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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백 년 긴 세월을 씨앗에 품고 살아남은 고려시대의 붉은 연꽃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8. 13. 12:57

[나무편지] 칠백 년 긴 세월을 씨앗에 품고 살아남은 고려시대의 붉은 연꽃

  ★ 1,245번째 《나무편지》 ★

   아직도 한낮의 햇볕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뜨겁습니다. 아! 이렇게 써놓고 보니, 한낮이 아니면 좀 견딜 만하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그렇지 않은가요? 입추 지나면서 아침과 밤에는 좀 나아진 듯합니다. 입추 지났다는 마음의 안도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기상 정보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달 들어서 제가 사는 곳 기준으로 8월1일 최저기온이 27.3도였고, 2일은 28.2도, 3일은 27.2도였습니다. 10일까지 6일과 9일만 25.6도로 26도 아래로 내려갔지만, 다른 날들은 모두 27도 근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에는 최저기온이 화수요일이 26도, 목금요일은 25도, 그리고 토요일은 24도로 예보돼 있습니다. 열대야의 기준인 25도 아래로 내려가는 날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최저 기온이 27도를 넘기던 지난 주 중에 낮 기온 36도를 기록한 경상남도 함안을 찾아 길 위에 올랐습니다. 입추였던 수요일이었습니다. 다른 일들로 분주하기도 했지만, 더위를 핑계로 밍기적거리며 미뤄왔던 연꽃 답사였습니다. 연꽃 답사는 언제나 또 어디에서라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해 중 가장 뜨거운 날에 피어나는 연꽃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려면 한여름 무더위를 견뎌내야만 합니다. 연못에서 피어오르는 습기까지 더해져 연꽃을 관찰한다는 건 언제나 힘겹습니다. 게다가 연꽃 단지는 대부분 햇볕을 가릴 수 있는 다른 시설물을 설치하는 게 쉽지 않아서 하릴없이 뜨거운 뙤약볕을 고스란히 맞을 각오로 나서야 합니다.

   넓은 우산까지 챙기는 등 단단히 ‘무장’하고 찾아간 곳은 ‘함안연꽃테마파크’였습니다. 오로지 ‘아라홍련’이라는 이름의 특별한 연꽃을 만나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기왕에 먼 길에 오른 김에 주변의 다른 나무들도 찾아보고 돌아오는 게 여느 답사 때의 방식이었지만, 이 날은 연꽃을 살펴보는 동안 도무지 더 이상 다른 나무를 볼 기운도 염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되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지요. 대략 다섯 시간 정도 걸려 찾아가 세 시간 쯤 연꽃 앞에 머무르고는 곧바로 다섯 시간 쯤 걸려 되돌아오는 조금은 비경제적인 답사였습니다. ‘아라홍련’ 하나를 보고 돌아온 ‘원 포인트 답사’였지요. 오늘 《나무편지》에 담은 사진이 모두 그 ‘아라홍련’입니다.

   연꽃의 씨앗은 천년을 넘어서도 싹을 틔울 만큼 신비롭습니다. 오늘 《나무편지》의 제목에 적었듯이 고려시대 때인 7백 년 전에 맺은 씨앗이 살아나 피어난 꽃이 바로 아라홍련입니다. 이 놀라운 사연은 15년 전인 2009년 4월 2일에 시작됩니다. 그 날, 함안의 성산산성 발굴 작업 중에 발굴을 주도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연꽃 씨앗 15개를 발견한 겁니다. 한 달 뒤인 5월 8일에는 함안박물관측에서도 3개의 씨앗을 더 찾아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10년 4월에 함안박물관은 이 씨앗이 대관절 언제 맺은 열매인지 그 연대를 알기 위해 씨앗 2개를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연대 측정을 의뢰했습니다. 측정 결과, 하나는 고려시대 중기인 760년 전, 다른 하나는 그보다 90년 쯤 뒤인 고려 후기인 650년 전으로 밝혀졌습니다.

   남은 16개의 씨앗 가운데 2개는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유전자원 센터에 전시 보관용으로 보내고, 함안박물관 냉동실에는 6개를 보관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8개 가운데 5개는 농업기술센터, 3개는 함안박물관이 연꽃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울 조건을 맞춰 심었습니다. 7백 년이 넘은 씨앗을 싹 틔우겠다는 거죠. 먼저 싹을 틔운 건 농업기술센터에서 심은 5개 가운데 2개였어요. 며칠 뒤 함안박물관이 실험한 3개 가운데에 1개의 씨앗에서 싹이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해 한여름, 7월7일 오전 10시! 드디어 7백 년 된 씨앗에서 자라난 연꽃에서 꽃이 피었습니다. 한 톨의 작은 씨앗이 7백 년이라는 긴 세월을 뛰어넘어 살아난 겁니다. 놀랄 일입니다.

