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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樓蘭으로 가는 요양원의 낙타 / 강동수 시집 『기억의 유적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6. 4. 22:43

강동수 시집 『기억의 유적지』

 

누란樓蘭으로 가는 요양원의 낙타

 

예술은 언제나 창조의 열망으로 말미암아 멸망한다. 반복과 모방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 반복과 모방으로부터의 항거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움을 향한 순례가 빚어내는 고통이야말로 예술(가)의 숙명이자 기쁨일 것이기에 그 딜레마를 드러내는 결과물이 작품인 것이다. 일관된 자신의 세계관을 표현하는 것과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그 사잇길, 그 외나무다리에서 예술은 태어나고 소멸한다. 그 선택지選擇枝 중에서 일관된 자신의 세계관을 표현하는 시인을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난다.

 

시인 강동수는 2002년 『두타문학』으로 시작활동을 시작한 이후 2008년 『시와 산문』으로 등단을 마치고 2015년 첫 시집 『누란으로 가는 길』을, 잇달아 2016년 『기억의 유적지』를 펴냈다.『누란으로 가는 길』과 『기억의 유적지』는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을까?『누란으로 가는 길』에 드러난 그의 세계관은 이렇게 요약된다. “세상은 부조리하며, 따라서 상처받고 뿌리 뽑힌 자들의 아픔이 가득 찬 곳이며 시간만이 이 세상의 슬픔과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이 깨달은 바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안식과 평화는 과거의 기억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의식은 『누란으로 가는 길』의 표제시인 「누란樓蘭으로 가는 길」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황사가 불어온다

모래바람은 고비사막을 넘어와

내 마음속에 모래기둥 하나 세운다

먼 길을 돌아온

낙타의 울음소리 잠든 혼을 깨우고

아직 눈뜨지 못한 해 그림자는

하늘에서 길을 잃는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건너온 바람은

집집마다 사막의 전설을 알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흉노족의 말발굽을 피해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다

열사의 땅으로 가기엔 아직 이른 시간

도시는 모래성을 쌓고

조금씩 허물어져간다

 

길을 나서면 도시는 거대한 사막

신기루 같은 잿빛 가로수를 지나면

만날 것 같은 문명의 도시

 

실크로드로 길을 떠난다

이천 년 세월을 넘어 모래사막에 묻힌

누란왕국에 도착하면 꿈꾸던 오아시스

그 곁에 내가 묻어둔

청춘의 푸르른 꿈이 자라고 있을까

방황하는 로푸노르 호수가

두고 온 고향 누란으로 발길을 돌리듯이

길 잃은 발걸음이 사막에서 길을 찾는다

 

-「누란樓蘭으로 가는 길」전문

 

누란은 물길의 뒤바뀜 탓에 소멸된 왕국이며, 잃어버린 영화 榮華와 번성을 추억하는 장소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고, 현대문명의 제행무상 諸行無常을 일러주는 경고 警告의 상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시인은 누란을 통해서 과거와 현재를 오버 랩 시키면서 오늘의 이 땅이 번성했던 누란이며 쇠락해가는 누란임을 직시한다. 말하자면 이 세상은 온통 사막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막을 지나 사막으로 가는 길은 시간일 뿐이며 인간은 그저 길 잃은 발걸음을 옮기는 존재에 불과하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산 중턱에서

상처 난 집들의 내력을 읽어내리는

바람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아주 오래된 상처는

스스로 무너져 흔적을 지우려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폐허라 부르지

...중략...

폐허를 딛고 일어선 곳에 피어 있는

들국화 한 송이

오래된 것은

기억을 재생하는 힘이 있다.

 

「기억의 유적지」 2연과 마지막 연에서 우리는 시인이 오늘의 삶을 추동 推動하는 힘을 과거, 다른 말로 기억이라는 떨켜에서 찾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퇴행적 회고에 머무르지 않고 ‘아주 오래된 상처는 / 스스로 무너져 흔적을 지우려 하고 / 사람들은 그것을 폐허’라고 부르는 그 지점에서 ‘기억을 재생하는 힘’을 읽어내는 공력은 앞서 이야기한 바대로 “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안식과 평화는 과거의 기억을 잃지 않는 것” 이라는 인식과 일치한다. 이와 같은 시인의 인식은 오늘날의 현대인이 앓고 있는 ‘정처 없음’으로부터 벗어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뿌리 뽑히고, 이리저리 부유 浮游하면서도 자신이 떠도는 존재, 뿌리 뽑힌 익명임을 망각하고 있는 현대인의 삶에서 한걸음 빗겨서 있는 시인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으며, 지금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는 행운(?) 때문에 사라지고 잊혀진 모든 생물에 대해 증언할 수 있으며 그 시간의 흔적을 통해 변화의 와류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삶의 여러 덕목을 해찰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먼 도솔촌 그 어디쯤에서 출발하여

왕국을 버린 시타르타가 내 책상 위에 앉아 있다

아직 깨우지 못한 풍경들을 파인더 안에 가두어 두고 가부좌하고 있는 붓다,

케논 Canon이 관음 觀音이듯

 

-「케논 Canon이 관음 觀音이듯」마지막 부분

 

