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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철 시집 『씨앗 하나에서 자라는 추억』: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8. 9. 9. 18:27

跋文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나호열․ 시인

 

1.

 

예부터 우리는 ‘산에 오른다’는 말 보다 ‘산에 든다’라는 말로 가려서 썼다. 들판은 적고 산이 많은 나라에서 산은 삶의 양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위험을 막아주는 피난처, 기도의 장소, 나아가서는 경배의 대상으로 우리의 심성 속에 깊이 아로새겨 있었던 것이다.

논어 옹아雍也 편에서 공자가 이른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라 한 바가 공감의 폭이 넓은 까닭도 이와 같은 환경의 영향이 주는 의미를 체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움직이지 않으나 그 안에 만상萬象의 생명을 품고 기르는 넉넉함을 가까이 하다보면 저절로 어진 마음이 깃든다는 것이, 그래서 쟁투爭鬪보다는 화합과 조화에 기울어 오래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축복임을 알아차리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 아닌가 싶기도 한 것이다. 이런 행복의 지름길로 인도해주는 이희철 시인의 시집 『씨앗 하나에서 자라는 추억』을 읽다보면 저절로 기쁜 마음이 샘 솟고 안온한 기운을 감싸 안는 듯한 정취에 젖어들게 됨을 몇 줄의 소회로 풀어보고자 한다.

 

2

 

이희철 시인의 시집『씨앗 하나에서 자라는 추억』에 실린 125 수의 시들은 그 편편마다 ‘산’의 이미지를 오롯이 품고 있어서 문여기인文如其人의 풍모을 짐작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과 같이 개발의 과욕과 관광의 광풍에 훼손되어 가는 산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금과옥조 金科玉條의 지침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거기다가 그의 이러한 산 사랑이 그저 관상觀賞과 여가 餘暇의 낙수 落穗가 아니라 시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생애의 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과의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이희철 시인의 시를 선하고 어줍잖은 심사를 통하여 시인의 등단에 함께 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 때의 작품이 「계룡산 수통골에서」연작시 였다.

 

한 발짝 디디어 지나보면

눈부시게 아침햇살 깔리면서

기다랗게 깔리는 수통골길

등산화에 자그마한 자갈 길 밟혀 가지만

옆구리 한 편에

야생화의 새움들이 가지런히 서서

어여삐 꽃말 인사합니다

길 건너편으로

시인의 연주곡 어우러진

이 길은

언제나 비타민 같은 길입니다

야생화가 허기진 곳 채워주며

꽃단장 곱게 하고

사랑과 넉넉한 가슴으로

재회하는 꽃

느티나무 잎새 날리는 등 뒤로

춤새의 날개 젖어 나부대고

사랑의 노래로

구름 타는 곳

아침이면 이슬들이

찔레꽃 햇빛이

열어가는 수통골은

너와 나의 쉼터입니다

 

 

「계룡산 수통골에서 1」은 시인의 맑은 심성과 자연의 숨결이 어우러진 풍경화로 현대적 감각보다는 고풍스럽고 동화적인 시적 시선이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작품과 작자를 분리해서 보자는 서양의 시론이 어느만큼 합당할지는 모르겠으나 앞 서 말한 문여기인文如其人의 전통적 의미 또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기준임을 상기하여 본다면 등단 이후 10여 성상이 되면서도 변함이 없는 시인의 세계관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음에 시인으로서의 기개가 살아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3.

 

무룻 모든 생명은 생멸의 운명을 피할 수 없고 인간 또한 생노병사의 사고四苦를 면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평생 동안 학습을 통하여 심성의 성숙이라는 과업을 이루어내야 할 숙제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만물의 영장靈長의 칭호를 부여받는다. 심성의 성숙이란 일찍이 공자가 설파한 칠십소욕불유구 七十所欲不踰矩, 풀어서 이야기 한다면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마음가는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자유자재의 경지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이희철 시인은 이와 같은 자유자재의 경지를 시업을 통해서 터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씨앗 하나에서 자라는 추억’으로 축약될 수 있는 시인의 인생이 그저 범박한 말놀이가 아니라 단어 하나 하나에, 문장 하나에 깊이 각인되어 있음을 발견할 때 독자들은 또 다른 감동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우람한 나무도, 우리 인간도 태어날 때는 아주 연약한 하나의 씨앗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험난하고 유쾌하지 않으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거친 환경을 이겨내며 바르게 살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바늘구멍으로 낙타가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좌절하고 분노하며 쉽게 부정적인 마음으로 물들어지는 것이 세상살이인 것이다. 그러나 『씨앗 하나에서 자라는 추억』을 통하여 드러난 이희철 시인의 삶은 긍정과 화해, 낙관과 사랑으로 점철되어 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씨앗 하나에서 자라는 추억』은 시인 이희철의 전기傳記라고 할 수도 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의 삶의 행로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고백인 것이다. 시는 사실fact로부터 출발하지만 어디까지나 허구fiction이다. 시는 은유隱喩로 사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희철 시인의 시법은 은유를 통한 허구로 발언하는 것보다 직설적 화법話法더 가까운 이유는 무엇일까?

