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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례 시집 『하늘도 가끔은 구름밥을 먹는다』: 풍경風景을 경전 經典으로 읽는 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7. 26. 13:18

 

풍경風景을 경전 經典으로 읽는 시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들어가며

 

 

서용례 시인은 자연주의자이다. 이 말은 무조건적으로 인공人工을 반대편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 인공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숨결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생각하는 존재(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ce)서부터 출발한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호모 루덴스 homo ludens)를 넘어서서 도구, 이를테면 AI 와 같은 기능을 능숙하게 다루면서 그를 통해 놀이의 재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존재 (호모 파덴스 homo padens)로 진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변화 속에서도 고유한 자연의 숨결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을 잊지 않고 있으며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정서의 고양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정서의 고양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치고 있는 도덕과 윤리와 같은 가치 체계의 분열과 의식의 혼란 속에서 서정 抒情의 영역에 또 다른 각성을 요구하고 있다. 즉 세계(자연)에 대한 완상玩賞에서 벗어나 자연이 지니고 있는 무위無爲의 숭고함을 인간적 삶의 내면으로 이끌어 오는 일이 그것이다.

 

서용례 시인을 자연주의자라 부를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시인의 세계관이 학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농경農耕의 특징으로 볼 수 있는 공동체의 미덕인 두레의 의식이 태생적으로 체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시집 『하늘도 가끔은 구름밥을 먹는다』의 마지막 시 「종지봉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의자’ 같은 안식처로서의 애향愛鄕을 표출한 시로 읽히는데, 그와 같은 애향은 시공을 넘어 현재 시인이 살고 있는 대도시(청주)에서의 삶에서도 여전히 ‘만나는 사람마다 웃음 향기 넘쳐나’(「성안동 거닐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도 청주 사람과 사람 사이 / 물길이 트고 / 삶의 터전을 만들어 준다’(「무심천」)는 동일한 의식이 넉넉하게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한숨 쉬지 마라

맑은 눈을 가져라

천천히 걸어라

 

- 「내소사」 4연

 

저 남도의 명찰名刹 내소사 전나무 숲을 걸으며 읊은 위의 시구는 고승대덕의 법어도, 잠언도 아니라 700미터 숲길이 시인에게 들려준 자연의 소리이다. 그 소리는 시인의 선천적 체험이다.

 

가장 假裝과 과장 誇張사이의 시詩

 

가장은 실체를 감추는 것이고 과장은 침소봉대 針小棒大 하는 것으로서 시를 짓는 일에 있어서 대단히 필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실체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비유가 가장에 해당되는 것이고, 상상력想像力을 발휘하며 실체를 부풀리는 것이 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장이나 과장이 지나치게 넘치거나 모자랄 때 교언영색巧言令色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우리는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체화되지 않은 달관을 그럴싸하게 피력한다던가, 논리가 결여된 채 무모한 이미지로 채워진 상상의 시는 그 의의를 상실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필자 또한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예술(시)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가지고 있는데, 그 첫 번째는 모든 작품은 격조 格調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막걸리를 와인 잔에 마신다던가, 여름철의 화로와 겨울철의 부채와 같이 (하로동선夏爐冬扇) 때에 맞지 않아 쓸데없는 사물을 비유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격조의 의미가 되겠다.

또 다른 기준을 이야기하자면 뛰어난 작품은 철학성과 독창성, 그리고 유머와 적절한 상상력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모두를 갖추면 좋겠으나 그 중의 하나라도 갖추고 있다면 우리는 충분히 그 작품의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다른 시인들의 시집이나 작품을 감상할 때도 적용되는 나름의 기준이다.

 

그런데 서용례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하늘도 가끔은 구름밥을 먹는다』를 읽으면서 - 필자는 시인의 다른 시집을 접해 보지 않았다 – 확고해 보였던 나의 관점을 여지없이 깨트리는 시의 영역을 마주하게 되었다. 위에 제시한 시의 요건이 아니더라도 좋은 시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음을 증명하는 시집이 『하늘도 가끔은 구름밥을 먹는다』 인 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 서용례 시인을 일러 자연주의자라고 명명한 바 있다. 무심한 듯 펼쳐지고 사라지는 풍경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숨소리를 언어로 탄생시키는 힘과 그 힘이 가장도 아니고 과장도 아니며 적당한 섞임이 유장하게 펼쳐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시 「짐」을 읽어보자.

 

당나귀의 걸음으로

시간의 짐을 나른다

 

상대의 힘을 빼야 된다고

짐들이 아우성이다

아버지의

어깨가 들썩인다

짐들의 무게만큼

기울어진 세상

 

- 「짐」 전문

 

얼핏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그린 시로 가볍게 일별 할 수 있겠으나 시가 함의하는 파장은 의외로 무겁다. 짐으로 표상된 ‘시간’은 상대로 지칭되는 모든 존재에게 욕망을 줄이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런 욕망을 줄이지 못한다면 세상은 기울어지고 우리는 균형을 잃고 넘어지고 말 것이다. 시인은 더 이상의 언명도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우리의 삶은 그래야 한다는 정언판단定言判斷을 적시할 뿐, 어떤 수사 修辭도 내비치지 않는 절제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서용례 시인의 시를 어떤 행로로 따라가야 할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서 오래 전 필자가 발표한 글의 일부분을 옮겨 보기로 한다.

