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내가 쓴 시인론·시평

박순 시집 『페이드 인』:‘나’와 ‘당신’의 경계를 탐문하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10. 17. 15:56

당신의 경계를 탐문하다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페이드 인은 신예新銳 박순 시인의 첫 시집이다. 수많은 시인들이 명멸하는 세태 속에서 시의 참신성, 다시 말해서 주제의 새로움과 그 주제를 형상화하는데 필요한 작법作法의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패기가 시인의 위의威儀를 공고히 만드는 것인데, 시집페이드 인은 신예가 갖추어야 할 당찬 어법 - 다수의 산문시와 올코트 프레싱,달에게와 같은 형식의 실험 -과 앞으로 전개될 시세계를 예감할 수 있는, 현상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일관된 예리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음을 눈여겨 볼만 하다. 박순 시인의 시선은 전통적 서정의 배경이 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거나 사회적 변화에 반응하는 저항의식의 표출에 놓여져 있지 않다. 그는 오직 자신의 존재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까운 타자他者들을 집요하게 탐문하면서 당신의 경계를 탐문하는 여정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또 하나 시인은 시집페이드 인을 통해서 그의 시의 경향성 시인이 지향하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응답으로서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궁극적으로 부조리한 의식意識의 소용돌이 속에서 참되거나 합리성이 구비된 삶이 가능한가의 여부를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을 표명하고 있다.

 

시인은 그의 시 나쁜 시에서 시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고 자신은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을 포장하기 바쁘다고 하면서 또 나는 때때로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며 헛발질만 한다고 고백한다. 무심히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이 토로는 시의 창작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分岐點을 직시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체험과 상상력이라는 시의 질료에 대한 시인의 방향설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시를 창작하는데 관건이 되는 요소인 것이다. , 체험이 결여된 상상력의 전개는 논리의 허약함에 빠질 수밖에 없고, 상상력이 가미되지 않은 체험은 한갓 미담美談이나 넋두리로 빠지는 진술에 그칠 수밖에 없음을 간파하고 허구와 현실체험 사이의 균형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신중하게 자신이 화자話者로 개입하거나 시의 뼈대를 이루는 이야기의 진실성과 개연성蓋然性 -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의 여부를 분명히 결정해야 할 것이다.

 

자신을 비추는 거울인 시와 그 허상을 포장해야 또 하나의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박순 시인은페이드 인전편을 통해 현장감 있는 이야기를 시인 자신이 직접 화자가 되거나 페르소나를 통해서나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지는 서사敍事로 꾸며낼 수 있는 공력을 보여주고 있다. 각각의 시편이 보여주고 있는 상황속의 이야기꾼이 시인 자신이든, 아니면 꾸며낸 허구의 사실이든 상관없이 부지불식간에 그 이야기 속으로 즐겁게 몰입하는 재미를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메리 올리버의 이 말은

나를 지탱해 주고 있다

 

2.

 

그렇다! 오늘날의 시인은 더 이상 선지자先知者이거나 참된 삶을 가르치는 도인道人이 아니다. “언젠가는 오리라는 황금시대나 유토피아는 현실에서는 너무 먼 이야기일 뿐이고 너와 난 / 지금도 / 이분법 놀이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올코트프레싱마지막 연) 세상을 구할 지도자들은 그런데 이 사회 맨 꼭대기 양반은 / 맨 제 잎만 늘리다 매번 감옥에 갔다 오는’(라피도포라부분) 세태에서 믿을 구석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흑과 백만이 존재하는 모순판단의 세상에서, 동지 아니면 적으로 증오를 키우는 혼돈 속에서 시인은 사랑을 키우는 존재로, 그리고 이 이상한 세상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존재임을 자각한다는 것은 참으로 눈물겨운 일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규범이 사라지고 양심이 무너지는 오늘의 삶을 페이드 아웃’ (암전)으로 규정짓는다. 어느 살인사건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는페이드 아웃에서 우리는 죽은 이웃에게 이렇게 되뇌일 뿐이다

 

그녀에게 날을 세웠던 말들을 골라

하나하나 내 가슴에 찔러댄다

너무 늦어버리는 것이 늘 우리들의 방식이다

 

시인은 다시 묻는다. 도대체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또 어디로 삶을 끌고 가고 있는 것인가? 세상은, 역사歷史는 진보하고 있는가? 굳이 우리의 지난 백 년을 더듬어보지 않아도 전통사회의 뿌리 깊은 관혼상제의 풍습과 신분의 세습으로부터 더 나아가서 가부장의 권위주의가 무너지고 있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자폐의 불안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는가!

