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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림 시집『내일의 안녕을 오늘에 묻다』: 전원田園에서 피워 올린 생명의 노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6. 18. 23:02

전원田園에서 피워 올린 생명의 노래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시인의 길

 

어느 시인이든 그들의 행로는 대체로 두 개의 방향으로 나눠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끊임없이 전위의식前衛意識으로 자기갱신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변함없이 자신의 하나의 주관을 곧게 이어가는 것이다. 좀 더 부연해서 이야기한다면 이 세계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기법技法의 신선함으로 예술의 창조성을 향해 나가는 길과 오롯이 올곧은 하나의 시선視線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찾으려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길을 가든, 작품의 성패成敗나 우열優劣의 나눔은 의미가 없다.

 

『어머니의 실타래』(2013)에 이은 김명림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내일의 안녕을 오늘에 묻다』는 아마도 후자의 길, 즉, 시인이 축적한 경험과 삶에 대한 내재적 성향으로부터 빚어진 서정抒情의 발로에 온 힘을 기울인 산물로 보여진다. 이와 관련하여 2011년 『열린 시학』으로 등단하면서 밝힌 당선소감을 상기해 본다.

 

도회지에서 자란 내가 뒤늦게 자연과 함께 하면서 농사짓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호미를 들고서야 알았다. 씨를 뿌리고 풍성한 수확을 거둬들이기까지 땀범벅이 되어 생명을 키워내는 일, 어찌 시를 쓰는 일과 다를까. 잡초와 전쟁을 치루고 우주까지 들썩이는 태풍을 온몸으로 막아주며 하늘을 뒤엎을 듯한 세찬 빗줄기와 맞서 싸우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농부의 마음처럼 진솔하고 소박한 그런 시를 쓰고 싶다.

 

농사는 씨 뿌리고 수확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다. 땅은 사람의 욕심처럼 흔들리지 않는 정직한 부동심 不動心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땅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생명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고 양분을 나눠 준다. 농부는 그런 땅의 마음을 알아 뿌린 대로 거두고 감사할 줄 아는 존재이다. 김명림 시인은 그런 농부의 마음처럼, 땅의 정직함을 따라 진솔하고 소박한 시를 쓰겠다고 다짐했다. 그렇다면 진솔하고 소박한 시의 실체는 무엇일까?

 

김명림 시인의 첫 시집『어머니의 실타래』(2013)의 시평詩評에서 이지엽 교수는 ‘시인은 시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와 함께 더불어 웃고 노닌다. 그러면서 간간이 툭 치고 나가는 가벼움에 말의 흰 뼈가 선명하게 빛난다’라고 김명림 시인의 시편을 요약했다. 여기에 덧붙여 ‘시의 재미성과 서민성’을 김명림 시편의 특징으로 꼽았다. 이를 풀어서 이야기 한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빚어지는 작은 에피소드와 그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인 이웃 간의 교감이 시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김명림 시인은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난해한 은유보다는 풍자와 해학諧謔을 통한 시의 재미를 돋보이게 하는 기법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시법 詩法은 오늘날 우리 시단에 주류主流 로 인식되고 있는 탈이성적 脫理性的 이고 어법을 파괴하는 시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김명림 시인의 시류에 연연하지 않는 꼿꼿한 심성과도 맞닿아 있다고 보여진다. 한 마디로 시집『어머니의 실타래』(2013)로부터『내일의 안녕을 오늘에 묻다』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기조는 계속 유지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2. 전원과 도시감성의 혼융混融

 