 

눈꽃처럼 사라져간 일들을 돌아보니/ 내 옆에는 산천이 있었고/ 그 옆에는 정든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은 외롭지 않다/ 이런 까닭에 사람이 걸어가는이 시가 된다//

그리하여 시집이 있다

 

- 「시집을 내면서」 마지막 부분

 

위의 인용문에서 굵게 표시한 ‘산천’, ‘정든 사람들’, ‘길’, 시집’ 층위가 다른 개념이기는 하지만 이희철 시인에게는 동의어同義語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기쁘거나 슬플 때 흐르는 눈물은 기쁨과 슬픔의 결과물이지만 눈물 그 자체는 느낌표( !)인 것과 마찬가지로 시인에게 위의 개념들은 수식이 필요 없는 사실인 동시에 영원불멸인 진리인 것이다.

 

이와 같은 사례는 시집을 구성하고 있는 ‘산’, ‘꽃’, 생활, ‘생애’, ‘회상’, ‘애향’의 작은 타이틀들이 모두 한 묶음으로 모일 수 있는 동질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개념은 모두 다를지 모르지만 그 속성이나 내포는 ‘산’이 상징하고 있는 부동성, 어짐(仁), 화해와 같은 본질을 구유하고 있다는 시인의 세계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한 두 편의 시를 감상하게 되면 쉽게 이 주장에 동의하리라 믿는다.

 

잠시도 조용하지 않다

생물들이 떠들썩하게 뛰어다니면

비켜서서 양보해 주어야 한다

이놈은 이렇게 뛰어다니고

저놈은 저렇게 놀고

숲이 넓게 있어 망정이지

저들 자유를 어찌 감당하리

저렇듯 바삐 살아가기에

숲에는 생기가 흐르고

숲은 운동장이 된다

고라니는 뛰어다니고

다람쥐는 보물찾기하고

산까치는 박수치는

운동회를 보는 것 같다

이거였구나!

숲은 먹을 것도 많아야 되고

숲은 숨을 곳도 있어야 하고

숲은 구경거리도 있어야 하고

그래야 생물이 살아가면서

행복하다는 것 알겠다

 

-「 숲은」 전문

 

긍정의 단초를 찾아낸

학, 솟대, 생활도구, 장식품...

다시금 창작예술로 태어나

세인의 희망을 불러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부엉이방구여!

새로운 모양을 알아차리지 못한

못난 내 탓 하고 싶다

 

- 「부엉이방구」 5,6 연

 

장독대는 할머니의 소중한 사랑으로 빛이 난다

장독대는 할머니의 지극한 정성으로 꾸려간다

장독대 뚜껑이 열리는 날엔

프라스틱 용기 안에 장 퍼 담아가며

천안 딸 한 통, 대전 아들 한 통

그렇게도 즐거울까!

할머니 이마가 연못의 파문처럼 주름결 실룩이는

흐뭇한 미소를 본다

 

- 「할머니의 장독대」 5연, 마지막 연

 

「 숲은」,「부엉이방구」,「할머니의 장독대」이 세 편의 시는 다루는 소재는 달라도 모두 일관된 주제를 형상화 한 시들로 ‘배려’와 ‘사랑’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숲’은 그야말로 약육강식과 생태계의 순환이 원한이나 증오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호 호혜와 아름다운 먹이사슬의 균형 속에서 살아가는 장소이다. 이 시는 이런 풍경을 재미있게 묘파하고 있다. 「부엉이방구」는 옹두리의 방언으로서 나뭇가지가 병들거나 벌레 먹은 자리에 결이 맺혀 혹처럼 불퉁해진 것을 말하는데 이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는 가르침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가하면 「할머니의 장독대」는 우리 주변에서 사라진 ‘장독대’를 배경으로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즐거움과 기쁨을 ‘연못의 파문처럼 주름결 실룩이는’ 미소로 삶의 진경을 포착하는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씨앗 하나에서 자라는 추억』은 만물동근 萬物同根, 원융 圓融의 조화를 꿈꾸고 실천하는 시인의 마음자락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소중한 시집이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인자요산 仁者樂山의 체득은 시인의 전 생애를 거쳐서 형성된 것임을 이 시집의 중요한 얼개인 제 1부 <산경예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계룡산 탐방 연작시’ 10편, ‘산의 사계 연작시 4편’이야말로『씨앗 하나에서 자라는 추억』의 진경산수임에 틀림이 없다.