 

좋은 시는 독자에 맞추어 언어의 수준을 낮추는 시가 아니라 언어에 맞추어 독자의 수준을 높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시를 취한다. 시인은 먼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맑아야 한다. 시인은 산 정상에 오르기를 희망하는 자이다. 산정에서는 사방을 멀리 조망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을 깊고 넓게 조망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사색의 내공이 필요하고 그 사색의 결과를 담아내는 그릇인 스타일(문체)의 조련이 필수적이다

 

- 「‘좋은 시’라는 유령을 찾아서」(『시와 정신』 2016년 여름호)

 

자연주의자로서의 정체성正體性, 그로부터 이루어지는 세상을 바라보는 맑은 눈, 남다른 사색의 내공, 가장과 과장이 없는 문체를 시집 『하늘도 가끔은 구름밥을 먹는다』를 통해 맞이할 수 있는 독자는 행복한 사람임이 틀림이 없다. 그 징표로서 시 「염전」은 모든 생명에게 필요한 약이면서 독인 ‘소금’을 만들어내는 바다와 햇빛의 수고로움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포용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다에 떠돌던

나는

사람 사는 곳이 그리워

그리워서

 

눈물 한 방울까지

 

한 무더기

소금 꽃으로 피워내

 

사람들 닫힌 문 힘껏 열어

바다를 한 아름 안겨주었습니다

 

- 「염전」전문

 

 

한 마디로 서용례 시인은 일상에서 펼쳐지는 풍경들을 객관적 상관물로 삼고, 그 객관적 상관물의 속성을,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시키지 않는 거리 조정을 통해 우리의 삶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절제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다. 또 다른 시 한 편을 감상해 보기로 한다.

 

마음의 속을 겹겹이 비운

대나무 한 그루

 

별일 아니야

 

바람 세차게 불어도

아프다는 말도 못 꺼내고

첫사랑 떠난 시린 날들

몸속 없는 나이테로 감긴다

 

어디쯤일까

반에 반 조금이라도 남은

저 빈 대나무 속울음

그 속을 걸어가 본다

 

아쉬움에 비운 그 자리에

슬픈 노랫말이 이명처럼 들리고

첫사랑 발자국이 옮겨 앉는다

 

손톱에 물든 봉숭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에

어쩔 수 없이 흔들리는 붉은 꽃잎

 

담장 앞에 당당히 서리라

음률을 털어내는 저 댓잎 소리

 

별일 아니야

 

 

- 「외로워 마라」 전문

 

이 시는 대나무의 속성인 올곧음과 비어 있는 속을 통해 상처받은 어떤 이의 슬픔을 그려내고 있다. 차마 입으로 담아낼 수 없는 이야기들을 우리들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사는 우리에게 꼿꼿하게 서 있는 대나무로 살아야한다고 권유한다. 시 「외로워 마라」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온갖 슬픔도 별 일 아니라고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인이 전하는 애이불상 哀而不傷의 지극함을 대나무의 청청함으로 극복하는 자세를 무엇으로 견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서는 맑은 눈(심안 心眼)이 필요하다. 아인슈타인은 세상을 보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그 하나는 우리의 삶에 기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서영례 시인의 심안 또는 시심 詩心은 선악善惡의 분별심을 버림으로서 세상 사는 일을 기적으로 바라보는데서 출발한다.

 

쉼 없이 꽃피워 올리는

사월의 오후

 

여린 꽃잎은

아무렇게나 피워도 꽃은 꽃입니다

 

다섯 잎의 꽃잎은 서로에게 우산이 되고

꽃술은 꽃잎에게 벗이 되어

서성이게 합니다

 

어쩌다 고운 바람도

사람과 사람의 옷깃에

환하고 환한

꽃은 이마를 붙여 놓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쉼 없이 사람을 보듬어 주는

오늘처럼

내일도

꽃피는 날이 되길 바래봅니다

 

- 「꽃은 꽃입니다」전문

 

이것과 저것을 가르고, 좋고 나쁨을 나누는 오늘날 분쟁의 일상에서 ‘아무렇게나 피워도 꽃은 꽃’이라는 시인의 마음은 저 명나라때 이탁오李卓吾가 주장한 동심설 童心說에 닿아 있다. 동심설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어린아이의 마음은 분별심을 갖지 않은 것으로서 도덕과 윤리의 간섭이 없는 것으로 시심 또한 그 마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피워도 꽃은 꽃’이라는 생각은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일에 다름 아니다. ‘우리 모두 꽃처럼 피는 날 아닌가요?’( 「휴일」 부분)라고 묻거나 ‘서로에게 다독이면 꽃비가 내리고......서로에게 가족관계부가 작성되’( 「가족 관계부」 부분)는 상생 相生은 꿈꾸는 자(시인)에게만 찾아오는 기적이다. 서용례 시인은 앙드레 말로가 말했듯이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시를 쓰는 사람)’으로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가는 경전을 쓰고 있는 셈이다.