김명림 시인은 서산瑞山에 살고 있다. 서산이 어떤 곳인가? 높지는 않아도 병풍처럼 산들이 연이어 서 있고. 너른 평야를 거느리고 있으며, 그 평야에 끝자락에 품이 넉넉한 바다를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도시의 편리함과 전원의 느릿함이 함께 공존하는 곳에서 시인은 반평생을 보냈다. 앞의 당선소감에서 밝혔듯이 시인의 반생은 도시에서, 그리고 지금은 도시와 농촌의 경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도농都農 복합의 삶은 ‘도시 / 농어촌’으로 확연하게 구분되던 삶의 양태를 딱히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한 관계로 변모시켰다. 공동체 삶을 아우르던 ‘두레’의 미덕과 냉혹한 경쟁을 당위로 은폐한 개인주의적이고 물질이 우선되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길항拮抗 사이에서 끝끝내 자연을 사랑하고 따뜻한 사람간의 교류를 염원하는 시인의 서정抒情이 사그러들지 않고 더 뜨겁게 불타오름을『내일의 안녕을 오늘에 묻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서정시를 이야기할 때 자연물自然物과 1:1로 상응하는 세계의 자아화를 떠올리지만 김명림 시인에게 있어서의 서정은 단순한 탐미眈美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지 않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아파트 천장을 타고 /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은 / 귀 막고 싶은 안부를 / 늦은 밤까지 전하는’(「층간 소음」) 공동체 삶의 불편함과 소통 부재, 「붉은머리오목눈이」, 「새떼 쫓는 어르신」등의 시에서 보이는 뭇 생명들과의 공존의 문제, 그런가 하면 외딴 집에 홀로 사는 어르신의 스산한 삶을 그린 「삿갓구름」, 이익을 좇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농촌이 겪고 있는 난관을 풍자한 「복주머니 蘭」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감성에 포착된 삶의 풍경은 낙관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고령화 사회에서 오늘날의 농촌의 낭만이 소멸된 것이 아님을 그린 「시골버스 」와 같은 시는 우리가 잃어버린 흥겨운 삶의 소중함을 그린 시로 재미를 더해 준다. 이와 같이 서산瑞山 이라는, 도시와 농촌과 어촌의 모호한 경계의 삶을 탐문하는 시인의 정체성을 함축하는 시 한 편을 읽어보기로 한다.

 

 

삐걱거리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돌절구가 뒤뚱거리며 나와 두리번댔지

툇마루 아래

널브러진 낡은 신발짝들은

생뚱맞은 얼굴로 나를 훑어보았지

세월의 뒤안길로 밀려난 연탄은

활활 불타던 청춘을 그리워하고

이불로 꽁꽁 싸 놓은 수도꼭지는

꽉 막혔던 울분을 터트렸지

갓난아기 울음소리 자주 들리고

외양간 어미 소

송아지 젖 물리고 미소 지으며

강아지 꼬리치고 컹컹대던 곳

온기 잃은 집에도 봄은 어김이 없어

연초록 새싹들이 기지개를 켰지

한쪽 어깨

기우뚱해진 대문을 일으켜 세우고

이제는 세상에 안 계신

어머니라는 문패를 달아 드렸지

 

- 「빈집」 전문

 

인구가 줄어들고,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것이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산간지역을 포함한 농어촌의 현실이다. 경제적 효율이 떨어지고 기후와 같은 자연 현상에 생계를 의지해야 하는 농어촌을 떠나 대도시로 떠난 젊은이들의 부모들은 스스로 빈 집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빈집」은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농촌의 공동화 空洞化를 묘사하고 있는 시이다. 그러나 더 세밀히 이 시를 살펴보면 농경에서 산업사회로 이행되어가는 우리의 불편한 현대사를 더듬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빈 집’이 표상하는 ‘무덤’의 이미지에 덧붙여 모든 생명을 잉태하는 ‘어머니’를 호명함으로써 김명림 시인이 구유하고 있는 정체성이, 결코 소멸하지 않는 생명의 영속성을 긍정함에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시「빈집」은 시인의 추구하는 이상적 세계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것이다.

