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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시에서의 창의성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8. 8. 1. 00:49

시에서의 창의성

나호열

 

1.

『산림문학』을 읽는 즐거움을 이야기하자면 그 어느 문예지보다도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마음껏 만날 수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거기에 마음을 울컥하게 만드는 작품을 마주할 때 한 계절이 더없이 충만해지는 기쁨도 누릴 수 있다. 또 하나 『산림문학』에 가입되어 있는 시인들의 작품을 매 호 마다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매우 익숙한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직접 대면하지 않았어도 여러 해 작품으로 만나고 기억되는 시인들이 곁에 있다는 생각에 친근함도 느끼게 되는 것이다.

 

2018년 봄호에 실린 마흔 다섯 분의 시인들 중에 작품으로 처음 만나는 분들이 거의 없는 것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시의 창의성과 각 시인들이 지닌 품수 稟受를 헤아려 보게 되기도 한다. 『산림문학』이 지향하는 생명존중과 생명존중의 함의가 오롯이 살아 숨 쉬는 자연에 대한 탐구가 일반화된 완상 玩賞에 그치지 않으려면 어떤 조건들이 갖춰져야 하는가? 생명과 자연을 바라보고 숙고하는 시인에게 일관성이란 과연 필요한 것인가? 하는 점들이 이번 글의 주요 主要한 생각꺼리이다

 

예술 일반에 통용되는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는 -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묘사할 때 친숙하거나 새롭지 않은 언어, 사물, 관념, 상황을 두드러지게 돋보이게 하여 보는 사람에게 일종의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기법. 러시아의 형식주의자 빅토르 보리소비치 시클롭스키(Viktor Borisovich Shklovsky)가 제기한 이론[Daum백과에서 인용] – 으로 시법 詩法에 있어서도 매우 유용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낯설게 하기는 주제나 형식, 그리고 비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겠으나 잘못 사용하게 되는 경우 자칫 감상을 넘어서 해석이 불가능한 말장난에 머무르고 마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렇다면 이 ‘낯설게 하기’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다르게 보기’로 바꿔보면 어떨까? ‘다르게 보기’란 일반적인 상식 치원이 아닌 새로운 관찰로부터 시작되고 참신한 비유로 끝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쓰는 시의 언어가 모호성이 아니라 애매성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때 시는 한결 도드라지는 창의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또 하나, 우리가 한 시인이 지니고 있는 세계관이 ‘다르게 보기’의 통로를 따라 구현된다면 우리는(독자) 새로운 우주 하나를 가슴에 품게 되는 것이 아닐까?

2.

 

 

2018년 봄호에 게재된 45편의 시편 중에서 ‘나무’를 소재로 시상을 전개한 몇몇 작품을 ‘다르게 보기’의 사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냥 산다」 (김동수), 「원대리 여자들」(윤준경), 「예언자들」(이인평), 「팔만대장경」(주로진)등은 나무로부터 상징되는 수직성(올곧음), 고정성(끈기)등의 관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삶의 진경을 보여주는데 성공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냥 산다」 (김동수), 「예언자들」(이인평)은 나무를 관찰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전형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나무들처럼 산다

길가에서

 

비를 맞고

폭풍을 맞아

 

부러지고 휘어진

나무들처럼 산다

 

봄 여름 을 지나

어느 가을

 

바람에 떨어져 나간

열매들처럼

 

한 겨울

눈 속에서 그냥 산다

 

그것이

신 神의 뜻인 양

 

이듬해

또 싹을 틔운다.

 

-「그냥 산다」전문

 

나무는 예언자들

하늘과 땅을 말해준다

과거와 미래의 현상을 알려준다

 

뿌리는 땅의 소리를 들려주고

가지는 하늘의 소리를 들려준다

나무에게 귀를 기울이면

새소리, 벌레소리로 들려주는

나무의 언어들

 

나무가 숨을 쉬니 산이 숨을 쉬고

나무가 말을 하니 산울림이 안긴다

 

“들어라, 인간들아!”

