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나를 치유하는 여행’>
성벽에 스며든 ‘온달의 숨결’ ‘평강의 思夫曲’도 구슬프네
충북 단양 온달산성
우리나라 산성 중 조망이 가장 좋다는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에 오르면 남한강과 겹겹이 보이는 소백산 능선이 가슴을 트이게 한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지도를 펴놓고 충청북도를 찾아보면, 누가 일부러 그려 넣기라도 한 듯 반도 남쪽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충북은 그런 지리적 위치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요충지로 주목받았다. 남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고구려와 동북으로 진출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백제, 그리고 그곳을 지키려는 신라가 팽팽하게 대립했다. 전쟁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흔적은 시간의 지우개로도 말끔히 지우지 못하는 법. 그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남는 것이 성이다. 충청북도에는 성, 특히 산성(山城)이 많다. 상당산성, 삼년산성, 온달산성, 적성산성, 충주산성…. 성에는 돌 틈마다 옛사람의 흔적이 스며있기 마련이다. 낯선 땅에서 만나는 옛이야기 역시 여행이 주는 선물이다. 단양의 온달산성으로 온달을 만나러 간다. 바보가 아닌 장군, 전설이 아닌 역사 속의 그는 어떤 궤적을 남겼을까.
#온달산성 = 이 땅 위의 산성 중 조망이 가장 좋다는 온달산성은 단양군 영춘면에 있다. 온달산성과 온달동굴을 배경으로 조성한 테마파크 온달관광지를 찾아가면 된다. SBS ‘연개소문’과 MBC ‘태왕사신기’, KBS의 ‘바람의 나라’와 ‘천추태후’까지 대작 드라마들을 이곳에서 찍었다. 온달장군이 수련을 하고 평강공주와 사랑을 나눴다는 전설을 지닌 온달동굴도 그 안에 있다. 온달관광지에서 온달산성까지는 850m. 시간으로는 30분 남짓 걸린다.
산은 높지 않지만 산세는 제법 가파르다. 계단을 하나씩 오르면서 혼자 묻고 대답한다. 그 옛날 이 길을 먼저 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세상의 모든 길에는 걸어간 사람이 각인되기 마련이다. 그 속에는 기쁨도 있지만 눈물도 있다. 그래서 길은 인생이다. 그 안에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배어 있다. 물음은 장군이 되어 이 산을 올라갔을 온달로 이어진다. 그는 이 길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음을 예감했을까. 온달의 행적은 삼국사기 제45권 열전 제5(三國史記 卷第四十五 列傳 第五)에서 확인된다. 기록은 이렇게 시작된다.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 사람이다. 용모는 구부정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빛이 났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발을 걸치고 시정(市井) 사이를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저잣거리의 ‘바보’ 온달과 궁궐을 나온 ‘울보’ 평강공주가 만나 부부가 되는 과정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온달은 평강공주에 의해 다시 태어나고 고구려의 장군이 된다. 어쩌면 그는 애초부터 바보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착한 사람들이 바보 취급을 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테니. 산에도 겨울과 봄이 교대의식을 치르고 있다. 병아리 닮은 햇살들이 비탈마다 너부죽 엎드려 있다. 숨 가쁘게 한 고비 오르고 나니 전망대가 나타나고 저만치 강이 보인다. 남한강이다. 푸른 강물은 백사장을 끼고 굽이굽이 흐른다. 강물은 산의 높음을 탐하지 않아 발치를 낮게 흐르고, 산은 강물의 흐름을 욕심내지 않아 그윽한 시선으로 맞이하고 보낸다.
조선왕조의 개국 공신인 정도전이 정자를 짓고 풍월을 읊었다는 도담삼봉. 김호웅 기자 diverkim@
석회암 종유석이 갖가지 기이한 모양을 하고 있는 온달동굴. 김호웅 기자 diverkim@
스스로 지어낸 욕심과 질시로 고통받는 건 오로지 사람이다. 소나무 아래 놓인 벤치에 앉아 다시 옛사람을 생각한다. 장군이 된 온달 역시 이곳에 서서 강을 바라봤을까? 사랑하는 아내 평강을 그리워했을까? 그가 전쟁터로 떠난 것은 스스로 청한 일이었다.