 

시인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과 현상을 당신으로 명명한다. 그런데 그 당신은 불화와 단절의 대상이다.주목나무와 그 밖의 몇 편의 시에서는 그 당신이 화자話者의 배우자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시인이 지칭하는 당신은 외연外延이 넓은 의미로서, 이를테면 익명사회에서의 불안이나 소외와 같은 의미로 환치할 수 있다. ‘당신이라는 말 속에 등이 살고 있어’(당신이라는 말), ‘하얀 복면을 한, / 의미 없는 얼굴로 / 쳐다보는 당신에겐 용서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아’(소리), ‘도대체 당신은 누군데 왜 날 죽이고 싶어하는데’(안녕), ‘밖에서는 뗄 수 없는 당신을 / 내 안의 창문에다 붙인다’ (엠보싱 비닐), ‘서로 바라보는 곳이 다른’ (0521),‘당신과 나는 이미 사나워지는 것에 길들여졌다’ (카니발리즘)와 같은 구절句節들은 그 불화와 갈등의 원인이 에게 있음을 암유暗喩하고 있다. 타이탄아룸을 읽어보자.

 

칠 년에 한 번씩 꽃 피우는 타이탄 아룸

몸에서는 36도 열을 발산한다

동물이 썩는 냄새가 난다

저 꽃,

칠 년 기다림으로 단 이틀을 견디다

점 하나로 스러져 갈 뿐이다

꽃잎보다 더 큰 기둥만 한 중심을 세우기 위해

시체 냄새를 피웠으리라

어찌 좋은 냄새만 갖고 살 수 있을까

당신과 타협하지 못한 가슴은 썩어 문드러진다

가슴앓이는 악취를 내며 입과 코를 움켜쥐게 한다

누군가는 나의 냄새를 좋아할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튕겨져 나오려는 시간 속에

중심을 세우려 애를 쓴다

 

- 타이탄아룸전문

 

이 시는 당신과의 불화나 갈등이 반드시 당신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 아님을, 오히려 저항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의 생존 방식 때문이라는 자각을 천명하고 있다. 살기 위해 시체냄새를 피워야 하는 는 아주 멀리 가버린 시간의 지층 속에 살아 숨 쉬는 외로움의 주체이기도 하다.

 

나는 알게 되었다

너는 바보였어, 라는 말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열 일곱 살은 지극히 이쁜 나이였다

 

- 궁극적 외로움에 대하여 말하다마지막 연.

 

스스로 바보임을 인정해야 했던 실제로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열 일곱의 는 또한 역한 냄새를 풍기는 타이탄아룸이면서 여전히 자신의 의식 속에 천착한 굴종적 자아를 벗어나지 못하는 수동태의 삶을 버리지 못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나아가서 이러한 천형에 가까운 는 성장하면서 좀 더 수동적 존재로 성숙(?)해 감을 어쩌지 못한다.

 

나는 강아지가 아닌 고양이입니다 손으로 입을 막아도 계속 나오는 하품은 어쩔 수 없네요 어둠이 몰려올 때면 눈을 뜨고 움직여요 사냥을 마친 주인은 곧 퇴근해서 띄띄띄 비밀번호를 눌러대겠지요 앞다리를 치켜들고 주인을 맞이해요 내 뒷다리 쓸개골은 이미 탈구가 되었어요 저녁이면 밥상을 물리고 우린 침대에 들어요 그의 손길을 따라서 이리저리 몸을 뒤집어요 우리는 각자 등을 돌리고 누워요 그제서야 나는 고양이가 되어요 그는 먼 나라로 또 다시 여행을 떠나요 장님이 지팡이 없는 것처럼 내 몸은 비틀거려요 밤낮없이 풀리는 두 눈동자, 지워져가는 생각을 찾아 계속 허공을 긁어대고 있어요 중심이 꺾인 채, 내가 누군지 말해 줄 수 있는 누구 어디 없나요?

 

- 저녁 고양이전문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이 되지 않고, 불신의 검문檢問이 도사리고 있는 익명의 도시에서 애완동물은 장난감 인형을 대체하고 있다. 상업적 목적으로 대량으로 번식되고, 거래되면서, 병이 들면 버려지는 동물들은 자신들의 품성을 잊어버려야만 생존할 수 있는 유폐의 방에 갇혀 있다.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권태와 외로움에 둘러싸여 있다가 주인이 돌아오면 잠시 놀이감이 되어주는 고양이는 본래 야행성 동물이다. 그러나 저녁이 되어도 그들은 사냥을 갈 수 없고 담장을 뛰어넘고 소리를 지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다. 고양이는 묻는다. 아니, ‘는 나를 야성野性의 고양이로 불러주는 당신을 찾고 있는 것이다.

