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문화마을 소식들

제31회 방일영국악상 이영희 가야금 명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1. 1. 14:19

승무에 홀려 국악길… 제자 위한 집 기부 안 아깝네

제31회 방일영국악상 이영희 가야금 명인

 

입력 2024.11.01. 00:35업데이트 2024.11.01. 11:05
 
 
 

“여가 원래 안동 권씨 종갓집이 있던, ‘궁안리’로 불린 명당 자리여. 예인들이 소리 펼치기에 딱이제?”

환희 웃는 이영희 가야금 명인(86)의 뒤편으로 탐스럽게 영근 배추밭이 줄지어 보였다. 이곳, 경기도 성남시 금토동 청계산 아래 자락에 있는 이 명인의 집과 너른 텃밭은 2022년부터 국가에 귀속됐다. 그는 200억원 상당에 이르는 이 일대 땅 1656평(5474㎡)을 전통 무용과 국악 예능 보유자들의 전승교육관을 짓는 데 써달라며 문화재청(국가유산청)에 기부했다. 2027년 지하 2층, 지상 4층 규모의 예능전수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경기도 성남시 금토동 자택에서 최근 만난 이영희 가야금 명인. 명인은 "고향 군산에서 추석날마다 풍장꾼 뒤를 쫓으며 전통 소리를 흉내 내던 것이 이토록 오랜 국악길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올해 31회 방일영국악상 수상자인 이 명인은 국악인들이 ‘우리 소리에 평생을 헌신한 큰 스승’을 말할 때 자주 첫손에 꼽힌다. 땅을 기부하기 이전부터 사재를 헐어 국악 제자 양성에 힘써 온 것으로 유명하다. 2018년부터 가야금 산조 전공 대학생에게 등록금을 주었고, 성남시 인근 지역 초·중학교 가야금 강사료를 지원했다. 2000년부터 12년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내며 초·중교 국악 전공자 파견, 해외 입양인 국악 교육 등 정책 수립에도 힘썼다. 50여 명에 달하는 이수자와 전수자들 외에도 김영재(무형유산 거문고 산조 보유자), 이종대(피리 명인, 부산대 명예교수), 김덕수(타악,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등 유명 국악인들이 이 명인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 명인은 “애초에 살던 반포 아파트를 팔고 현재의 집으로 이주한 것도 1990년대 말 더 한적한 곳에 예인들 교육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운 좋게도 해당 부지가 판교 제2테크노밸리 개발지로 수용됐고, 토지보상비로 추가 구입한 인근 땅도 4배가량 값이 치솟았다. “평생을 미혼으로 살며 휴지 한 장 허투루 안 쓰고, 자가용 대신 버스 타고, 난방 대신 전기장판으로 버티며 모은 재산”이었지만 “쓸 곳에 썼으니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했다.

그는 “내가 나고 자란 남도의 옛 풍경처럼 곳곳에 국악 소리가 일상인 환경이 잘만 유지됐다면 이런 고생을 부러 하진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1938년 전북 군산 번화가 신발가게 5남매 막내딸로 태어났다. “무역항인 동네 특성상 잔칫날마다 자주 보이던 한국 무용 승무 자락과 풍장꾼(풍물패) 소리에 홀려 국악에 빠졌다”고 했다. 군산여중 동급생들과 고향의 명기 김향초에게 승무·살풀이를 배우며 무용에 먼저 입문했고, 군산 풍류객 이덕열에게 가야금과 단소·양금을 배웠고, 이운조 명인에겐 가야금 산조를 익혔다.

 

국악 전승과 보급 교육에 힘을 쏟는 까닭은 자신이 국악과가 아닌 일반 대학을 거치고서 고생 끝에 평생의 가야금 스승을 모실 수 있던 경험 때문이다. 국악과를 찾기 어렵던 시대 탓에 1958년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먼저 진학했고, 물어물어 수소문 끝에 국립국악원 사범이던 김윤덕(1918~1978) 명인을 직접 찾아가서 가야금산조와 거문고를 사사했다. 대학 4학년이던 1961년 전국신인방송국국악경연대회에서 아쟁으로 기악부 1등(공보부장관상)을 차지할 만큼 다재다능한 연주 실력을 뽐낸 그는 1991년 스승의 뒤를 이어 무형유산 가야금 산조와 병창 보유자가 됐다.

국가유산청은 향후 이 명인의 집이 헐린 뒤 전수관이 들어서면 사무실 한쪽에 그를 위한 거처 공간을 마련할 방침이다. 명인은 “이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며 다재다능한 국악 예능인을 마지막까지 최대한 남기고 가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1962년부터 1980년까지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에 교사로 재직한 시절엔 김윤덕·성금연(가야금)·한영숙(무용)·지영희(해금)·박귀희(판소리) 같은 명인·명창 50여 명이 함께 근무했다. 이 명인은 “1세대 국악인들이 후세대에 비해 소리나 무용 여러 분야에 능한 것도 이 걸출한 명인·명창들이 학생 한 명에게 동시에 예능을 전승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현재는 그런 교육 체계가 사라지고, 2000년대 이후 국악과 폐지 대학도 늘어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이번 방일영국악상 수상이 참 감사하지만, 상을 탔다고 해서 해오던 일에 변화를 주진 않을 것”이라며 “계속 하던 걸 잘하란 뜻으로 알고 국악 예능 전파에 정진하겠다”고 했다.

☞이영희 명인

1991년 국가무형유산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로 지정됐다. 그가 전승 중인 ‘김윤덕류 가야금산조’는 예술성이 뛰어나고 고난도 기술을 요하는 복잡한 리듬, 깊고 남성적인 농현(줄을 떨어 내는 꾸밈음)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