양강왕(陽岡王)(영양왕의 잘못)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수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군현으로 삼으니, 그곳의 백성들이 애통하고 한스럽게 여겨 한시도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중략) 온달이 길을 떠날 때 맹세하며 말했다.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되돌리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으리라!”
결연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괜스레 주위를 둘러본다. 그를 따르는 병사라도 되는 듯 걸음을 재촉한다. 어느 순간 잔설 끝으로 성곽이 우뚝하게 솟아오른다. 온달산성이다. 성벽은 납작납작한 점판암을 가로로 촘촘히 쌓아올렸다. 두께는 3∼4m쯤 돼 보인다. 지형을 따라 감겨 돌아가는 성의 곡면에 조형미가 차고 넘친다. 세월을 따라 고스란히 자연 속에 동화돼 있다.
동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아직 동장군의 영역, 그가 지휘하는 바람이 매섭다. 모자를 눌러쓰고 성 안을 한 바퀴 돌아본다. 그리 크지 않은 성은 조금 가파른 비탈을 에워싸고 있는 형태다. 입구의 안내판에 온달장군이 쌓은 성이라고 적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온달이 신라군을 막기 위해 이 성을 쌓았는지 신라군이 쌓은 성을 빼앗으려다가 전사했는지 명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 성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는 치열했던 게 틀림없다. 온달의 마지막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침내 떠나가 아단성(阿旦城)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서 죽고 말았다. 장사를 지내려 하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가십시다.”
드디어 관을 들어 묻을 수 있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비통해하였다.
죽음과 이별은 애달프고 비통하다. 하지만 비통한 것이 어찌 장군의 죽음뿐이랴. 이름 없는 고구려 병사도, 그에 맞서 싸우다 눈을 감은 신라 병사도 죽음 앞에서 애달픈 건 마찬가지다. 그 슬픔이 성벽의 돌 틈마다 절절하게 박혀 있는 것 같아 자꾸 손으로 쓰다듬어 본다.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옳다고 할 수 없다. 하물며 미화하는 것이야…. 양지바른 성벽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호박돌을 깔고 앉아, ‘여행은 과거라는 거울에 현재를 비춰보는 일’이라고 수첩에 쓴다.
성벽을 한 바퀴 돌다가 언덕으로 올라간다. 중간쯤에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아!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청자색 하늘 아래 소백산 봉우리들이 어깨를 겯고 줄달음친다. 마치 말들이 경주를 하는 것 같다. 시선을 조금 내리면 시리도록 푸른 북한강이 들어온다. 그리고 풍경에 점안(點眼)이라도 하듯 들어서 있는 사람의 집들과 논밭. ‘조망이 가장 아름다운 산성’이라는 말이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었구나. 이 순간만큼은 세상이 꿈속인 듯 아름답다.
강은 참혹했던 싸움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듯 묵묵히 흐른다. 혹시 감춰두었던 온달의 이야기라도 들려줄까 싶어 귀를 기울이지만 끝내 아무 말 없다.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 마음의 문을 열고 인생이 흐르는 소리나 들을 일이지. 나는 지금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지. 늦겨울 햇살이 홑이불처럼 걸린 성벽에 영혼을 걸어놓고 말린다.
# 그 밖의 가볼 만한 곳 = 온달관광지에서 조금 더 가면 구인사가 있다. 소백산 수리봉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이 절은 대한불교 천태종의 총 본산이다. 골짜기를 따라가며 건물들이 끝없이 배치돼 있다. 1966년에 창건되었기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웅장한 규모와 경건한 분위기는 절집 중 으뜸이다.
단양에 가면 단양8경의 하나인 도담삼봉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남한강 상류 한가운데에 들어앉아 있는 세 개의 큰 바위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자신의 호를 삼봉으로 할 정도로 이곳을 사랑했다고 한다.
가운데 바위에 그가 풍월을 읊었다는 정자가 있다. 바위 셋 중 가운데 있는 것이 장군봉(남편봉)이고 왼쪽이 첩봉, 오른쪽 처봉이다. 처봉은 시샘으로 돌아앉아 있다. 선착장이 있어서 배를 타고 둘러볼 수도 있다.
