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편지] 흰 눈 쌓인 한라산의 겨울 풍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
★ 1,243번째 《나무편지》 ★
난데없이 오늘의 《나무편지》를 한겨울 제주 한라산 풍경으로 시작합니다. 무더운 날씨 이어지며 겨울 찬바람이 그리워서 그랬습니다. 대서 중복 다 지나고 이번 주만 넘기면 다음 주에는 입추가 들어있고, 그 다음 주에는 말복이 있습니다. 이번 주가 고비이겠지요. 아니 그리 생각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계절의 흐름을 살피는 기준인 이십사절기가 맞아야 그렇겠지요. 하지만 진작에 물러갔어야 할 장마전선이 아직 우리 머리 위에 머무르며 크고 작은 비를 쏟아내는 상황이니, 이번 주 넘긴다고 날씨가 편안해지리라 기대하기가 쉽지 않네요. 갈수록 절기가 맞지 않지만, 달력 짚어보면서 마음이라도 가라앉혀 보고 싶은 뜨거운 계절입니다.
오늘 《나무편지》의 한라산 풍경을 만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습니다. 비행기편과 숙소까지 예약해놓고 제주에 도착한 날, 제주에는 폭설주의보가 내렸고, 따라서 한라산 등산로는 초입부터 통행금지 상태였습니다. 할 수 없이 한라산은 포기하고 ‘올레 길’을 걸으며 다른 나무들과 이틀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사흘 째 되는 날, 혹시 하고 한라산국립공원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 바로 그 날 오전부터 등산로를 개방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열일 젖히고 한라산으로 달려갔습니다. 그야말로 겨우 등산로만 열린 상태여서 등산로 양쪽으로는 거의 가슴 높이까지 흰 눈이 쌓여있는 상황에서 처음 열린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등산로 개방 소식이 덜 알려진 탓에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아서 더 좋았습니다. 행운이었지요.
한라산 등산 길에 자세히 살피고 싶었던 나무는 물론 ‘구상나무’ 였습니다. 구상나무는 해발 1400미터 지역 즈음부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우리 구상나무의 현재 상태는 굉장히 안 좋습니다. 우리나라에밖에 없는 우리 구상나무가 차츰 소멸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건 모두가 잘 아는 이야기이겠지요. 사진의 풍경을 담은 겨울 뿐 아니라 그 전 해의 여름 답사 때에도 구상나무의 사정이 안 좋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어요. 구상나무 군락지 전체를 전수조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냥 한눈에도 완전히 죽은 구상나무들은 확인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나마 큰 눈을 맞은 뒤에도 싱그러운 제 모습을 잃지 않은 구상나무가 아직은 적지 않습니다. 고깔 모양으로 펼친 나뭇가지 위에 하얀 눈을 가득 이고 싱그럽게 서 있는 구상나무는 그 자체로 ‘크리스마스 트리’입니다. 굳이 더 이상의 장식이 필요하지 않은 자연 상태의 찬란한 장식입니다. 심지어 이미 생명을 잃어 초록의 잎을 다 내려놓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긴 죽은 구상나무가 보여주는 설경까지도 환상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등산객들의 탄성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곳곳에서 이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려고 머뭇거리는 바람에 겨우 뚫린 비좁은 등산로는 곳곳에서 ‘정체’ 상태를 보이곤 했습니다.
구상나무는 ‘사라오름’ 지나면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고, ‘진달래밭’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군락지가 나옵니다. 짐작하시는 것처럼 여기서부터 백록담을 향해 오르면 오를수록 구상나무 고사목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타납니다. 제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라 해도 죽은 나무 위에 하얀 눈이 쌓인 풍경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상황입니다. 집단 군락지 가운데에 한두 그루 정도가 죽어 쓰러진 게 아니라, 서 있는 상태 그대로 잎을 모두 떨구고 나뭇가지만 남은 고사목들이 무리를 지어 나타납니다. 그야말로 구상나무 고사목의 공동 묘지 같은 처참한 풍경입니다.
구상나무는 사연이 많은 나무입니다. 처음에 이 나무를 발견한 일본 식물학자 나카이도 이 나무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이야기에서부터, 이 나무가 세상에서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나무라는 걸 알아 본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의 사제, 이 나무를 알게 된 서양인들이 성탄절을 축하하는 장식인 ‘크리스마스 트리’로 쓰게 된 사연, 또 마침내 이 나무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나라 토종의 특별한 나무로 식물학계에 등록한 영국 식물학자 이야기, 그리고 지금은 우리 땅에서조차 멸종위기에 처해있다는 안타까운 사연까지 구상나무 이야기는 성탄절 즈음에 따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 《나무편지》는 구상나무 이야기를 전해드리려는 게 아니라, 그저 이 무덥고 축축한 날씨에 상큼한 겨울 풍경이 생각났기에 한라산 풍경을 떠올린 것이었습니다. 구상나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하더라도 구상나무가 우리 곁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사실만큼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당장 우리 개개인들이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라 해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자연 자원이 왜 우리 곁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는지는 알아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아마도 지금 이 계절의 짐작하기 힘들만큼 요동치는 날씨의 의미를 짚어보는 계기도 될 겁니다.
순백의 눈이 한가득 쌓인 한라산의 겨울 풍경으로 오늘 하루, 그리고 ‘가을을 일으키는’ 절기 입추를 한 주 앞둔 이 한 주를 편안히 보내시는 데에 조금이나마 보탬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나무 이야기보다는 그저 시원한 풍경으로 《나무편지》 마무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4년 7월 29일 아침에 1,243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고규홍의 나무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칠백 년 긴 세월을 씨앗에 품고 살아남은 고려시대의 붉은 연꽃 (0) | 2024.08.13 |
---|---|
꽃 지고 다시 피고 … 열매 맺고 씨앗 맺는 한여름의 나무살이 (0) | 2024.08.05 |
사람살이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베풀어지는 마을 중심의 나무 (1) | 2024.07.25 |
마을 모든 생명의 유일한 젖줄인 우물을 지켜온 큰 나무 (1) | 2024.07.15 |
물 많은 장마철이면 떠오르는 왕버들 종류의 특별한 나무 (0) | 2024.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