 

4.

 

 

산 아래턱까지 밀고 들어온 거대한 도시의 물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꿋꿋하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계룡산은 여전히 충청남도의 기개를 드높이는 진산이요, 명산이다. 그 산을 바라보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끝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가를 이희철 시인의 연작시들은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계룡산 탐방 ․ 4」를 함께 감상해 보기로 한다.

 

 

금남정맥 줄기 따라 우뚝 솟아

팔백사십육 미터의 높이로

태곳적부터 불리던 상봉

활짝 핀 어깨위로

관음봉, 삼불봉, 연천봉...을

위엄 있는 장수들 거느린 것처럼

당당하기도 하여라

동쪽의 찬란한 햇빛을

서로 둥글게 흘러 보내면서

산천 다스리고 있는 천황봉아!

그 모습 천공의 작품이리라

고고한 매무새로 단장한 산맥들이

치맛자락처럼 멀리 펼쳐 있고

계곡 휘도는 물줄기

거침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곳으로

하늘 높이 귀 세운 화강암들을

절묘하게 세공하여 놓았는가?

비경에 빠진 천수만수를

어찌 사람의 말로

담을 수 있다 하던가!

 

‘천황봉’의 부제가 붙은 이 시는 혼자 가만히 읊조려도 좋을 듯하고 대중 앞에서 낭창낭창 독송 讀誦을 하여도 공명共鳴의 울림이 가득하여 세세한 천황봉의 풍경이 눈앞에 삼삼한 명품이 아닐 수 없다. 때로는 기교가 가득한 시보다 이와 같이 담백하고 웅자한 시가 감동을 줄 수 있음을 시인의 공력은 말없이 증명해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주마간산 走馬看山, 찬찬히 해찰하지 못하고 서둔 감이 없지 않은 듯 하지만 시인의 면모와 삶을 조망하기에는 지금까지의 감상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이희철 시인의 연치年齒를 굳이 헤아릴 필요를 느끼지 않으나 한 걸음씩 세월을 딛고 여기까지 걸어온 시인의 노정 路程은 한 마디로 말해서 산에게 묻고 산에게서 배운, 인간에 대한 믿음과 어울림의 기쁨이다. 그의 시들은 삶의 긍정과 희망을 한시도 놓치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의 시들은 그러한 기쁨과 깨달음의 실천으로 더욱 굳건해 지리라 믿는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측면에서 시법 詩法의 실험을 게을리 하지 않고 궁구하고 있다는 점 또한 새로운 시의 출현을 기대하게 만든다. 아주 유니크하고 활달한 시「노고지리」가 그 실례 實例로 주의를 환기시키는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노골노골지리지리”즐거운 노래하며

세차게 활개 젖는 자유를 보았다

푸른 보리밭 사이 오가며 사랑하고

하늘의 푸른 등 타고 놀면서

푸른 하늘 쏜살같이 오르락내리락

“노골노골지리지리” 경쾌한 소리

봄을 불러오는 전령을 전하고 있는가?

보리밭 사이에 지은 집 못 잊어 부르는가?

몇 번이고 높이 더 솟구쳐서

자유로운 날갯짓 “노골노골지리지리”

둥지 새끼 돌보느라 “노골노골지리지리”

수다스러운 비상 “노골노골지리지리”

어찌 그리 바쁘게도 움직이누

하늘이 허락한 자유 맘껏 누리며

종일 쫑알쫑알 무슨 말을 하누

너처럼 할 말 다하면서

높은 하늘 향하여

자유롭게 소리 한 번 외치고 싶다

노골 露骨노골露骨하면서

 

- 「노고지리」전문

 

노고지리의 비상과 소리를 “노골노골지리지리”의 리듬으로 반복하면서 ‘봄’의 약동감을 살림과 동시에 마지막 연에서 때로는 침묵으로 영위할 수밖에 없는 삶의 간난을 ‘노골 露骨노골露骨’로 치환하는 눙침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5

 

이희철 시인의 시집 『씨앗 하나에서 자라는 추억』상재를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앞으로도 강건한 필치로 삶의 진경을 펼쳐 보여주시기를 바라면서 ‘사람은 늙어가지만 시인은 늙지 않는다’는 간곡한 말씀을 올려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