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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소 시집 『수업시대』 : 현실과 몽상에의 반역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10. 1. 00:08

현실과 몽상에의 반역

나호열

 

1.

 

그곳은 먼 곳이다. 고비사막보다도 멀고 은하계 저 너머보다 아득하다. 특별한 일이 없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첩첩한 산골짜기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거나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는 사람들이 그 곳에 있다.

강원도 태백에서 시인 권혁소는 그렇게 산다.

 

한 때는 산업혁명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도구로, 에너지의 보물로 취급되던 석탄지대, 그러나 지금은 공해의 주범으로서 천덕꾸러기가 되어 도시 서민의 시린 등짝을 덮혀주는 소모품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사양화되어가는 구시대 산업의 중심지에서 시인 권혁소는 풋풋한 석탄기의 언어들을 캐내어 시로 달구어내고 있는 것이다.

 

A. 토인비는 그의 저서 역사의 연구에서 문명이란 인간의 생존을 향하여 압박해 들어오는 여러 조건들을 극복하기 위한, 즉 도전에 대한 응전의 형태로서 점화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규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안락하고 풍요로운 조건을 충족하는 지역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에 심각한 위기와 극복하기 힘든 조건이 더 많은 지역에서 오히려 인간은 창조력을 발휘하고 생존의 보지능력 保持能力을 배가해 나간다는 것이다.

 

사실 권혁소가 은밀히 바깥세상을 향하여 보내고 있는 절망의 징후들은 이미 도식화되거나 진부해져 버려서 더 이상의 충격적인 심상을 전개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검색하고 있는 절망의 징후들은 이미 많은 시인들의 현학적인 수사와 예언자적 웅변에 의해서 충분히 설계되고 건축되어버린 낡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시인을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그가 철저히 시적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상상력을 신봉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다 현실의 평범한 진실을 끈질기게 붙잡고 있다는 인간적 신뢰감에서 비롯한다. ‘석탄은 왜 검어야 하는가?’하는 질문보다 그는 지금, 이 곳의 석탁은 검다라는 사실에 유의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는 분명히 절망하고 있지만 그 반복되는 절망의 틈새에서 희망의 실낱같은 불빛을 일구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신념화하고 있는 점에서 우리는 이 시집의 진면목을 새로이 접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보는 것이다.

 

 

2.

그의 시들은 단단하게 묶여진 채 누런 봉투에 감춰져 있었다. 아마도 태백선 야간열차에 실려 왔으리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까지 나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 바로 이 사실이 그의 시에 대한 객관적 인상을 확정지어줄 수 있다고 적이 안도한다. 간단히 기술된 약력에서 보이듯 그는 강원도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학교를 마쳤으며, 지금도 태백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음악교사이다!

 

60년대 시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굳이 들추어 본다면 민족 분단의 상황과 바람직하지 못한 국내외 정치적 상황에 깊숙이 연루되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앞 선 세대의 문학적 토양이나 성과가 포괄적이고 우회적인 반면에 그들은 좀 더 구체적이고 직정적인 세계로 그들의 인식과 행동을 일치시키려 시도하고 있다. 말하자면 억압적 상황에 대한 반발로서 폭력적인 언어구사를 행하면서 선 세대가 가꾸었던 보호구역을 과감하게 뛰쳐나오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그들은 좀 더 분석적이고 따라서 조금은 더 위험하다. 권혁소 시인도 바로 그러한 동년배 시인들의 대열에서 크게 이탈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그러한 단초는 몇 편의 시에서 명료하게 발견될 수 있겠는데 대체적으로 시집을 관통하는 얼개는 분단과 독재라는 씨줄과 날줄로 얽혀져 그의 시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겠다.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에 걸린 적이 없는,

더구나 해적의 올가미를 용케 빠져나온

내 시는 민중시가 아니다 더욱

주간지 분홍 스캔들 하나 만들지 못하는

내 서정시는 이미 조루증에 걸렸다

이도 저도 아닌 내 시는, 그렇다

좆두 아니다

좆같은 세상

그래도 쓴다

 

- 이도 저도 아닌 내 시는전문

 

그가 꿈꾸고 지향하는 세계는 서정시를 향유할 줄 아는 사회이다. 그러나 당대의 여러 상황들은 시인들을 끊임없이 가롯 유다로 만들면서 안락한 흔들의자에 앉아 있게 하지 않는다. 그의 인식에 의하면 이 시대는 민중시를 쓰게 만들고 또 쓸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민중을 억압하는 정치적 제도가 엄연히 존재하고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다. 편협한 이데올로기의 산물인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이 마치 거대한 공룡처럼 민중을 공포와 원망으로 무기력하게 만든 상황에서 그나마 공룡을 무찌를 바늘이 될지언정 결코 글 쓰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언명은 차라리 절규와 다름없어 보인다.

