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망하고도 제 버릇 못 고친 매관매직의 흔적[박종인의 ‘흔적’]
[아무튼, 주말]
서울 옥인동에 남은
윤덕영의 벽수산장
서울 종로구 옥인동 골목에는 뜬금없는 돌기둥이 있다. 연립주택 사이로 난 도로 양편에 서 있는 육중한 돌기둥이다. 큰길가 ‘송석원 터’라는 표지석 뒤쪽 골목이다. 한쪽 기둥은 온전하고 다른 쪽 기둥은 몸통 없이 기단과 머릿돌만 있다. 그 골목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지번이 옥인동 47-133번지인 한옥이 나온다. 한옥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근사하다. 계단 끝에 또 돌기둥 두 개가 있고 집은 그 위편에 있다. 1977년 ‘옥인동 윤씨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됐다가 20년 만에 지정이 철회된 집이다. 식민 시대 이 집 주인은 윤덕영이라는 사람이다.
윤덕영은 순종비인 순정효황후 큰아버지다. 한일병합 후 윤덕영은 은사금 5만원과 조선 귀족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0년 10월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작위를 받은 윤덕영은 조선 귀족 대표로 마차를 타고 덕수궁에 가서 이태왕 고종에게 작위 수여 사실을 보고했다.(1910년 10월 11일 ‘매일신보’)
그 윤덕영이 살던 ‘옥인동 윤씨 가옥’을 식민 시대 사람들은 ‘옥인동 아방궁’이라고 불렀다. ‘집 한 채를 14, 15년이나 두고 건축하고도 오히려 필역(畢役)치 못하였다 하면 누구나 경이의 눈을 뜰 것이다.’(1926년 5월 31일 조선일보) ‘세상 사람이 아방궁이라 이르는 그 집이니 아방궁 짓는 돈이 어디서 나온지 그 까닭을 이상히 생각한다.’(1921년 7월 27일 ‘동아일보’)
위 연립주택 앞 돌기둥에서 이 윤씨 가옥까지 거리는 어른 걸음으로 5분이 넘는다. 그 돌기둥이 이 아방궁 입구다. 그러니까 현 옥인동 절반이 윤덕영 개인 소유지였고 윤덕영은 거기에 아방궁을 짓고 살았다. 윤씨 가옥을 포함해 프랑스풍으로 지은 윤덕영 별장 이름은 ‘벽수산장’이다.
모두가 비웃은 ‘부패한 친일파’ 윤덕영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죽였을 때 사람들은 통쾌하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는 못하였으나 모든 사람들 어깨가 들썩 올라갔으며 깊은 방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서로 기뻐해 마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 이완용, 윤덕영, 조민희, 유길준 등은 양궁(兩宮·고종과 순종) 분부를 핑계로 즉시 대련(大連)으로 가서 조상했다. 순종은 친히 통감부로 가서 조문을 마친 후 이등박문에게 문충공(文忠公) 시호를 내리고 제사비 3만원을 부조하고 그 유족에게는 10만원을 하사하였다.’(황현, 국역 ‘매천야록’ 6권 1909년 ④ 1. 안중근의 이등박문 사살, 국사편찬위)
1934년 5월 9일 ‘윤치호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5월 9일 수요일 비. 오늘 한상룡씨로부터 윤덕영씨의 아방궁이 37만엔의 비용이 들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직도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니! 어리석음 이상이다. 범죄다.’ 1940년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940년 10월 18일 금요일 흐림. 윤덕영 자작이 간밤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옛 조선의 귀족정치에서 가장 부패하고 못나고 오만한 표본 하나가 사라졌구나.’(이상 국역 ‘윤치호일기’, 국사편찬위)
세 기록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사람이 윤덕영이다. 기록을 종합하면 윤덕영은 ‘대표적 친일파’요 ‘부패한 관리’다. 1910년 한일병합 때 조카딸 순정효황후가 어새를 치마폭에 감추고 내놓지 않자 큰아버지 윤덕영이 강제로 끄집어내 조약문에 찍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친일파였다. 병합 7년 뒤 윤덕영은 순종을 도쿄로 보내 천황을 알현하게 하려는 총독 하세가와 계획을 성사시켜 총독부 환심을 완벽하게 얻었다. 이왕직 일본인 관리 곤도 시로스케에 따르면 고종이 “조선 500년 동안 본 적 없는 간악한 자”라고 비난할 정도였다.(곤도 시로스케, ‘대한제국 황실비사’(1926), 이마고, 2007, p177) 그런데 부패는 더했다.
식민 시대에 터진 매관매직 사건
1919년 1월 고종이 사망했다. 고종 장례식 때 벌어진 사건이 기미 만세 운동이다. 고종이 죽고 2년이 지난 1921년 3월 31일 고종 위패를 종묘에 모시는 의식이 있었다. 이를 ‘부태묘’라고 한다. 부태묘를 비롯해 각종 왕실 행사에 필요한 인력을 ‘차비관’이라고 한다. 차비관은 벼슬이 없는 사람은 임명하지 못했다. 그런데 고종 부태묘는 나라가 없어진 상태라 벼슬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차비관은 필요하고, 옛 규정대로 의식을 치르려면 애당초 불가능했다. 이 황당한 설정에 업혀서 조선이 가진 고질적 병폐, 매관매직 사건이 재발해버렸다. 이름하여 ‘분참봉(分參奉) 사건’이다. 왕실 담당 기관인 이왕직 고위 관리들이 이 분참봉 벼슬 임명장을 대량 찍어내 팔아치워 돈을 챙긴 사건이다. 그 주인공이 윤덕영이다.(김대호, ‘일제하 종묘를 둘러싼 세력 갈등과 공간 변형’, 서울학연구 43호,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2011)
벼슬 밝힌 양반들, 돈 밝힌 관리들
당시 ‘동아일보’와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전말은 이러했다. 윤덕영은 이왕직에서 일하는 일본 관리들을 이렇게 설득했다. “차비관이 많이 필요한데 옛 법에는 벼슬 없는 사람은 안 된다. 옛 벼슬아치들은 거의 시골에 살고 있다. 수당도 적고 예복도 각자 준비해야 하니까 자원할 사람도 적다. 이왕직에서 재력 있는 문벌가 자제에게 벼슬을 줘서 자격을 갖추게 하면 해결되리라고 본다.” 벼슬 없는 사람에게 ‘분참봉’ 벼슬을 줘서 차비관 자격을 주자는 이야기였다. 조선 예법을 모르는 일본 관리들은 이에 찬동했다.