 

 

3. 나이 듦에 대하여

 

‘소멸하지 않는 생명의 영속성’은 김명림 시인의 첫 시집『어머니의 실타래』(2013)와 이번 시집 『내일의 안녕을 오늘에 묻다』를 관통하는 튼튼한 뼈대임에는 틀림이 없다. 상전벽해桑田碧海, 여기에 덧붙여 8년이라는 연륜年輪이 더해짐에 따라 은연 중에 ‘몸’에 대한 성찰이 함께 동반되어 왔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비문증」,「갱년기」,「 나이 듦에 대하여」와 같은 시들은 시간의 흐름에 변화하는 물질인 ‘몸’의 고백이다. 노화老化는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할 통과의례이다. 얼굴이 장작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갱년기, 안과 질환인 비문증과 같은 불청객을 맞이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느 사람은 늙어감을 한탄하며 슬픔에 잠기고,어느 사람은 성형을 하며 세월의 주름살을 감추려 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 상황으로 나이 듦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잠시 쉬어가자며

세월의 소맷자락을 붙잡는다

- 「갱년기」마지막 부분

 

 

좋아요 다 이해하고 받아줄 테니 책 읽고 글 쓰는 동안만이라도 모두 데리고 여행이라도 다녀 오세요 그것이 안 된다면 잠시 낮잠이라도 재우든지요

 

- 「비문증」 마지막 연

 

이와 같이 김명림 시인은 자신에게 다가온 역경逆境을 농弄으로 받아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세월의 소맷자락을 붙잡으며 쉬어가자고 한들, 쏜살같은 세월을 붙잡을 수 있겠는가? 완치가 힘든 비문증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책 읽고 글 쓰는 동안만이라도 모두 데리고 여행이라도 다녀오라’는 너스레는 슬픈 웃음이면서 순리를 벗어나지 않는 여유인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시를 읽는 우리에게 나이 듦에 대한 성찰을 이렇게 보여준다.

 

춘삼월 소녀들

햇볕 좋은 뜨락에 나란히 앉아

가슴 활짝 열어

몽글몽글 영산홍꽃 피우고

 

초록 나뭇가지에 쉬고 있는

밀짚모자에

노랑나비 한 마리

꽃가루 펄럭이며 놀러 오고

 

생애 마지막 공연 마친 낙엽

늙은 의자에 앉아

갈바람과 인생 이야기 숙연하고

 

나는 흰 눈 소복이 쌓인

항아리 속 김장김치처럼

시큼시큼 익어가고

 

- 「 나이 듦에 대하여」전문

 

항간에 유행처럼 번지던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위안의 진부함을 넘어 시인은 그냥 익는 것이 아니라 이왕이면 흰 눈처럼 세어버린 머리칼 두려워 말고! 시큼시큼하게! 여생을 보내자고 권유한다. ‘시큼시큼’이라는 부사副詞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새큼새큼’도 아니고 ‘새금새금’도 아닌 ‘시큼시큼’은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얼굴이 찡그려지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임을 생각해보자. 이렇게 몸으로 반응하는 삶의 희로애락은 ‘생명을 탄생시켜 / 꽃다지를 만드는 / 뿌리 없는 꽃’(「소금꽃」 마지막 부분)으로 피어날 수 있는 것으로 귀결된다. 소금은 자연의 바닷물과 햇빛으로 만들어지는 생명의 양식이면서 우리에게 완상玩賞의 기쁨을 던져주는 선물이기도 한 것이다. ‘합죽합죽 웃으시는 할미꽃들 / 그 자리 슬그머니 끼어 앉은 나도 / 할미꽃으로 배시시 웃고 있’(「해미읍성 할미꽃 마을」 마지막 부분)다는 자화상은 몸의 늙어감에 대한 비탄이 아니라 시큼해진 삶의 맛을 궁금하게 만든다.

시인의 이러한 행간 사이사이에 슬쩍 내비비치는 재치는 아마도 김명림 시인이 태생적으로 품고 있는 낙관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오래 전 찰리 채플린 Charles Spencer Chaplin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인생은 아름답고 웅장한 것이다. 해파리에게조차도!