 

광주를 혁명이라 말하는 날

아침이슬이 교과서에 실리는 날

미국은 원수였다고 가르치는 날

금강산 함께 꽃구경 가는 날

그런 날의 밥상

빨리 받고 싶다

 

- 그날전문

 

인간정신의 정점은 아마도 희망을 알고 희망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희망이라는 추상명사의 뿌리는 현실과 절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왜곡되어 있는 역사적 진실을 제 자리로 돌려야 한다는 인식이 그의 시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는 바, 비록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광적인 내쇼날리즘nationalism에 경도되어 있는 듯한 부담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은 민중을 억압하는 사슬에 대항하기 위한, 민족 분단을 주도한 외세에 굴복하지 않기 위한 무기로서 현실을 신념으로 치환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하나의 희망 갖기, 희망 나누기의 도구로써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의 시의 출발점은 극명하게 인용한 두 편의 시에서 드러나고 있거니와 권혁소 시인이 스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세계관은 보다 나은 장치나 개선에 의해서 뒤바뀔 수 있고 유연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앞 서 이야기 했듯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다라는 사실은 시에 있어서의 완성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담기 위한 그릇이고 또 반드시 그릇에는 내용물이 담겨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권혁소 시인이 그리고 있는 풍경 속의 그림을 찾아나서는 일은 앞으로의 시 세계를 열어가는데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3.

 

이 시집은 시인의 의도에 따라 4부로 나뉘어져 있다. 다시 크게 편가름을 해 본다면 탄광으로 상징되는 공간적 상황과 그 공간을 횡단해 가는 불안한 시대적 불안에 대한 반항과 새로운 길찾기의 편린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면 틀림없겠다.

조금 더 세밀히 관찰해 본다면 석탄이라는 사양산업의 끄트머리에 목숨을 내달고, 진폐증에 태반이 노출된 채로 그러나 더 이상 물러서거나 탈출할 곳이 없는 사람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의 희망일 수밖에 없는 후손들의 교육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감당해 내야 하는 시인의 좌절과 분노가 집중적으로 그려져 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불길한 징조는 빠른 속도로 다가와서 부의 집중현상과 가난과 무지의 세습화가 강습할 수밖에 없다는 허무감으로 온 국민에게 번져 있고 악순환의 고리는 교육이라는 신성한 현장에까지 오염되어 있다.

4부에 수록되어 있는 광부의 노래 1, 광부의 노래 2, 겨울 탄광촌의 시편에는 소외된 사람들의 말없는 표정들이 마임처럼 펼쳐져 있다.

 

갱 속에서 캐는 돈은 힘이 없다

피를 토하듯,

밤에 젖은 인고의 작업복을 빨 때

- 겨울 탄광촌일부

 

 

진폐증은 교육되지 않고

 

... 하략...

 

이제 아이들은 더 이상

광부인 아버지를

자랑스런 산업역군 미래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자랑하지 않는다

 

- 광부의 노래 2일부

 

빈 도시락 흔들며 퇴근을 한다

새들이 깃을 치는

황혼의 아침 무렵

- 광부의 노래 1일부

 

 

그들이 직장에서 캐올리는 석탄은 연탄가스의 주범이고 오존층을 파괴하는 원흉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노동의 대가는 갱 속에서 캐낸 돈은 힘이 없고단지 소수의 자본가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무의미한 행위인 것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근무시간은 일상인들의 근무시간과는 확연히 배치되며 그들의 작업 현장은 아예 처음부터 복지와는 관계가 없는 암흑의 불모지인 것이다.

더욱이 자식들에게조차 존경받지 못하는 상황은 극도의 패배의식과 허무의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혈육을 통해서 간접적인 탈출을 꿈꿀 수 있을 뿐이다.

소외된 집단에 속한 탄광지대의 아이들은 부모세대에 비해 좀 더 다양하고 구체적인 꿈을 가지고 있다.

 

수업시대 10 2학년 1에서 보이듯 그들은 고압가스기사 시험을 준비한다든가 성악가가 되고 싶다든가 목사의 아들이기 때문에 담배를 피울 수 없다든가, 자퇴를 결심한다든가 하는 여러 형태의 꿈을 지니고 있으며, ‘그래도 애들은 밝아 보인다 / 좀 더 배웠고, 좀 더 일찍 나서 선생이 된 나보다라는 진술에서 보여지듯 희망을 가진 존재들이다. 더구나 그들은,

 

대학진학이 곧 우리들 삶의

절대절명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아니지요

그저 배워 익히어 왔을 뿐인 우리를 제발 견주지 말아주세요

 

- 야간자율학습일부

 

라고 당당하게 그들의 의사를 표명할 줄 아는 당참도 가지고 있다.

