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물 觀物의 세계와 정화淨化의 시
나호열( 시인,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교수)
1.
시를 둘러싼 여러 문제들, 이를테면 시의 정의와 시인이 갖추어야 할 품격과 권위, 한걸음 더 나아가 좋은 시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들은 유구한 문학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논구되어 왔다. 오늘날 ‘문학의 죽음’이 예견豫見되고, 그 예견이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우리 시단에는 다양한 층위와 경향 傾向이 존재하고 있으며, 시의 우열을 가르고 싶어하는 백가쟁명 百家爭鳴의 파장 속에서 수많은 시들이 독자들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다양한 층위와 경향은 풍요속의 빈곤이라는 빈정거림에 놓이기도 하지만 그만큼의 선택적 감상의 자유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는 긍정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과거 시(문학)가 지향했던 계몽적 교훈의 전달은 오늘날 유효하지 않은 효능이더라도 놀이하는 존재 Homo Ludens로서의 시인은 충분히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거워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논어 옹야 雍也)”는 말은 시인이 단순히 감각적 즐거움에 경도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에 종속되고 의존하는 정신의 일탈을 거부하고 단독자로서의 인간에게 부여된 감흥 感興을 포획하고자 하는 일련의 의식으로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자극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그 반응을 문자文字로 표현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를 시인이라 칭하지 않는다. 즉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드는 힘은 어떤 대상이나 현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감동과 감흥임엔 틀림이 없으나 그것을 지속시키고 그 누군가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욕구로 발동시켜야만 시인으로서의 궤도에 올라서는 것(구상)이며, 이러한 시적 감흥이라 하여도 그대로 놓아두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구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순간, 또 신묘한 지각 知覺을,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끄집어내어 항구적으로 보존하려는 것이 바로 시를 쓰는 작업(폴 발레리)이며, 이를 기꺼이 수행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와 같은 사람을 시인이라 불러 마땅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땅에서 쓰여지는 시는 모두 서정시 抒情詩라 주장하는 것은 억지가 아니다.
컴퓨터와 같은 기계로 조작된 환영에 촉발되는 감흥과 달리 오직 시인 자신 앞에 원본 그대로 주어진 대상(사물이나 현상)과의 교감으로 말미암은 것을 서정 抒情이라 일컫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서정은 두 가지의 통로로 이행된다. 세계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거나 (동화 同化), 자아 속에서 세계를 발견하려는(투사 透寫)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 통로는 시인이 자아와 세계라는 양자 兩者사이에서 무의식적으로 선택되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위와 같은 요건은 시인이 되기 위한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은 아니다. 일반적 감동이나 감흥을 지속시키려는 노력에 더불어 언어의 조탁 彫琢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시가 아무리 허구의 세계를 증언한다고 해도 시인의 진정한 고뇌가 담겨지지 않는다면 - 이 고뇌는 현상 뒤에 숨어 있는 본질을 관통할 때 파생되는 전율 같은 것이다 - 시로 표출된 감동과 감흥은 감상 感傷의 나락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2.
위와 같은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장문영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소금의 눈』을 읽는다. 이전의 시집 『가을편지』, 『숲속의 푸른 언어』에서 드러난 일관된 서정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세계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동화의 깊이를 더함으로서 삶의 대한 긍정의 인식을 공고히 하려는 의지가 돋보인다. 새로움을 추구하기 보다는 자아와 세계를 하나로 묶으려는 전통적 서정의 영역 안에서 『소금의 눈』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유한한 삶을 영원의 저 너머로 투사하려는 ‘사랑’과 ‘헌신’에의 꿈이다. 이 ‘사랑’과 ‘헌신’에의 꿈은 절대로 현실에 기반을 둔 낭만의 소산이 아니다. 절실함은 결핍에서 나오고 절망으로부터 희망이 솟아오르듯이 시인이 소망하는 사랑과 헌신의 세계는 고통과 반목, 소멸에의 불안을 떨쳐낼 때 현현하는 조화로움에 다름이 아니다. 부연하자면 시인이 노래하는 맑고 아름다운 세상은 그 이면에 어둡고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다. 관물觀物-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 이 앞서 언급한 서정의 동화라면 『소금의 눈』에 소재로 등장하는 수많은 ‘꽃’과 ‘나무’는 슬픔의 통과의례를 지나고 난 후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시인이 경험한 슬픔은 현실의 체험 그 자체인 까닭에 묘사라는 의식 儀式을 배제한 직정적 반응이다.
