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충무로 시대 끝" 66년 역사 '벤허 극장' 문 닫는다
중앙일보
입력 2024.09.18 17:23
업데이트 2024.09.1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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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의 1960년대 모습. 초유 흥행을 거둔 할리우드 대작 '벤허' 간판이 걸려 있다. 사진 대한극장
서울 충무로 흥행사를 상징했던 간판 영화관 대한극장이 66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
국내 최초 70㎜ 초대형 스크린 시대를 열었던 대한극장은 1962년 할리우드 대작 ‘벤허’의 전차 액션을 보려는 관객들이 전국에서 몰려와 ‘벤허 극장’이란 애칭도 얻었다.
대한극장의 운영사 세기상사는 올 4월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을 통해 9월 30일 극장 영업 종료를 예고했지만, 극장은 지난달 말까지 ‘아듀 대한극장 1958~2024’ 타이틀로 고전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벤허' 상영 이벤트를 진행한 뒤 영화 상영을 중단했다. 이달 8일까지 스포츠 브랜드 전시 행사를 끝으로 문을 닫고 내부 공사에 착수했다.
한국 영화 역사와 함께해온 '대한극장'이 1958년 국내 최대 극장으로 개관한 지 66년 만에 폐업한다. 대한극장을 운영하는 세기상사는 올초 전자 공시를 통해 극장사업부(대한극장) 영업을 오는 9월 30일 종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진은 5월 2일 서울 중구 충무로 대한극장 모습. 뉴스1
마지막까지 버텼던 대한극장 폐관과 함께 1950년대부터 영화 제작사와 극장이 몰려들며 한국 영화 메카로 통했던 충무로 시대도 역사의 뒤안길로 저물게 됐다. 대한극장 건물은 공연장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영국 런던, 미국 뉴욕에서 관객 몰이한 논버벌 이머시브(관객 참여형) 공연 ‘슬립 노 모어’를 내년에 선보이는 걸 목표로 현재 내부 개조 공사를 진행 중이다. 세기상사는 앞서 대한극장 폐관 사유로 '영화 상영 사업의 패러다임 변화로 인한 지속적 적자 해소'와 '사업 체질 및 손익 구조개선'을 들었다.
1960년대 최첨단 극장…2001년 멀티플렉스 탈바꿈
2007년 대한극장 건물 외벽에 신작 영화 포스터가 걸려있다. 대한극장은 2001년 12월 11개 상영관 규모의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재탄생했다. 사진 대한극장
1958년 4월 단관극장으로 개관한 대한극장은 멀티플렉스 도래에 발맞춰 2001년 12월 멀티플렉스로 새단장했지만, 대기업 극장 체인 중심의 산업 재편, 코로나 팬데믹 시기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급부상에 밀려 사양길을 걷게 됐다.
1907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 상설 영화관 단성사(2008년 폐관), 2015년 CJ CGV에 운영권을 넘긴 피카디리 극장, 2021년 폐관한 서울극장에 이어 단관시절 극장으론 서울 시내 유일하게 남아있던 대한극장마저 문을 닫게 된 것이다.
1958년 미국 영화사 20세기 폭스의 설계에 따라 건축된 대한극장은 최첨단 설비로 극장 문화의 획기적 전환기를 이끌었다. 빛의 방해를 받지 않게 지어진 국내 1호의 창문 없는 영화관이었다. 초대형 스크린에 더해 국제 규격에 맞춘 당대 최다 1900여석 매머드 객석, 웅장한 입체 음향 등을 갖췄다. 1963~1987년 경쟁사 단성사에서 근무한 이용희 전 상무는 한국영상자료원 구술채록에서 당시 서울 시내 가장 시설이 좋았던 극장으로 대한극장을 꼽았다.
'벤허' 전국서 보러와…'킬링필드' 최다 92만 관객
1969년 대한극장 매표소에 개봉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포스터 및 상영시간표가 붙어있다. [중앙포토]
한 편의 신작 영화를 영화관 한 곳에서만 개봉했던 1990년까지, 대한극장은 할리우드 대작 개봉의 대명사였다. 창립작은 캐리 그랜트, 데보라 카 주연의 ‘잊지 못할 사랑’(1957)이다. 서울 인구 250만명 중 70만이 관람한 ‘벤허’부터 ‘사운드 오브 뮤직’(1969년 개봉), ‘아라비아의 로렌스’(1970년 개봉), ‘마지막 황제’(1988년 개봉)까지 매진 신화를 이어갔다.