큰소리치지 않아도 들려주는

예언자들의 소리

 

나무가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산이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한다

 

- 「예언자들」전문

 

이 두 편의 시의 얼개는 복잡하지도 세밀한 비유도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의미심장한 매시지룰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냥 산다」의 나무는 길가에, 「예언자들」의 나무는 산중山中에 산다. 길가의 나무는 미관의 장치로 인위적으로 심어진 경우가 많다. 이른바 가로수들은 너무 무성해져서 신호등을 가리고 표지판을 덮어버린다는 이유로 봄이면 전지剪枝의 대상이 된다. 가을이면 환경미화원의 기운을 빼는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 가로수의 운명에 슬쩍 우리네 삶을 끼워넣고 그렇게 순리대로 살자고 슬픈 너스레를 떤다. 그러나 이 시의 묘미는 마지막 연의 반전에 있다. ‘이듬 해 / 또 싹을 틔운다’는 결구結句가 반야般若의 의미를 일깨우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예언자들」의 나무는 깊은 산중에서 둔중한 침묵을 깨달은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아웅다웅 삶의 굴레에 갇혀 사는 우리에게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꾸짖음을 들려주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나무를 의인화 한 작품으로「원대리 여자들」(윤준경), 「팔만대장경」(주로진)을 눈여겨보게 된다.「원대리 여자들」는 강원도 인제의 자작나무들을 ‘여자들’로 다르게 본다. 시의 주조는 목가적이지만 주목해야 할 대목은 그런 시의 낭만성에 있지 않다. ‘일인칭의 독자적 진술을 거부하고/ 다만 숲이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되어/ 가슴과 가슴의 적당한 거리로 / 푸른 머리 향기롭게 날리고 있다’는 진술은 읽는 이에게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해 보아야 할 여지를 남겨주고 있는 것이다. '남성/ 여성'으로 규정된 사회적 규범에서 비롯된 편견과 의무에서 벗어나 본연의 ‘인간’을 꿈꾸는 자유의 상징으로 치환된 자작나무를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요즘 세간에 떠돌고 있는 여성을 둘러싼 여러 현상들의 진의는 한 마디로 말하면 섹슈얼리티 Sexuality 의 성 이 아니라 사회적 성 즉, 젠더Gender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외침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팔만대장경」(주로진)은 그동안 시인의 시 몇 편을 일별한 입장에서 주관적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동안 시인이 추구해왔던 세계관을 한층 상승시키는 역작力作이라고 토로하고 싶다. 외침 外侵에 의해 풍전등화의 국운 國運을 오직 불력 佛力에 의지하고자 했던 천 년 전의 슬픈 역사가 담긴 팔만대장경 목판으로 몸을 바꾼 ‘산벚나무’를 만날 때 다음과 같은 진경 眞景에 전율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깎고 또 깎고

한 글자 한 글자 몸에 경문을 새긴다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 팔만대장경이 되어

해인사에서 참선하고 있다

천 년의 숨결, 천 년의 등불이다

 

- 「팔만대장경」3 연

 

‘산벚나무’가 스스로 목판이 되기 위해 자신의 몸을 깎는 광경을 상상해 보자. 그 나무는 천 년 전에 이미 그리되었을지도 모르고, 해인사 어느 산등성이에 지금도 서 있는 산벚나무가 온갖 풍상을 겪으며 스스로 참선하면서 팔만대장경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닿아야 할 삶은 ‘바람이 스치고 간 자리, 한 침묵이 정좌하는’ 그런 경계가 아닐까하는 묵직한 상상에 잠길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살아 있는 산벚나무와 천 년 전 팔만대장경이 되기 위해 소금물에 절여졌던 그 산벚나무는 다른가? 아니면 같은 것인가? 시「팔만대장경」은 그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은 아닐까.

3.

 

 

이외에도 눈길이 닿은 시 몇 편이 있는데 박수화 시인의「산」, 박수빈 시인의 「바람의 슬하」, 박일소 시인의 「멸치쌈밥」, 한경 시인의 「겨울 감옥」를 놓치고 싶지 않다. 「산」은 산문으로 이루어진 3연의 장문의 시로 ‘산’의 거대한 이미지를 세밀하게 묘파한 형식의 실험이 ‘다르게 보기’의 전형으로 꼽을 수 있겠고, 「바람의 슬하」는 무형의 바람을 중심에 놓고 바람에 부응하는 사물들의 움직임들을 통해 바람의 역동성과 그 흔적들을 회화적 이미지로 꾸며내는 필치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이와는 달리「멸치쌈밥」은 4행, 「겨울 감옥」은 2행 3연의 짧은 시로 시의 여백미를 유쾌하게 살린 작품으로 인상 깊다. 멸치쌈밥을 먹으며 ‘남해바다를 통째로 싸서 먹고 , 푸른 하늘도 함께 마신다’에 응축된 미각 味覺을 여백으로 남겨둔「멸치쌈밥」이나, 겨울이 주는 맹렬한 추위와 움추림을 인간의 절대고독에 빗대어 ‘오래 전 떠난 새의 눈빛 / 아직 날려 보내지 못했다’ 는 술회에서 흘러간 시간의 흔적을 찾고 싶어지는「겨울 감옥」은 짧은 시의 묘미를 일깨워주는 색다른 ‘다르게 보기’의 예로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산림문학』 2018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