예고없이 자행된 천안함 폭침을 애도 하는 『2010년 봄』, 동생을 잃은 애통함을 그린 『사랑하는 내 동생』. 삼 백 명이 넘는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의 아픔을 노래한 『팽목항 절규』 등이 그러한 예에 해당된다.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보편적 삶의 질곡을 묘파한 시들이 있는데 ‘부딪치고 일그러져/ 상처, 흉터 만들어가며/ 비우고 또 비워야만 채워진다’(「두레박」 마지막 부분), ‘옆도 안 보고/ 정신없이 앞만 보고/ 팽팽 돌던 팽이’( 「팽이 인생」 부분), 풍력 발전기의 날개가 도는 모습을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팔로 바라보는 (「풍력발전기)애련함이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상(사물)을 통해 삶의 아픔을 직시하는 시 한 편을 읽어보자.
칡넝쿨 같은
질긴 삶
고구마 줄기 같이
얽힌 인연 거느리며
다리 둥둥 걷고
모심기하고
농사지으시며
긴 앞치마 두르고
소 여물 주며
바쁜 걸음으로
매케한 솔가지
장작 때서
가마솥에 밥 짓던 여인
시련의 아픈 젊음
등 굽은 호미 등 되었네
기름 자르르한 머리 결
곱고 푸른 젊음이
잿빛으로 물들었고
힘 잃은 흐릿한 눈동자
나무 등걸 손
마른 논 같은 발 뒷굼치
진한 삶의 연륜이 눈에 밟힌다
- 『호미 등 여인』 전문
평생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농사일에 매달리다 어느덧 호미처럼 등이 굽은 채 늙어버린 여인의 모습을 통해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는 부조리한 질문 그 자체이다. 신실한 삶을 영위함에도 왜 우리는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힘겨운 노동은 과연 신성한 일일까?
『소금의 눈』의 소재들의 대부분을 이루는 꽃이나 나무의 인상으로부터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가 안빈낙도의 깨우침을 일깨우는 시라든가, 삶의 풍요로부터 빚어진 낭만의 노래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은 이 세상 곳곳에 잠복되어 있는 슬픔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시인의 시선을 꼼꼼이 따라가다 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바닷가의 몽돌을 ‘바다의 소리꾼’이라고 하면서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들리는 달그닥거리며 부딪는 소리가 서러움이 응축된 쉰 판소리와 같다는 표현이나 절벽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를 ‘메 발톱이 되어/ 바위 움켜쥐고 / 설한풍에 화두 하나 / 짊어진 채 서 있다’로 묘사하면서 ‘우리에게 설법 한다 / 사는 것이/ 너희들과 무엇이 다르겠느냐‘(「맨발의 소나무」)고 동일시 할 때 시인이 인식하는 세계는 결코 서정으로 치환할 수 없는 냉정한 현실일 뿐인 것이다.
3.