   ‘아라홍련’이라고 부르는 오늘 《나무편지》의 연꽃입니다. 이 지역이 예전에 ‘아라가야’ 지역의 왕궁 터 근처이기에 지역을 상징하는 ‘아라’라는 이름에 붉은 꽃을 피우는 연꽃이어서 ‘홍련’을 붙여 ‘아라홍련’이라 한 것입니다. 처음 함안박물관의 발표에 따르면 아라홍련은 현대의 연꽃과는 색깔에서나 꽃잎의 모양에서 조금 달랐다고 했습니다. 꽃잎이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연꽃보다 조금 더 길었으며 꽃잎 수도 달랐다는 거죠. 꽃봉오리와 빛깔에서도 미세한 차이가 있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발표했고, 이 꽃의 사진을 보도자료로 알렸습니다.

   그러나 함안박물관이 내보낸 보도자료의 사진만으로는 아라홍련이 현대의 홍련과 어떤 차이를 가지는지 구별하기 어려웠습니다. 그저 700년 전인 고려시대에 선비들이 완상하던 연꽃의 특별한 모습이라는 점만으로 놀랐지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할 기회를 만들어 전해드리겠습니다만, 사실 나라 밖에서는 이같은 일이 이미 몇 차례 있었습니다. 함안에서 이같은 담대한 프로젝트를 실행한 것도 이같은 나라밖 실험 결과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아라홍련은 관련 전문가들에게 연꽃 계통이나 진화 과정을 연구하는 데에 큰 자료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우리 곁에 세월의 비밀을 열어젖혔습니다. 필경 아라연꽃은 우리나라 수생식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남을 게 분명합니다.

   함안군에서는 그 뒤, 아라홍련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아라가야 지역의 습지를 테마공원으로 조성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연꽃은 여름의 관광 자원으로도 훌륭하게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함안군에서는 아라가야 왕궁터 곁에 연꽃 단지를 조성하고 2013년에 ‘함안연꽃테마파크’라는 이름으로 개장했습니다. 함안연꽃테마파크에서는 함안군 법수면에서 오래 전부터 살아온 토종 연꽃인 ‘법수홍련’과 국어학자이며 시조시인인 가람 이병기 선생께서 심어 키우던 연꽃으로 알려진 ‘가람백련’을 비롯해 가시연꽃 수련 등 수생식물을 전시하고 있지만 이 구역의 주인공은 역시 ‘아라홍련’입니다. 세월의 무게를 장하게 이겨낸 아라홍련은 함안연꽃테마파크의 한가운데에 설치한 ‘선왕정(先王亭)’이라는 이름의 정자 바로 옆 동쪽 구역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함안군은 아라홍련은 현대의 연꽃과 차이가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함안연꽃테마파크에서 찾아본 아라홍련은 현대의 여느 연꽃의 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체감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라홍련과 현대의 연꽃의 차이를 살펴보려고 따가운 햇살 아래 한참을 쪼그려 앉아 들여다 봤지만 맨눈으로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함안군의 초기 발표가 정확하지 않았거나 전문적인 동정이 필요하지 싶습니다. 아라홍련이 현대의 연꽃과 차이가 있든 없든 그건 둘째 치고, 7백 년 전에 맺은 씨앗이 썩지 않고 원형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가, 좋은 ‘임자’를 만나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꽃을 피웠다는 경이로운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생명력입니다.

   아라홍련처럼 오랜 세월 동안 생명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씨앗들은 더 있습니다. 물론 나라 밖 이야기이지만, 2천 년 넘는 긴 세월을 살아남은 씨앗들이 있지요. 그 신비로운 생명들의 짧지 않은 이야기는 다음에 따로 기회를 만들어 전해드리는 수밖에요. 아! 내일 모레 수요일에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제89회 《부천 상동도서관 나무강좌》에서는 이 경이로운 생명의 이야기를 자세히 전해드릴 예정이니 여유되시면 찾아와 주세요. 오늘은 ‘아라홍련’ 이야기만으로 길어진 《나무편지》, 여기서 접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4년 8월 12일 아침에 1,245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