 

 

풍경에 숨을 불어넣는 문체文體

 

그리하여 시집 『하늘도 가끔은 구름밥을 먹는다』는 휴머니즘을 넘어 시인에게 다가오는 모든 풍경들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는 일관된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세세하게 그 예들을 열거할 수 없음이 아쉽지만 몇몇 문장들을 더듬어 보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산비탈 새하얀 나비떼

노을 저 편에

구름처럼 앉아 있다

 

- 「구절초」부분

 

*구절초를 나비로 비유하면서 더 나아가 어머니를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구름으로 인식한다.

 

물을 밟고 건너가던 달도

제 옷자락이 젖을까 꼭꼭 말아 쥐지만

 

-「대청호에서 반딧불이 만나다」

 

* 물에 언뜻 비치는 달의 움직임을 표현

 

 

사람 드문 골목길에서

담 틈으로 긴 손을 내미는

 

- 「풀잎의 언어」

 

* 틈 사이에 뿌리를 내린 풀꽃의 생명력

 

 

하늘 꼬리를 물고 내려온

구름 한 자락

지나는 바람이 냉큼 먹는다

 

- 「모충교 지나며」

 

* 순간 순간 형태를 바꾸는 구름의 움직임을 포착

 

바람이

보도 블럭 사이 냉이에게

스웨터 올같은 제 몸 풀어 보냅니다

 

- 「걱정 말아요」

 

필사적으로 틈을 비집고 나온 냉이와 무심하게 스쳐지나가는 바람과의 교감

 

간략하게 몇 편의 시의 구절을 제시하고 그 의미를 살펴보았는 바 부동不動 또는 정지 停止의 사물이나 풍경을 수동태애서 움직이는 실체로 시각화함으로서 각각 분리된 개체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인드라망으로 연기緣起된 세계임을 드러내는데 탁월한 재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물론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인간관계를 다룬 시편도 있다. 공연장 객석에 버려진 꽃다발을 보며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의 관객인가’하고 되묻는 시 「관객」, 오늘날 사회문제로 대두된 손자 양육의 갈등을 그린 「목단꽃」, 이승을 떠난 아버지를 그린 「그리운 아버지」, 가족 여행의 단란함을 그린 「가족」, 익명 사회의 불안과 두려움을 표현한 시 「사람들 사이」 등의 시편은 현대사회의 단면을 예리하게 추적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결국 시집 『하늘도 가끔은 구름밥을 먹는다』는 자연의 본질인 순정純正함이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전임을 깨닫는데 까지 이르른다. 그리하여 서용례 시인이 진실로 바라는 기적이나 꿈은 어떤 조건도 허용되지 않는 아가페적 사랑을 간구하는 것이다. 시 「마음을 읽어주고 싶습니다」는 이 시집의 절정으로 간주하여도 무방할 만큼 간절한 시인의 고백이다.

 

 

살면서 만난 사람들은

참으로 고운 사람이 많았습니다

때론, 슬픈 사람을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가

함께 울기도 합니다

토닥토닥 해주다가도

이야기가 길면 가끔은 끊어내기도 하고

그런 날은 잠들지 못하고

내일 만나는 사람 이야기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하지만

오늘도 실패했습니다

교과서 같은 대답과 어디선가

본 듯한 명언을 들려줍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준다는 것은

산등성 같이 참 어렵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보듬어 줄 수 있는

또 다른 손이 필요한가 봅니다

손바닥을 펴 보여줍니다

실금처럼 새겨진 말들

아프지 않게 긁어 줄

마음의 더듬이 키우라고

 

오늘도 걸어가는 길 위에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햇살은 언제나 곱고

밑불 같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이

지극히 행복한 꽃길이면 좋겠습니다

 

- 「마음을 읽어주고 싶습니다」 전문

 

나가며

 

시 「오십에서 육십 사이」에 드러난 바와 같이 시인은 아마도 지천명 知天命을 지나 이순 耳順에 이르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눈물과 웃음을 저울에 달아본다면

인생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그 길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오십과 육십 사이

 

- 「오십에서 육십 사이」 끝 연

 

시인은 이제 관조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 일은 자로 재어보는게 아니라 / 스쳐 지나가야 하는 바람의 손을 잡는 일/ 멀리서 오는 꽃 안부 같은 것 ’ (「꽃그늘에서」 마지막 연)이라고 되내이고 있다. 그렇다면 ‘서정의 목소리가 툭툭 들리는 / 대추나무 한그루 가꾸고 싶은’(「꽃피는 날」 마지막 부분) 시인의 희망은 어디에서 시의 꽃을 피우게 될까? 다음 시집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