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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시에 관한 몇 가지 오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2. 28. 11:49

시에 관한 몇 가지 오해

                                                                                   

1. 시가 어렵다

  시는 어렵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자리에 함께 자리한 시인들과 청중 앞에서
"특강"이라는 타이틀은 내게는 버겁다. 특강이라는 단어 속에 묻어 나오는 딱딱한 교훈과 계몽성 그리고 『詩經』이 던져주는 엄숙한 이데올로기, 거기다가 현대시의 접점이라는 오리무중은 나를 휘발시킨다. 기실 나는 지금까지 詩를 만난 적이 없거니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화자와 청자의 구분마저 나를 위태롭게 한다. 누가 화자이고 누가 청자인가? 누가 시를 쓰고 누가 시를 읽는가? 이런 질문들이 부메랑처럼 내게로 돌아온다. 이미 정형시의 울타리 넘어 자유시의 경계를 넘어선 이상 시의 이데아는 점점 더 확고한 시의 정의로부터 멀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시가 어렵다는 것은 이렇게 시의 定型이 와해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시들만 하더라도 그 기법이나 담고 있는 메시지는 다양한 층위를 형성하면서 저마다의 독특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평생의 업으로 『시경』의 속살을 헤집어 보리라 다짐했었다. 詩經은 무엇인가? 공자가 시경을 刪定했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經의 경지를 詩로 풀었다는 것일까? 아니면 詩와 經이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아우른다는 것일까? 노래의 풍부한 정취와 비유를 따라갈 수도 없다고 생각할 때 意味의 그물에 빠져버리고, 의미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보면 차가운 이성이 감성을 몰아세우고 있는 광란을 목격한다. 요는 詩 三百에 인간의 아이덴티티가 고스란히 남겨져 있으며 그 아이덴티티가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과연 현대라는 접점과 행복하게 마주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무대에 혼자 올라 연기를 하는 배우를 생각한다, 대본을 암기하고 미리 계획된 動線을 따라 움직이며 주인공에 몰입한다. 가공의 주인공과 현실의 나를 합치시키기 위해서, 리얼리티의 구현을 위해서 땀을 흘린다. 그러나 어쩌랴! 객석에는 한 명의 관객도 보이지 않는다. 관객이 없는 배우, 텍스트 속의 주인공과 현실의 나 사이에서 방황하는 에로스같은 존재, 그 어느 것을 시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점이 궁금하다. 시의 이데아는 내게는 너무 멀리 있는 꿈이다. 그래서 나는 시 비슷한, 시에 근접한 시 아닌 시의 무정란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2. 繪事後素 또는 니힐nihil

 

繪事後素는 論語 八佾篇에 나오는 구절이다. 신주와 고주의 해석이 분분함은 익히 아는 바이다. 文質彬彬 (바탕이 순연하고 예의를 갖춤), 質勝文(바탕이 순연한데, 예의를 갖추지 못함, 文勝質(겉으로 예의는 차리는데 바탕이 순연하지 못함), 文質共薄(예의도 못차리고 바탕도 순연하지 못함)의 논의는 시(?)를 쓰는 사람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고 생각한다. 시를 쓰는 입장에서 시인 모두가 文質彬彬의 고봉을 노래하지만 그렇지 못한 불행한 경우도 쉽게 목도할 수 있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회사후소는 인간의 본질과 겉(예의)에 관한 이야기이다. 겉과 속이 다르다면 그것이 참된 인간이 아니라는 뜻에서 사람이 "아름다운 자질이 있은 뒤에야 文飾을 가할 수 있음과 같은 것이다" 라는 해석이 가능하고, 그림을 그릴 때 흰 물감이 제일 뒤에 온다는 해석은 그림을 그리는 데 먼저 색색의 물감으로 모든 형체를 구현하고 제일 나중에 흰 물감으로 그 형체를 명료하게 드러내어 광채나게 하는 것, 즉 인간의 禮라는 것은 온갖 갖가지 삶의 경험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 최종적으로 그 인격의 완성을 마감한다는 뜻으로도 새겨볼 수 있겠다.

작가나 화가의 순연한 예술혼이 그대로 작문기법이나 회화기법으로 투영되어 드러나는 것 이 가장 좋은데, 만약 둘 중 선후 가치를 잡아야 한다면, 기법 위주 작품보다는 순연한 예술 혼이 우선 먼저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자.

무릇 시에는 별도의 재주가 있으니, 책과는 관계하지 않는다. 시에는 별도의 旨趣가 있어 이치와는 관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고 이치를 많이 궁구하지 않으면 지극한 경지에는 도달할 수 없으니, 이른바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말의 통발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윗길이 된다. 시라는 것은 性情을 읊조리는 것이다. 盛唐의 여러 시인들은 오직 興趣에 주안을 두어, 영양이 뿔을 거는 것 같아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그 묘한 곳은 투철하고 영롱하여 꼬집어 말할 수 없으니, 마치 공중의 소리와 형상 속의 빛깔, 물 속의 달,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말은 다함이 있어도 뜻은 다함이 없다.言有盡而意無窮

 