 

3.

 

저녁 고양이는 타자화 他者化를 본래의 ’(고양이)로 되돌림으로써 서로 소외 되고 있는 당신과의 관계를 원만하고 평화로운 상태로 만들기를 희망하는 현대인의 정체성을 묻고 있는 것이다. 정체성은 무엇인가? 정체성正體性(identity)은 다양한 상황에서 유지되는 가치관, 행위, 사고의 기본적인 통합과 지속성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의식과 독특성이라고 정의 된다.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여야 할 합당한 이유를 체득함으로써 우리는 자신만의 방식대로 주체적인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이나 사랑, 성공의 기준이 표준화되고 상식화되는 사회에서 불편부당하고 온유한 삶을 구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은 태어나면서 경제적 여건을 기반으로 하는 가족 간의 훈육과 교유와 같은 환경의 지배를 받으면서 각자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평생 동안 구축해 나가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에게 강요한다고 잊고 잊혀질 수 있을까

저마다 기억의 방식을 달리할 뿐,

견디고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다

여전히 그림자로 남아 시간의 곁에서 서성이고 있다

 

- 레드, 블랙마지막 연

 

위와 같은 언명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에게 던지는 기억의 총체總體가 투사投射하는 삶의 족쇄를 냉철하게 바라보는 진리에 가까운 아포리즘이다. 따지고 보면 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족이라는 당신들의 그림자를 의식의 저변에 유령처럼 안고 사는 존재이다. 시집페이드 인은 허구이든 실제이든 가족사 家族史로 간주할 수 있다. 어머니가 등장하는 시편들인 화장연작시,가새,맵시리, 아버지를 다룬 물자라,치매연작시, 아들에 관련된, 삼촌의 죽음을 다룬 어떤 호상, 조금 관점을 달리하지만 가족폭력을 다룬마리오네트, ‘를 둘러싼 가족들은 오늘에 이르러 당신으로 의 의식 속에 내밀한 슬픔의 폭렧성으로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거꾸로 오늘의 는 지난 시간 속에서 타자화된 당신으로 뒤바뀌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결 같이 그들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존재들이다.

 

아버지는

계단을 오르다 자주 길에서 굴렀다

관절이 고장 난 아버지는

해가 뜨면

밤새 앓던 자리 털고 다시 지게를 짊어졌다

 

어느 한 날,

오르막길 빙판에서 다시 넘어진 아버지는

등껍질 속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 물자라부분

 

서른 여섯 살에

가장이 되어야 했던 엄마는

빨갛게 불붙은 연탄화덕을 늘 들고 다녔다

 

어느 한 날

장사를 나가다

연탄화덕을 들고 계단에서 굴렀다

 

- 화장1, 2

 

간략하게 몇몇 시의 구절을인용한 바와 같이 시집 속의 가족사는 삶의 애환으로 얼룩져 있다. 불혹不惑을 넘기지 못하고 노동의 완력에 무너져 일찍 돌아간 아버지와 글 대신해 가계를 떠맡아 육 남매를 홀로 키워낸 어머니는 여전히 기억의 깊은 얼룩으로 남아있다.

 

나도 엄마를 닮아

매운 고추를 매운 고추장에 푹 찍어 먹는다

시어른께 말 한마디 못하며 꾹꾹 참으며 살아가고 있다

 

-맵시리4

 

이 글의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역경을 이겨낸 미담류 美談類의 시는 자칫 진술로 흘러갈 위험이 크다. 그러나 시인이 내놓은페이드 인의 가족사는 단순한 회고나 상찬의 목적으로 창작된 것이 아님을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누구도 삶의 신고辛苦를 비롯한 불행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누구나 한번은 회자정리 會者定離의 아픔을 겪고 그 아픔을 극복하려는 열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박순 시인이 그려내고 있는 가족사는 어디까지나 가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존재를 지향하거나, ‘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탐문하기 위한 디딤돌이다. ‘의 삶에 알게 모르게 틈입闖入당신으로부터 해방됨과 동시에 진정으로 당신과의 동등한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한 여정의 시작인 것이다. 가족은 한 생애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억압과 평균적 규범을 끼치는 존재이다. 코이에서는 이와 같은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세상을 쫌 알고 있다는 나는

여전히

눈을 끔벅이며

입을 빠끔거리며

주는 먹이만 신나게 먹으며

어항 속에서 꼬리를 살살 흔들고 있지

어항 밖은 눈길도 주지 않지

 

- 코이마지막 연

 