온달이 戰死한 곳, 서울 아차산성? 단양 온달산성?
온달산성은 남한강변 해발 427m의 성산 위에 쌓은 석축산성이다. 삼국시대에 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전초기지로서,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전투가 치열하였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길이 682m, 높이 3m의 반월형으로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동·남·북 3문(門)과 수구(水口)가 남아 있다. 옛 기록에 성 안에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일부러 메웠거나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온달장군이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을 탈환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전사한 것은 590년(영양왕 1년)이었다. 가장 관심을 모으는 것은, 그가 어느 곳에서 전사했느냐 하는 것이다.
서울 광진구 광장동과 구의동에 걸쳐 있는 아차산성으로 보는 견해와 단양 영춘의 온달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맞서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온달산성이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은 것은 역사서의 기록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온달장군의 전사와 관련, 삼국사기에는 ‘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路而死(아단성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서 죽고 말았다)’라고만 쓰여 있다. 결국 ‘아단성’이 어느 곳이냐가 결정적 열쇠인데, 이에 대한 해석이 크게 엇갈린다. 아차산성이라는 쪽은 성 이름이 아단성(阿旦城)에서 아차성(阿且城)으로 다시 아차성(峨嵯城)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또 온달이 남긴 말 가운데 “신라가 우리의 한수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군현으로 삼으니, 그곳의 백성들이 애통하고 한스럽게 여겨 한시도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라는 대목을 근거로 마지막 싸움터를 서울의 한강 북쪽 아차산성으로 본다.
하지만 온달산성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고구려 때 영춘의 지명이 을아단이었므로 아단성이 곧 지금의 영춘이라고 해석한다. 을아단의 ‘을’은 위(上)를 뜻하는 말이므로 ‘한강 상류의 아단’이라는 뜻이고, 거기서 을이 빠졌다는 것이다. 더구나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 되찾겠다고 출정한 온달이 지금의 서울에서 싸우다 죽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영춘에 온달장군·평강공주와 관련이 있거나 전쟁에서 유래된 지명 등이 수없이 많은 것 역시 온달장군과의 관련성을 뒷받침한다. 온달이 수련했다는 ‘온달동굴’ 외에도 기마병을 막기 위해 진을 치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꼭두방터’가 있다.
‘은포동’은 돌포가 있던 곳이며, ‘쉬는 돌’은 온달이 후퇴하다가 윷을 놀던 곳이라고 한다. 하류의 ‘군간(軍看)나루’는 온달의 군사들이 파수를 보던 곳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군간나루 북쪽에 있는 ‘선돌’은 성 쌓기를 돕던 마고할미가 온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팽개친 것이라고도 하고, 온달을 도우려 달려오던 누이동생이 패전소식에 그 자리에서 굳어 돌이 된 것이라고도 한다. ‘피바위골’은 싸우면서 흘린 피가 바위에 많이 묻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집단 화장실이었던 ‘통쉬골’, 싸우다 죽은 사람을 일일이 흙에 묻을 수 없어 돌로 무덤을 만들었다는 ‘돌무지골’도 있다.
온달동굴은 약 4억5000만 년 전부터 생성되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석회암 지대에 형성된 천연동굴로 굴과 지굴의 길이를 합쳐 800m 정도이며 내부에는 다채로운 종유석과 석순이 있다. 1979년 천연기념물 제261호로 지정되었다.
온달산성 가는 길 · 묵을 곳 · 먹을 것
# 온달산성 가는 길 = 경부(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 제천나들목에서 나와 단양·영월 방향으로 우회전해서 달리다 단양·영춘→영춘·구인사 쪽으로 좌회전한 뒤 구인사·온달관광지를 향해 다리를 건너면 된다.
# 묵을 곳·먹을 것 = 단양 읍내에 단양관광호텔(043-423-7070)과 대명단양리조트(043-420-8311)가 있으며 관광펜션으로 다리안펜션(043-421-3700), 티파니펜션(043-422-6221) 등이 있다. 온달관광지에는 식당이 여러 곳 있다. 그중 복천가든은 산채도토리묵밥, 산채정식 등을 내놓는다. 구인사 입구의 장미식당은 사찰한정식으로 유명한데 향토음식경연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경력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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