선생이 가르치는 행위는 그들의 행동에 의해서 설득력을 잃어가고 오히려 선생인 자신이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경우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진술에 의해 드러난다.

 

무조건적으로 유신이 출제됐고 / 칭찬받기 위해 나는/ 열심히 외웠다 비겁의 세월은 죽은 듯 계속되고

 

- 수업시대 8 일부

 

그런데 정작 시인의 시야에 들어온 관심은 그것을 넘어서 있다. 학교 교육이 목적하는 바에 따라 교육적 여건이 성숙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교육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야말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요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정당성을 주장한다고 모든 것이 정당해 지지는 않는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 수업시대 11

 

라는 극단적인 패배주의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현실을 그대로 모른 채 지나쳐 버릴 수가 없다. 몇 편의 시에서 얼핏 드러난 바에 의하면 전교조 사태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는 듯 싶고,

 

문제교사였다가

민주교사였다가 결국은

노조교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일부

 

그러나 어찌된 까닭인지 아슬아슬하게 해직을 모면한다. 결국은 나약한 지식인의 전로를 답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패배의 굴레를 씌우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가 국··수 과목의 시간에 버금가는 음악시간을 배정받아서 정선 아리랑과 판소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칠 꿈을 버리지 않는 한, 또 한 그가 끝까지 시 쓰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올바르게 시행되어야 하고 그 선봉에 선 교사들은 누구보다도 투철한 교육자의 양심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참모습을 구현해야 한다.

 

이 시대

배운다는 것은 고통을 익히는 일일지라도

우리는 좀 더 정직한 모습으로 이 땅에 서자

 

- 수업시대 8

 

그러나 오늘날의 교육현장은 어떠한가. 열악한 교육환경과 주입식 교육의 결과는 표준화와 규격화라는 큰 틀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어 왔다.

개개인의 능력과 특성에 맞추기 보다는행동발달 상황의 시에서 보여지듯 설정된 목표에 학생들을 꿰맞춰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진실을 말해주고 참 삶의 일면을 일깨워주고 싶은 소망은 현실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하다. 수업시대 11에 극명하게 표현된 바와 같이 오늘날의 학교는 무사안일과 팽배한 획일주의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져 있다.

 

4.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현대사는 급속한 공업화와 그에 따른 자본주의의 팽창, 무비판적인 외세에의 경도 傾倒, 독재정권의 발흥 등으로 얼룩져 왔다. 그러한 현상들은 우리에게 인본주의의 붕괴, 부의 편중, 공해, 분단 고착 등의 바람직하지 못한 선물을 던져주었다. 사회학적 방법론에서나 정치이론으로도 해명될 수 없는 한국적 특수 상황을 검증하지 않은 채 사회주의 이념에 대입하는 방법은 좀 더 과학적이고 합리성이 강화된 문학적 인본주의로 대치되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수단이나 도구화될 수 없다. 극단적인 이데올로기는 계층간의 갈등이나 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는 없다. 문학적 효용성이라는 측면에서 창작하는 행위는 독자들에게 리얼리티와 함께 합리성 rationality를 동시에 줄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을 향수한다는 것은 느슨한 정신의 풀림을 긴장으로 바꾸어 주고 정서의 건강성을 확보한다는 것과 일치한다.

권혁소 시편에 있어서의 강점은 극도의 패배감과 분노의 시뿐만 아니라 절제된 언어구사를 통한 서정성이 두드러진 시들이 상당수 발견된다는 점일 것이다. 시학에 있어서 고전적인 압축미와 서정은 권혁소 시인에게 있어서 새롭게 빛나고 있음을 본다.