1990년 홍콩영화 '마루타'가 대한극장에서 개봉한 당시 영화를 보려는 인파가 극장 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중앙포토
1967년 영화관람료 500원 시대를 연 대작 ‘클레오파트라’(1963)도 대한극장 개봉작이다. 한 편의 영화를 여러 극장에서 동시 개봉하는 방식이 1991년 도입되기 전까지 국내 최다 관객 동원작도 대한극장에서 탄생했다. 1985년 롤랑 조페 감독의 전쟁영화 ‘킬링필드’를 개봉해 112일 간 92만 관객을 모았다. ‘앞서가는 극장’이란 운영철학을 걸고 ‘로보캅’·'빽 투 더 퓨처'(1987년 개봉), ‘구니스’(1986년 개봉) 등 화제작을 선보였다.
1980년대 전국 극장 흥행 1위…'올드보이' 최초 시사
한국영화 중에선 1958년 꼬마스타 안성기 출연작 ‘눈물’을 비롯해, 1967년 우리나라 최초 만화영화 ‘홍길동’, 1968년 신성일‧홍세미 주연 ‘춘향’ 등이 대한극장 히트작이다. 10억원대의 제작비를 들인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도 1990년 대한극장에서 3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대한극장은 1984년부터 5년 연속 관객 동원 1위를 차지했다.
2014년 1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 대한극장에서 아동·청소년 160여 명과 함께 3D(3차원) 안경을 쓰고 애니메이션 '넛잡'을 관람했다. 이날은 박 대통령이 지정한 첫 번째 '문화가 있는 날'이었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대한극장은 2000년 1년 간 휴관하고 250억원을 투입해 7층, 11개관 규모의 멀티플렉스로 재탄생했다. ‘올드보이’(2003) ‘늑대의 유혹’(2004) ‘주먹이 운다’(2004) 등 기대작을 최초 공개하는 시사회도 열었다. 2018년 개관 60주년 기념 ‘루프탑 상영회’를 열며 건재함을 알렸지만, 2년 만에 코로나19 팬데믹 된서리를 맞았다. 오후 1시 조조할인, 반값 관람료 등 할인 정책을 폈지만, 운영난을 극복하지 못했다.
"충무로 시대 끝났다, 서울 단관극장 사라졌다"
1994년 양귀자 소설 원작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간판이 대한극장에 걸린 모습이다. 주연 최진실, 임성민, 유오성 등의 장면이 그려져 있다. 중앙포토
18일, 대한극장 홈페이지의 상영작 소개란은 공백인 상태다. 시민들은 “9월 말 영업종료라고 해서 예매하려고 보니 아무것도 안 나온다” “청춘의 기억이 있던 곳인데 안타깝다” 등 아쉬움을 토로했다. 영화 ‘신과함께’ 시리즈 제작자인 원동연 리얼라이즈 픽쳐스 대표는 SNS에 “집에서 5분 거리였던 대한극장은 영화의 꿈을 키운 곳”이라고 적었다. 강성률 영화평론가는 “충무로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 서울의 단관극장도 모두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전국적으로 단관시절 극장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가운데, 영화관을 문화 유산으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130년 된 최고령의 인천 애관극장, 광주 광주극장 등도 운영난을 겪은 지 오래다. 1963년 개관한 원주 아카데미극장은 2022년 초 원주시가 보존을 전제로 극장을 공공 매입했지만, 같은 해 7월 시장이 교체되며 철거를 강행해 사라졌다. 한국영상자료원이 2022년 ‘한국영화 현장 기록 사업’을 시작하며 영화관의 문화적 가치를 되짚고 있지만, 실질적인 보존 대책은 없는 실정이다. 영국‧독일 등 유럽에서 유서 깊은 영화관을 정부‧대기업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2000년 영화 '징기스칸' 상영을 끝으로 단관극장 시절 건물 철거를 결정한 대한극장 모습이다. 24년만에 또다시 대대인 변화에 돌입하게 됐다. 중앙포토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8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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