두 번 다시 없을 벼슬자리 기회였다. 멸망하고 없는 조선 왕국 정식 벼슬을 얻을 수 있다는 결정에 엄청난 응모자가 몰려들었다. 처음 계획은 100명이었는데 윤덕영은 이를 450명까지 늘렸다. 이왕직 내부 인사까지 자기 아들에게 분참봉 자리를 줬고 분참봉 첩지를 팔았다. 지방에서는 자기 자식 벼슬 획득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한 달이 조금 지난 뒤 신문들이 450명이나 되는 분참봉 비리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럴듯하게 이유를 꾸며 이왕직 차관과 서무과장을 승낙시켜’(1921년 5월 12일 ‘동아일보’), ‘분참봉 첩지를 위조해 그 첩지 한 장에 100~400원을 받고 팔아먹은 공문서 위조 사건’(1921년 7월 30일 ‘매일신보’) 등.
전형적 매관매직 독직 사건이었다. 매관매직으로 부패했던 옛 고종 정권을 연상시키고, 벼슬 밝히는 옛 양반네 허영심을 연상시키는 사건이기도 했다.
언론이 와글와글 떠들어대자 당시 경기도 경찰부에서 수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5월 24일 경기도 경찰부에서 사건을 넘겨받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은 윤덕영을 전격 소환했다. 윤덕영은 인력거를 검은 휘장으로 꼭꼭 가리고 출두해 수심을 띤 얼굴로 한참을 기다리다가 법원 응접실로 들어갔다.
몸통이 사라져버린 검찰 수사
그런데 경찰 수사 결과는 분참봉 임명장을 위조해 팔아치운 협잡배 60여 명 구속이었다. 죄목은 ‘관문서 위조 관용 인장 위조 사기 취재죄’였다.
경찰에서 사건을 넘겨받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은 언론이 몸통으로 지목한 윤덕영, 한창수, 이왕직 사무관 이원승과 고종 8촌 형제인 이왕직 장관 이재극을 전격 소환해 수사를 이어갔다.
사건 담당 검사는 “조선 귀족이라고 죄 있는 것을 용서할 여지가 없이 범죄가 되는 때에는 단연히 기소할 것”이라고 ‘매일신보’ 기자에게 말하기도 했다.(1921년 7월 23일 ‘매일신보’) ‘매일신보’는 검사 말을 토대로 ‘괴수 몇 명의 운명도 불일간 결정될 터’라고 보도했다.
8월 4일 검찰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세 사람이 모두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 검찰은 “윤덕영이 분참봉을 미끼로 돈을 받았다 하더라도 분참봉 임명은 이왕직 소관이므로 직무상 죄가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왕직 장관 이재극은 “그저 미안스러웠다”고 했고 한창수는 “하인이 받은 돈을 뒤늦게 알고 즉시 돌려보냈다”고 했다.(1921년 8월 5일 ‘매일신보’)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 꼬리 자르기식 수사였다.
불기소 처분이 나기 일주일 전 언론이 몸통으로 지목한 윤덕영은 동아일보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한 달이 지난 9월 12일 검찰은 윤덕영을 재소환해 동아일보 고소 사건에 장시간 진술했다. 뜻밖에도 석 달 뒤 윤덕영은 신문사에 대한 고소를 자진 취소했다. 윤덕영은 동아일보에 편지를 보내 ‘허위 사실을 진실이라고 전하게 된 책임도 내 부덕의 소치임을 성찰할 것’이라고 전했다.(1921년 12월 6일 ‘동아일보’)
매관매직, 옥인동 흔적들
1910년 윤덕영은 옥인동 47번지 땅을 구입했다. 1927년 현재 땅 면적은 1만9467평으로 옥인동 전체 3만6361평의 절반에 달했다.(김해경,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 정원의 조영 기법 해석’, 서울학연구 62호,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6) 그 땅에 지은 집이 벽수산장이다.
벽수산장 자리는 18세기 천수경이라는 문인이 살던 집 송석원(松石園)이 있던 자리다. 윤덕영을 촬영한 사진에 김정희가 쓴 ‘松石園’ 세 글자가 보인다. 윤덕영은 1913년 이 자리에 벽수산장을 짓기 시작했다. 완공까지 14~15년이 걸렸다. 해방 후 박헌영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언하고 이 벽수산장을 사무실로 사용했다.(손세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과 내무부장’, 월간조선 2010년 7월호) 6‧25전쟁 뒤 유엔(UN) 산하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이 벽수산장을 사무실로 사용했다. 벽수산장은 1966년 화재로 사라졌다. 불타지 않은 흔적이 사진에 있는 돌기둥, 계단과 낡아빠진 한옥이다. 나라 사라지고도 버릇 고치지 못한 매관매직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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