Life is a beautiful, magnificent thing, even to a jelly fish!

 

4. 그리움과 외로움을 묻는 시들

 

이렇게 삶의 애환마저도 넉넉하게 품을 수 있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시 「부부」를 읽어 보자.

 

여름이 영글어 가는 시골길

지팡이 짚고 뒤뚱뒤뚱 걷는 어르신

갈지자 좁은 길이 성큼 등을 내주었네

운동 나간 지아비 걱정이 되었는지

꼬부랑꼬부랑 늙은 아내가 마중을 나오는데

누렁이가 길잡이를 하며 앞장을 섰네

처음인 내게 산책하다가 목이 마르면

앵두도 따 먹고 사과도 따 먹으라며

계절의 경계를 성큼성큼 넘나들었네

올해는 가물어도 너무 가물다며

넋두리 한창인데

지팡이는 저만큼이나 앞서 있었네

황급히 뒤따르는 아내의 굽은 등에서

꽃 한 송이 몽실몽실 피어나는데

난생처음 보았네

백년해로꽃

- 「부부」 전문

 

이 시는 저물어가는 노부부의 일상을 그린 작품이다. 정겹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한 모습을 바라보며 시인은 ‘ 난생처음 보았네 / 백년해로꽃’ 이라고 읊조린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지팡이를 짚고, 등이 굽은 노년老年이 어떻게 꽃으로 보이겠는가? 그래도 이 시의 방점은 백년해로에 있다. 백년해로百年偕老는 사전에 이렇게 풀이되어 있다. ‘살아서는 같이 늙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힌다. 생사를 같이하는 부부의 사랑의 맹세를 비유하는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시집 『내일의 안녕을 오늘에 묻다』의 마지막 장 4부는 ‘남편의 자격’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는데, 이 시편에 등장하는 ‘그’는 화자話者(시인)과 백년해로를 약속했던 사람, 즉 남편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사람인가?

 

소꿉농장에 손님이 자주 다녀가신다

두더지 굼벵이 고라니 청설모 새들까지

문지방이 닿도록 다녀가신다

트럭까지 몰고 가을걷이해 가신다

여보 다 빼앗기고 우린 뭘 먹어요?

이 사람아 손님이 먹고 남은 걸 먹으면 되지

그의 땀방울을 닦아주던 봄바람

눈웃음에 꼬리를 쳐도 질투나지 않았다

 

- 「손님」 전문

 

시 「손님」에 묘사된 ‘그’가 전업 농부가 아니라 하더라도 온 정성과 땀을 흘려가며 가꾼 농작물을 약탈(?)해가는 두더지, 굼벵이, 고라니, 청설모, 새들이 마냥 반가울 리는 없다. 그러나 ‘그’는 자연과 그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뭇 생명들과의 나눔과 교감을 넉넉하게 누릴 줄 아는 사람이다. 어디 그것에 그치겠는가? ‘ 몹쓸 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자 / 문병오는 사람마다 / 검은 구름 잔뜩 낀 얼굴로 / 더러는 추적추적 비를 뿌리기도 하는데 / 그럴 때마다 잽싸게 우산을 받쳐주는’(「나이론 환자」) 정 많고 의지가 곧은 남자이기도 하다. 그런 심성을 가진 ‘그’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하인두암이라는 몹쓸 병마病魔로 말미암아 ‘그’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시집의 마지막 장은 ‘그’의 투병의 기록이면서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화자(시인)에게 찾아온 그리움과 외로움의 소회를 그린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이런 정조情調를 형상화한 시들이 많은 까닭에 작품의 수월성秀越性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키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편들을 주목하는 이유는 단지 사랑하는 이의 부재가 가져오는 그리움과 외로움을 표출하는데 그치지 않고 ‘삶에서 소멸(죽음)의 길을 따라가는 모든 존재의 괴로움을 어떻게 극복해갈 수 있는가?’에 대한 시인의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데에 있다. 신앙에의 의지나 깨달음의 달관이 아닌 평범한 생활인이 실행할 수 있는 소박한 하나의 방안을 제시할 뿐이지만 그 울림은 결코 작지 않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만나면 헤어지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아픔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이 세상은 제행무상諸行無常, 끊임없이 소멸과 생성을 거듭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존재의 괴멸壞滅을 앞서서 체득할 수 없다는 것. 이렇게 당연한 일들이, 어느 순간에 쓰나미처럼 밀려와서 결핍의 아픔으로 다가올 때 그 때 우리는 흘러가버린 과거의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던 소소한 일상을 고마워하게 되는 것이다.