부모로서의 희생과 사랑은 반드시 자식에게 하나의 교범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형제간의 우의는 때로는 그들 간의 경쟁과 질투로 변질되기도 한다. 시집 페이드 인그러한 상황이 제시되지는 않지만, 범위를 좀 더 넓히다 보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정치사회적 공동체의 균열과 대립의 심화를 목격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가족닮은꼴(family resemblances)이론을 통해서 가족 구성원 간에는 어떤 두 사람도 꼭 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주장했다. 가족들은 여러 특징들을 서로 나누어서 공유하고 있을 뿐이다. 육체적인 특질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거나 심리적인 특질, 또 가족적인 관습이나 문화적인 특질들 가운데 몇몇 가지에 대해 구성을 달리하면서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전통적인 유교사회의 효제孝悌의 관습은 부모와 형제 간의 권위와 위계位階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페이드 인아버지로 상징되는 권위의 파급이 아닌, 그 힘이 소멸로부터 비롯되는 결손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음을 주시해볼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시집페이드 인이 구축하고 있는 가족사는 따라서 한 편의 확장된 알레고리allegory로 읽어야 마땅하다. 현대사회는 과거의 관습과 규범의 해체가 이루어지고, 삶의 가치기준이 다양하게 퍼져나가는 익명의 사회이다. ‘당신은 비대면의 환상의 망으로 접속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상황을 잘 드러낸 시 한편을 읽어보자.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닫힘 버튼을 잽싸게 누른다

5,4,3,2,1

너를 열지 못한다

 

행복한 인간관계라는 동영상을 보려고 하는데

‘5초 후에 광고를 건너뛸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뜬다

화면 밖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머물러 있다

skip을 나도 모르게 자꾸 눌러댄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첫 인상이 결정되는 시간

바로 너였다

5초를 잘못 선택한 나는 오늘도 헛다리를 짚고 있다

 

난 오늘도 5초를 誤搊처럼 해석하고 있다

 

- 오초전문

 

오 초만에 결정되는 관계의 호불호好不好행복한 인간관계의 허상을, 다시 말해서 삶에서의 기다림과 그리움의 시공간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당신의 경계조차 존재하지 않는 불통不通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시집페이드 인은 어둡고 슬픈 이야기로 가득하다. ‘당신으로 상징되는 삶의 조각들은 하나의 그림판으로 모여지지 않는다. 무엇인가 부족하고, 외로워지기도 하는 시편들은 어떠한 낙관 樂觀도 허락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 시집은 자아를 잊고, 잃어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투명하게 바라보게 하는 각성覺醒의 시간을 선물해준다. 시집명이기도 한 시 페이드 인은 겨울 빙폭氷瀑의 정경을 통해서 혼탁하고 지리멸렬한 삶을 어떻게 곧추세워야 하는지, 매서운 겨울이 쉬임없이 달려온 삶의 물줄기를 멈추는 휴식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예지를 보여주고 있다.

 

물줄기는 지그재그로 흘렀다. 무모하게 뛰어내렸다 절벽 앞에서 뒷걸음치고 싶은 날도 있을 것이다 부딪치고 튕겨져 나왔다 무른 바위의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시간은 계속된 지 오래 서로는 파편이 되어가는 시간에 충실했다 어느 한 날 폭포는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얼어붙었다 산짐승의 이빨을 닮은 폭포는 바닥을 향해 매달려 있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폭포와 바위는 뜨겁게 엉겨붙었다 경계를 감춘다 겨울은 마취의 계절이다 눈을 좀 붙여보는건 어때? 한숨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 봄은 서로의 경계를 드러내는 통증의 시간 입술 위에 봄을 올려 놓는다, 그 환한 봄을,

 

- 페이드 인전문

 

페이드 인 fade-in’은 연극이나 영화에서 화면이 점점 밝아지는 기법을 말한다. 어둠에 묻혀있던 물상物象이 그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하고, 지리한 절망의 터널에서 막 빠져나오는 희망의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페이드 인이 보여주는 불안과 격절의 감정들은 페이드 인’(밝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사유의 여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부정 否定이 결여된 긍정은 외화내빈 外華內貧의 궁색함을 면하지 못함을 기억한다면 박순 시인이 등단 5년 만에 내놓은 시집페이드 인은 불화의 세계를 탐문하며 이 시대가 설정해 놓은 당신의 경계가 높은 벽이 아닌 사서로 가슴을 맞대는 울타리로서 존재할 수 있는 지를 묻고 있다고 보아도 무바방할 것이다. 신예 新銳로서 새로운 어법을 실험하는 도전의식과 변증법적 사유의 통로를 따라 긍정에 이르려는 시도는 시페이드 인한 편에 성공적으로 압축되어 있다. 어쩌면 시집의 시편들을 페이드 인의 부록이라고 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듯도 하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사랑하고 질문하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