부조리하고 냉정한 것이 삶의 현실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사랑과 헌신의 세계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계기와 필연성이 요구된다고 할 때 홀연히 등장하는 것이 ‘어머니’라는 화두이다. 수많은 시인들에 의해 추억되고 찬미되어진 까닭에 『소금의 눈』에 등장하는 어머니 또한 자애와 희생의 상징으로 그려지는 평범한 인식의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은 분명하지만 『소금의 눈』에서의 어머니는 슬프고 괴로운 삶의 현실을 뛰어넘어 사랑과 헌신의 세계로 상승하는 매개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어머니의 실꾸리」, 「어머니의 말씀」, 「어머니의 봄향기」, 「어머니의 생애」 등의 일련의 시에 드러난 바의 어머니는 질곡의 삶을 정화하는 한 전범으로 작동한다는 말이다. ‘돌다리 두드리시듯/ 신중하게 삶을 다듬질’(「어머니의 실꾸리」)하는 모습에서, ‘엄마라는 이름을 지어준 자식과/ 사랑의 울타리가 있어/ 살만한 가치가 있었’다는(「어머니의 생애」 )회고는 시인의 인생관이 비관으로 기울어질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교범이었을 것이다. 시인이 토로한 바와 같이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어머니의 훈계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너희들은 무덤에 가기 전엔
큰소리 하면 안된다
시부모 잘못 모시면 내 자식이 아니다
자식 키울 때 젖이 남아돌면
꽃밭에 주라 하시고
내 딸 잘 키워 남의 집에 시집 보내야 한다
하시던 말씀
어머니는 항상 낮으셨습니다
자신을 늘 뒤로 하시고
엄격하며 근검이 몸에 베이셨지요
희생과 배려로 가득 하신 어머니
어릴적엔 콩 한 조각이라도
나눠 먹어야한다 시며
친척 조카들도
당신 자식처럼 돌봐주시고
배고픈 사람에겐 밥을 줘야 한다며
거지도 그냥 보내지 않으시던 어머니
자식 먹다 남은 밥은
긁어 먹어야
자식이 잘된다고 일러 주시며
곡식을 귀히 여기도록 가르쳐 주셨지요
- 「어머니의 말씀」 부분
현재의 우리 삶의 상황에서 볼 때, 유교적 남성 중심 사회의 편린이 드러나긴 하지만 그와 더불어 타자 他者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몸소 보여주고 가르쳐준 ‘어머니’의 상像은 맹목적이고 편협한 이기적 자식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우리는 묻는다. ‘정말 꽃보다 사람이 아름다운가?’, ‘정말로 세상은 아름다운 것인가?’. 이 질문에 환하게 대답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세계에 대한 탐색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간구하는 마음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장문영 시인은 『소금의 눈』전편을 통해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찾고, ‘아름다운 세상’이 현존함을 증명하는 매개로서 개인적으로 체험한 ‘어머니’의 이데아를 체득하므로서 그의 시세계를 ‘사랑’과 ‘헌신’으로 경배하는 경지로 이끌어 올리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4.
이제 비로소 장문영 시인의 ‘꽃’과 ‘나무’를 중심으로 하는 자연이 단순한 영탄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랑과 헌신의 이데아임을 증명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의 인생은 뜯어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포장상자」’이며, ‘골목길에서/ 노을 한자락 주으려고/ 서성이는’, 「지친 영혼들」이다. 먼 바다가 죽음인지, 희망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흘러가야만 하는 폭포에 비유하면서 이렇게 노래하기도 한다.
긴 세월
눈물줄기가 모여
저렇게 세차게 흐르는가
천둥소리 묻은
하늘을
동이 동이 쏟아낸다
바람의 울음 몰아
짐승울음으로
무섭게 투신하는 담대함
먼 산 메아리
나무울음 껴안고
저리도 가파르게
내리 꽂히는가
풀뿌리 돌 울음업고
꽃잎 눈물방울 보듬고
곤두박질치며
황급히 뛰어 내리는구나
목적지를 향해
- 「폭포」전문
