 주장처럼 체험에서 상상력으로 가는 길목에서 확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언어이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대단한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언어의 관습적 사용에서 탈피하고 자유를 얻는 것은, 즉 자신만의 문체를 가진다는 것은 대단히 매력적이고 행복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