나는 허무주의자이다. 자라난 환경이 그러하였기 때문인지 생성보다는 소멸의 아름다움에 더 많이 도취되어 있다. 나에게 시를 쓸 만한 천부적 재질이 있다고 믿어본 적도 없으니 현실에 대한 정서적 반응만으로 시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궁핍으로 인한 좌절을 도전과 반항 으로 일어서는 대신 도피의 놀이로서 퇴행적 글쓰기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서의 繪事後素는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며, 야만으로 함몰되어 가는 순수를 지키는 행위에 다름이 아니다. 글을 씀으로써 나 자신을 위무하고 격려하는 행 위 이상의 목적을 찾아본 적이 없으므로 급격한 사회의 변동과 현상에 대한 반응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삶이라는 올가미는 결코 유쾌한 장치가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나 장치는 나에게는 無로 가는 逆境처럼 보인다. 절망이 없는 희망, 고통이 없는 열락, 슬
픔이 없는 기쁨은 공허하다. 시민이 지향하는 부르조아에의 환상, 자연을 핍박하는 인간의 파괴본능도 나에게는 헛된 것으로 보인다. 나에게는 그 헛된 풍경들이, 10대부터 50대에 이르는 수 만장의 풍경들이 퇴적되어 썩어가기도 하고 아직도 살아남아 날개를 달고 내 영혼의 꼭대기에서 푸드득거리기도 한다. 현실적인 괴로움이나 좌절, 그리고 궁핍 속을 헤매일 때 그 풍경 하나가 철창을 뚫고 창공을 향하여 날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 發憤은 오래 기다려야할 미덕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으로.....


3.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그리하여 나는 현실에서 벗어나서 추위를 견디고 난 후의 송백의 의연함을 간구하고 있는 지 모른다. 글이 사람을 닮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자신의 글을 닮아가는 것인지 아직 나는 모른다. 그러나 좌절과 궁핍함이 간절한 憤을 일으키고 窮의 의미를 간절하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겠다. 詩窮而後工- 궁해진 뒤에 시가 좋아진다- 와 詩能窮人-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한다는 언명은 窮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대의에 다름이 없음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다. 입신양명의 차원에서의 궁 즉,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궁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경제적인 궁핍은 인간관계를 소원하게 하고 스스로 고독의 함정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누구나 한번은 절대고독, 죽음의 거대한 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절대(자) 앞에 선 자아가 당당해지기 위한 의식으로서 궁은 洗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궁해진 뒤에 시가 좋아진다는 명제는 그 궁이 현실적 어려움을 뛰어넘으려는 의지, 비움을 향해 가는 행보, 또는 정화를 기원하는 진해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한다는 것은 바로 시의 지향점이 궁의 경지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이 구절에서 시의 이데아를 몽환처럼, 신기루처럼 느끼곤 한다.


무릇 물건은 그 平을 얻지 못하면 운다. 초목이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흔들면 운다. 물이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이를 움직이면 운다. 그 솟구치는 것은 혹 부딪치기 때문이요, 그 달리는 것은 혹 막기 때문이며, 그 끓는 것은 혹 불에 데우는 까닭이다. 금석이 소리가 없으나 혹 이를 치면 소리가 난다. 사람의 말도 또한 그러하다, 그만 둘 수 없음이 있은 뒤에야 말하는 것이니 그 노래함이 생각이 있고 그 울음은 풀음이 있다. 무릇 입에서 나와 소리가 되는 것이 그 모두 불평함이 있기 때문인가?

군자의 배움은 혹은 일에 베풀어지고 혹은 문장으로 나타나니 항상 아우르기 어려움을 근심한다,대개 때를 만난 선비는 功烈을 조정에 드러내어 명예가 竹帛에 빛나는 까닭에 그 항상 문장을 보기를 말사로 하며 또 하기에 겨를하지 못하거나 능하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뜻을 잃은 사람에 이르러서는 궁벽한 곳에 숨어 마음을 괴롭게 하고 생각을 위태롭게 하여 정밀한 생각에 지극하며감격하여 분을 펴는 바가 있으므로 더불어 오직 세상에 펼 데가 없는 것을 모두 한결같이 文辭에 맡기는 까닭에 궁한 사람의 말이 공교하기 쉽다고 한다.


4. 시는 효용이 있는가?

 

이 글을 쓰면서, 이 글을 발표할 때를 생각하면서 나는 내 앞에 포진하고 있는(을) 聽者들을 떠올려 본다. 창 없는 모나드로서 존재하고 있는 대중 앞에 선다는 것이 나는 두렵다. 글을 쓴다는 것은 늘 이렇게 알 수 없는 공포와 마주하는 것이기에 때로는 몸서리치면서 이 일을 그만 두어야겠다고 굳게 결심한다. 發話는 의사소통을 넘어서 啓蒙을 암시한다. 나를 발현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임과 동시에 독자, 또는 청자들의 의식 속에 나와 내 작품을 각인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마다 나는 다시 존재의 불안에 휩싸이고 깊은 침묵의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계몽과 현시가 他者를 돌고 돌 아서 나에게로 귀환하는 것임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의 글쓰기는 사유형식의 기능을 다른 도구에 대폭적으로 이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영상과 음향, 인터넷을 통한 의사소통의 쌍방향성은 시나 소설을 비롯한 문학 장르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따라서 인터넷 시대에서의 문학의 몰락은 이미 선고를 받은 바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많은 시인들은 프로슈머의 난관을 헤치고 오늘도 시를 쓰고 낭송을 한다. 과거에도 시는 만인의 공유물이 아니었다. 문자를 알고 경전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시를 읽고 시를 지었다. 근대의 광명이 시의 대중화를 이루고 시의 별이 만인의 머리 위에 반짝거렸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본질과 그 존재의 아름다움을 잊어버리지 않는 한, 의사소통의 방식으로 언어를 버리지 않는 한 문학은 여전히 유효한 표현방식으로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통을 반성하면서 살아 왔다. 수많은 과오와 번민을 겪으면서 용케도 견뎌왔다. 그 반성과 견딤의 저 편에는 나를 각성하게 하는 힘으로 시가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실내에서, 불빛조차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거울 앞에 선 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歲寒 후의 松柏이 회사후소의 문질빈빈을 드러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는 아직 더 기다려야 하고, 나는 아직 더 간절해야하고 나는 아직 더 꿈을 꾸어야 한다.
시는 아직 현현하지 않았다.


 
       북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