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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미루자" 조계종 엉뚱한 바람…부처는 그리하지 않았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7. 7. 13:57

"깨달음 미루자" 조계종 엉뚱한 바람…부처는 그리하지 않았다

중앙일보

입력 2023.07.07 01:04

 
 
백성호 기자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구독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한국 불교에서 가장 큰 종단이 대한불교 조계종이다. 조계종단의 승려 수는 약 13000명이다. 그중에서 2000명가량이 선방에서 수행을 한다. 여름과 겨울, 석 달씩 산문 출입을 금한 채 하안거와 동안거에 들어간다.

 

알고 보면 종교계도 사람 사는 동네다. 인간사의 지지고 볶는 희로애락은 여기서도 비슷하게 흘러간다. 세속에도 정치판이 있지만, 종단에도 정치판이 있다. 국회에 해당하는 종회가 있고, 종책모임이란 이름의 정치 그룹과 계파도 있다. 세속의 정당보다는 결속력이 약해 각자의 이익에 따라서 이합집산이 더 잦은 편이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승려 수는 약 1만3000명이다. 그중 2000명가량이 여름과 겨울에 하안거와 동안거에 참석해 선방에서 수행한다. 석가모니 붓다가 살았던 카필라바스투에서 불교 신자가 향에 불을 붙이고 있다. 백성호 기자

 

종책 모임끼리 정치적 동지가 되기도 하고, 또 정치적 적이 되기도 한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일도 잦다. 사람들은 “종단에 가서 정치나 할 거면 굳이 왜 출가했나? 그냥 세속에서 살지”라는 지적을 종종 쏟아낸다. 그런데 종교계에도 욕망이 있다. 그런 욕망이 간혹 충돌을 빚고 신문의 사회면이나 9시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도 불교가 불교이게 하는 마지막 보루가 있다. 그게 바로 선방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불교 안의 수행 풍토다. 여름과 겨울 안거에 참여하는 숫자는 조계종 전체 스님 중 비록 20%가 채 안 되지만, 선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참선하는 이들로 인해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된다. 다시 말해 불교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조계종이 선불교로서 숨을 쉬게 한다.

 

물론 선방에서 수행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안거에 참가하면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 사찰 문밖출입이 아예 금지된다. 밥 먹고 좌선하고 자고, 밥 먹고 좌선하고 자는 일만 되풀이 한다. 그렇게 오롯이 수행에만 전념해야 한다. 각자의 화두를 들고, 그 화두를 깨치기 위해 잠자는 시간까지 줄이면서 참선에 매진한다.

 

이렇게 수행하는 이유가 있다. 깨달음이다. 2600년 전 인도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부처님이 깨쳤던 그 깨달음이다. 인간과 세상과 우주의 이치를 깨달아 보다 자유롭고, 보다 지혜롭고, 보다 여여(如如)하게 살기 위함이다. 인도 카필라 왕국의 왕자였다가 출가해 깨달음을 이룬 석가모니도 그랬다.

불교에서 연꽃은 깨달음을 상징한다. 진흙에서 올라왔음에도 진흙에 물들지 않고 피어나는 연꽃을 석가모니 붓다도 노래한 바 있다. 중앙포토

 

깨닫고 나서 그는 자유로워졌다. 이치를 깨치고 나니 삶이 그토록 힘든 이유가 빤히 보였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자유로워진 만큼 남들도 자유로워지길 바랐다. 자신이 지혜로워진 만큼 남들도 지혜롭기를 바랐다. 자신이 행복한 만큼 남들도 행복해지길 바랐다. 그래서 자신이 깨달은 이치(法)를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전법(傳法)’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과 전법을 수레의 두 바퀴로 본다. 우선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그런 뒤에는 세상 모든 이를 이롭게 하기 위해 그 깨달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두 기둥이다. 그래서 불교 신자들은 서로 인사할 때 “성불(成佛)하세요”“성불하세요!”라고 말을 건넨다.

 

그런데 조계종에서는 최근 엉뚱한 바람이 불고 있다. 깨달음을 미루고 전법을 하자는 주장이다. “지장보살께서도 지옥 중생을 다 제도하기 전까진 성불을 다음 생으로 미룬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성불합시다’ ‘성불하세요’ 다음 생으로 미루고 금생에는 부처님 법을 전합시다.” 조계종의 일각에서 제기되는 주장이다. 그들은 “성불합시다” 대신 “전법을 합시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다.

 

백성호의 현문우답

지지고 볶는 우리의 일상이 최고의 선방이요, 수도원입니다. 일상의 교실에서 길어올린 너와 나의 지혜를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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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0년 전 석가모니 붓다가 금강경을 설했다고 전해지는 장소에서 불고 순례객들이 절을 하고 있다. 붓다는 금강경에서 중생을 위한 깨달음의 이치를 노래했다. 백성호 기자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2600년 전 석가모니 붓다가 깨닫지 못했다면 불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장보살의 예도 마찬가지다.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성불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선언은 중생에 대한 연민과 자비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것이 깨달음을 향한 수행을 다음 생으로 미루고 전법과 포교에만 전념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 구절에 담긴 뜻을 깊이 읽어야 한다.

 

깨달음과 전법은 불교라는 수레에 달린 두 개의 바퀴다. 만약 깨달음을 포기하고 전법만 한다면 어찌 될까. 하나의 바퀴로 제자리만 맴돌게 된다. 머지않아 불교는 생명력을 잃게 될 것이다. 석가모니 붓다가 자신의 깨달음을 전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우리도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고 했다. 법의 등불도 켜고, 내 안의 등불도 켜라고 했다.

 

만약 조계종 일각의 주장처럼 전법만 할 요량이면, 굳이 ‘자등명 법등명’을 말할 이유가 없다. 자등명은 빼고 법등명만 있어도 된다. 붓다의 깨달음과 그걸 기록한 경전만 있어도 된다. 그런데 석가모니 붓다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유언처럼 남긴 그의 마지막 가르침은 “자등명 법등명”이었다. 우리도 붓다 자신처럼 깨달으라고 했다.

인도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붓다가 깨달은 것은 인간과 자연과 우주의 근본 이치다. 그 이치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불교의 전법은 그 이치를 전하는 일이다. 그러니 붓다의 깨달음이 있으니 우리의 깨달음은 필요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지극히 비불교적이다. 출가자와 신도 수가 급감하는 불교계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함이라고 하더라도 피상적인 해법에 불과하다. 설령 그 방식으로 불교 신자가 급증한다고 해도 나중에는 불교 자체가 '속 빈 강정'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백성호 기자

 

깨달음이 없는 불교는 더 이상 불교가 아니다. 깨달음이 없는 조계종도 더 이상 조계종이 아니다. 새가 두 날개로 하늘을 날듯이, 수레는 두 바퀴로 땅을 딛고 나아간다. 그게 깨달음과 전법이다. 수행과 깨달음에 관심이 없는 종단 정치판의 노골적인 정치적 욕망이 불교의 정체성을 흔들고 있다. 이러다가 조계종이 ‘팥소(앙꼬) 없는 찐빵’이 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백성호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중앙일보 종교 담당 기자입니다. 일상의 禪, 생활의 영성이 소중하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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