산다는 것은 폭주하는 기관차와 같은 시간의 흐름에 어쩔 수 없이 실려가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그저 소모되기만 하고, 낡고 닳아가기만 하는 삶이라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그러하기에 만물의 형상을 마주하면서 즉물 卽物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관물 觀物의 세계는 ‘헌신, 희생,봉사’로 겉과 속이 동일한 ‘「포장상자」’를 꿈꾸게 한다. 일상에서 의식하지 못하지만 손은 만지고, 잡고, 놓는 행위를 쉬지 않고 행하며 신체의 불협화음을 일으키지 않는 협주자이다. 그래서 시인은 ‘도톰한 등엔/ 세월의 숨결이 넘실대고’(「손」), 굳어진 손금을 바둑판에 비유하면서 스스로를 위무한다, 그런데 여기서의 위무 慰撫는 체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소금의 눈』 전편은 배열과는 무관하게, 삶의 부조리와 비극을 노래한 시 → 비극적 삶에서 긍정적 에너지로서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치유의 시→ 사랑과 헌신이 낭만으로 재현된 시의 단계로 이행되어가고 있음을 볼 때, 시인의 삶에 대한 위무는 숙고와 실천을 통한 깨달음의 획득을 증언하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금의 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꽃’이나 ‘나무’는 그저 완상 玩賞으로서의 꽃과 나무가 아니라 시인이 염원하고 꿈꾸는 완성된 세계와의 동화이며, 시인 스스로의 모습이다. 눈길을 걸어가며 새겨진 발자국을 ‘하얀 한지위에 / 달빛 시로 남겨놓’는(「어릴 적 잊을 수 없는 눈길」마음이나 ‘따뜻하게 피어있는 / 먼 옛날의 목화솜밭’(「눈 오는날 아침」)으로 눈을 바라보는 마음은 그저 옛날로 되돌아가고자하는 퇴행적 욕구와는 다르다. 불두화의 하얀 꽃송이를 ‘앞 가슴을 열어제친/ 저 여인/터질듯 부푼/희디흰 뽀얀/ 풍만한 가슴’(「불두화」)으로, ‘꿈을 부풀게하고/ 어둠을 밝히는 그대’로(「수선화」), 쏟아지는 햇살에 반짝이는 분수를 「수정 분수꽃」으로 치환하는 시인의 묘사에서 꽃이 상징하는 정물 靜物의 이미지와 여성성을 넘어 단지 셍명의 에너지를 불태우는 파토스의 영역을 넘보는 시인의 시선을 엿볼 수 있기도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장문영 시인은 정 靜에서 동 動을 느끼고 동에서 정의 세계를 추동하는 에로스(중간자)의 마음을 추적하는 시인이다. 풍요의 신 폴로스와 빈곤의 여신 페니아 사이에서 태어난 에로스는 풍요와 빈곤 사이에서 고뇌하는 존재이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우리의 삶은 빈곤(슬픔)을 극복하고 풍요(기쁨)의 세계로 나아가기를 희구한다. 그러나 슬픔/ 기쁨, 풍요 / 빈곤과 같은 양자 대립의 항 項 은 명확하게 갈라설 수 없는 양상이다.
푸른 방석 위에
단아하게 앉아
...중략...
해탈한 환희의
흰 웃음
「흰 연꽃」의 첫 연과 마지막 연을 통해 우리는 염화시중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적정 寂靜의 상태는 진흙탕이라는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장문영 시인이 도달한 삶과 세계에 대한 깨달음은 극복이 아니라 조화이며 중용인 것이다. 이 시집의 표제작품이기도 한 「소금의 눈」은 시인 장문영이 이룩한 작지만 소중한 삶의 지혜를 설파했다고 보여진다.
우아하게 푸른 배추들
하얀 줄기에 힘줄이 보인다
하얗게 반짝이는
소금의 날카로운 눈매
물과 가을바람도 합세해
배추의 기질을 꺾으려 씨름 한다
퍼덕이는 배추의 자존심이
몸을 뒤척이며 버티다
주체못할 센 힘에 눌려
서서히 부드럽게 몸을 낮춰
홀랑홀랑한 배추로 변하고
큰 다라이 속엔 서로의
자존심만 흥건히 녹아있다
-「소금의 눈」전문
배추와 소금이라는 이질적인 물질들이 하나로 뭉칠 때, 배추는 숨을 죽이고 소금은 배추 속에 절여져서 자신의 형체를 버린다. 배추는 염기를 품고, 소금은 배추의 맛에 배인다. 그러나 배추와 소금이라는 생명체는 자신의 용도를 스스로 결정할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 그것들의 쓰임새는 오직 인간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용도 또한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자연법칙에 따라 그 쓰임새가 달라질 것이다. 시인이 자존심이라 칭한 생명의 속성을 바로 아는 것이 해탈이요, 깨달음이 아니겠는가! 『소금의 눈』을 통해 우리는 시인의 마음을 읽는다. 시인과 작품의 세계는 별개이지만, 우리는 드물게 시인의 품격과 시의 세계가 일치하는 기쁨을 누릴 때가 있다. 글이 그 사람의 풍모를 드러낸다는 문여기인 文如其人이 시집『소금의 눈』에 가득함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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