 

기억이 새로운 유월의 빛 아래

보랏빛 감자꽃은 핀다, 피어서

어머니의 과거를 되짚게 하고

슬픔으로 이르는 길 다리가 된다

 

개울에 나가 세수를 하다가

문득 바라본 밤 아홉시의 하늘

감자꽃 같은 별이 뜬다

우리들의 것일 수만은 없는

저 푸른 유월의 꽃들

- 감자꽃전문

 

이 시에는 인간을 조건지우는 치장물들이 모조리 사상되고 기억과 감각, 그리고 무의미해 보이는 자연의 호흡이 간절하게 맞아 떨어지고 있다. 대상들의 무의미화는 오히려 미적 공간의 확대 공간을 가져 온다. 시 겨울 두타산에서 보는 바와 같은 한 겨울 /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은 돌뿐 /....../ 무엇을 기다리는 것은 / 미련한 인간 뿐이다이 잠언적인 진술은 초월과 친화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인간과 대비시켜 진정한 휴머니즘의 무가치와 무의미화에서 이루어짐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만기의 조잘대는 입보다

이봉걸의 말없는 큰 키가

맘에 든다 나는

상대방이 샅바를 바꾸어 잡을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가

충분히 긴 팔을 뻗어

적당히 들었다 놓는 그는

인간 장대나 기중기가 아니며

지폐보기를 낙엽같이 하는 그런

그런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정치가보다 매스컴보다 정확한 그는

모래판에서만 힘을 행사한다

그는 다만 쓰러지지 않으면 쓰러져야 하는

잊어서는 안될

한 시대의 슬픈 풍속도일 뿐이다.

 

- 이봉걸전문

 

이 시는 시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다분히 산문적이고 다소 어눌해 보인다. 마지막 시행이 그가 의도하고 있는 이야기 하고 싶은 핵심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앞 행들의 진술은 충분히 압축되거나 의미화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확연히 드러나지 않은 의 실체를 표현하는데는 위와 같은 모호성을 지닌 인물들이 더 적절한 방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영웅을 기다린다. 험난한 역사, 시대상황에서는 힘 있는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이 시대의 힘있는 사람들은 아무 곳에서나 아무데나 함부로 힘을 이용한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힘 있는 자가 아니다. 이봉걸은 프로씨름 선수이다. 그의 힘은 장대하고 그 힘을 이용하여 돈을 번다. 그는 상금을 노리고 이기기 위하여 전력투구한다. 그러므로 그의 힘은 모래판 위에서만 분출된다. 오히려 이봉걸은 힘(권력)을 남용하는 자들보다는 정직하지만 그 힘을 민중모두를 위하여사용하지 못함으로 해서 우리가 바라는 영웅은 되지 못한다. 시인의 표현대로 한 시대의 슬픈 풍속도로 존재하는 양극의 힘이 부초처럼 떠도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레고리화한 능력은 앞으로 권혁소 시의 향방을 예감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시사해 주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5.

 

대략적으로나마, 권혁소 시인의 단면을 훑어보았다. 이제 우리는 현재까지의 시적 성과를 기초로 해서 권혁소 시인이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서 이야기할 시간이 된 것 같다.

 

루소는 일찍이 인간은 자유인으로 태어났으나 어디서나 사슬에 묶여 있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 구성원 상호간의 질서와 위계를 계약함으로써만이 파멸을 모면하고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패배는 앞으로의 승리를 위하여 예비되는 것이고, 모든 분노는 화해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코 패배의식과 그에 따른 분노만으로 합목적성 合目的性을 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페넬로페의 베틀의 고사를 잠깐 인용해 보자.

 

돌아오지 않는 오딧세이를 기다리는 페넬로페는 자신을 유혹하는 남자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낮에는 피륙을 짜고 밤에는 그 피륙을 풀어내는 일을 반복한다. 어쩌면 그 일은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딧세이가 반드시 돌아온다는 신념을 가졌기에 페넬로페는 반복되는 노동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고 결국 그 신념은 현실화되었다.

 

우리가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면 권혁소의 시는 페넬로페의 베틀이 되어야 한다. 석탄기의 무성한 식물들이 석탄이 되기까지의 시공 時空을 권혁소 시인은 자유롭게 드날들 수 있다고 믿는다. 권혁소 시인의 언어는 막장에서 막 캐어 온 원탄과 같이 단단하고 완고하다. 무엇이 되기 이전의, 원초적인 순수함이 깃들어 있다. 바로 이 점이 권혁소의 당찬 미래를 확보해 주리라 믿는다.

 

이제 권혁소는 새로이 출발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먼 길을 가는 길동무가 되는 빛나는 시들이 태어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사는 일은 끊임없는 고통이며 고행인 것, 수없이 많은 패배와 굴종을 강요받는 것, 그런데 인간은 왜 사는가. 그 무엇에 대한, 어떤 신념과 믿음으로? 우리는 늘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며 산다. 때론 가혹하게, 때론 한없이 여리고 따스하게......

 

 

 

권혁소 시인의 수업시대19908, <예진시선 5>로 출간되었다. 첫 시집논개가 살아온다면에 이은 두 번째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