 

생선가시 발라 숟가락에 얹어주는

37년 만에 처음 하는 일에

신혼인양 느껴지는

 

- 「하루 또 하루」부분

 

엄밀히 말해 ‘백년해로꽃’으로 피어나는 축복을 누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별의 아픔과 슬픔은 공평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재不在와 소멸消滅로 말미암아 일으켜지는 감상感傷은 시의 품격을 고양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김명림 시편에서 이런 감상을 넘어서는 의식의 일단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몸 속에 독버섯을 키우고 있는 남자들은

내일의 안녕을 오늘에 묻기도 한다

 

- 「내일의 안녕을 오늘에 묻다」부분

 

시인은 말한다. 무엇이든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주어진 삶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 아니겠냐고!

우리는 늘 오늘을 산다. 어제에 사는 것도 아니고 내일을 미리 사는 것도 아니다. 바로 지금, 오늘이 화양연화花樣年華임을 시인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어한다. ‘그’는 백년해로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밤하늘의 별이 되었지만 이 지상에 남은 사람에게 그 별은 언제나 우러러볼 수 있는 그리움과 외로움의 선물이기도 한 것이다.

 

하늘길 떠난 그대

콧노래 흥얼대며

금방이라도 문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

등불 환하게 밝혀

몸속 세포 하나하나 보청기 꽂아두고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썩어 천 년

삼천 년을 이어간다는

주목 두 그루

가슴 속에 심었지요

 

- 「주목」전문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잊거나 내버리지 않고 가슴 속에 나무를 심겠다는 마음은 ‘긍정이 부정을 밀어내고 / 희망이 좌절을 밀어내는’(「하루 또 하루」) 하루 하루를 살아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백년해로를 이루지는 못하였어도 따뜻하고 넓은 마음을 주고 받으며 사랑을 나눠 준 ‘그’는 시인의 마음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흙의 부동심과 땅에 감사할 줄 아는 농부의 마음이 김명림 시인의 바탕인 것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누가 바라봐 주지 않아도

자존심 강한 뿌리 하나로

어설픈 사랑에 고개 숙이지 않을 것이네

 

- 「풀꽃」 마지막 연

 

하찮아 보이는 풀꽃 같은 미물도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법이 없다. 그저 자존심 강한 뿌리 하나로 삶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일이 시인에게 주어진 과업일 뿐이다. 『내일의 안녕을 오늘에 묻다』은 혼탁해져가는 우리의 삶에 필요한 측은지심과 용서와 화해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시집이다.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에 이르기를,‘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거워하는 자만 못하다 知之者 不如好知之者 好知者 不如樂之者’라고 하였다. 김명림 시인은 이 즐거움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다. 즐거움의 요체는 어설픈 사랑이 아니라 자존심 강한 뿌리 하나로 마음을 다하는 진심盡心에 있다. 등단 이후 십 년이 넘는 동안 여러 신고 辛苦를 겪으면서도 삶의 즐거움을 시로 담아낼 수 있는 근력이 시집『내일의 안녕을 오늘에 묻다』에 집약되어 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김명림 시인의 건필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