시인은 또한 사진사 이며, 사진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식견을 빌어 Canon의 유래가 ‘규범’, ‘표준’이라는 원뜻에서 ‘칸농 Kwannon / 관음’ 이라는 중의 동음이의적 중의重義로 해석될 수 있음을 밝힌다. ‘ 몇 만분의 일초 / 찰라의 순간을’ 저장하는 카메라는 돈오 頓悟의 깨우침과도 상통하는바가 있다. 쇠락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중심이 될 수 없는 소도시에서 평생을 보낸 시인의 눈에는 파인더에 포획된 풍경이 지금 바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기울어진 구두 뒤축처럼 / 쓸쓸하게 낡아가는 내 이력’( 「신발」부분)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풍경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숨결이 사라진 / 이곳에서 풍경은 다 살아있는 화석’(「화석」 마지막 연)이라는 수사는 변화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관음 觀音의 진경인 동시에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모든 만물이 과거를 함축하고 있는 살아있는 화석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와 같이 『누란으로 가는 길』과 『기억의 유적지』사이에는 시인이 인식하고 있는 세계가 여전히 아픔과 상처로 얼룩져 있음을 증언한다는 공통적 요소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해일을 바다의 울음이라고 하면서 그 울음이 바다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저것은 만선을 꿈꾸다 /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과 / 스스로 바다로 떠난 자들이 / 흘린 눈물’(「해일」부분)처럼 인간에게 슬픔과 고통을 안긴 거역할 수 있는 힘인 까닭에 ‘바닷물이 떠난 뒤 / 사람들은 부지런히/ 파도의 눈물을 닦’(「해일」마지막 부분)는 인고를 보여주는데 주저함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처럼 목마름을 이겨내며 누란으로 가는 꿈을 버릴 수 없다.

 

낙타가 몸을 일으켜 세운다

멀리 떠날 수 없는 낙타가

정해놓은 공간을 벗어나는 시간

어쩌다 한 번씩 내리는 사막의 여우비 다녀가면

잠시 목을 축이고

또 다시 깊은 잠으로 빠져든다.

뼈를 묻는 관습은 바람으로 전해오는 전설

모래폭풍이 불면 낙타는 모래 속에 묻힐 것이다

사막에서는 모든 것이 빨리 지워진다

사막을 빠져나오는 우리는 모두 사막여우

새로운 길로 달리는 자동차가

모래의 흔적을 지우고 있다

 

- 「요양원에 사는 낙타」 마지막 연

 

2연으로 이루어진 「요양원에 사는 낙타」 의 1연은 늙고 병들어 요양원에 의탁하고 있는 미래의 우리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살아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닌’ 삶이 어찌 늙고 병든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일이겠는가. 사막으로 상징되는 오늘의 삶에서 우리 모두는 천적을 피해 초원을 버린 낙타의 운명을 닮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요양원에 사는 낙타」의 2연은 처연하지만 사막을 벗 삼아, 집으로 여기며 살아온 병든 낙타가 요양원을 벗어나는 꿈을 이야기한다. 낙타는 요양원이라는 감금의 공간이 아니라 광포 狂暴한 자유의 땅, 사막에서 죽어야 한다. 인공을 벗어던진 자연의 품 안에서 잠들어야 한다. 자연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위대한 혼돈 속에 몸을 맡기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강동수의 시는 슬픔을 전면에 깔아놓고 그 슬픔을 천천히 되새김질 하는 냉정함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와 동시에 슬픔의 후면에 자리 잡고 있는 소외의 그림자가 기억의 날카로운 촉수로 이 세상을 겨누고 있음도 놓치지 않고 있다. 애이불상 哀而不傷이라고 했던가. 상처받고, 아프고, 슬픈 삶을 관음으로 펼쳐 놓으면서도 시인은 상처와 아픔과 슬픔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의지를 시간의 저 편에 놓여 있는 꿈으로 환치시켜 놓는 것이다.

 

“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문장을 나는

가장 아름다운 시를 아직 쓰지 않았다고 고쳐 읽는다

 

- 「문장들」 부분

 

시간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우리에게 남겨 준다. 시인은 그 깊은 기억의 지층 속에 잠들어 있는 언어들을 채굴하여 생의 아름다운 날에 바치는 제물로 삼고자 약속한 자이다. 그러하기에 시편 곳곳에 들어앉은 삶의 신고 辛苦는 그 신고를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근력을 키우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이『누란으로 가는 길』의 연장선상에『기억의 유적지』가 놓여 있음은 분명하지만, 『기억의 유적지』는 시인의 인식이 개인적 삶에서 보다 폭넓은 우리와 전 우주로 확산될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하고 있음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4차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앞으로 다가올 미증유의 세계는 모든 시인에게 새로운 시법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하고 있다고 볼 때 『기억의 유적지』말미에 놓여진 『소행성 아포피스에 관한 보고서」,「바람의 언덕」, 「흔들리는 것에 대하여」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바람의 언덕,「흔들리는 것에 대하여」는 『기억의 유적지』에서는 드물게 장시, 연작시의 형태를 취하면서 옴니버스의 독립성을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법의 다양한 실험-. 「소행성 아포피스에 관한 보고서」는 인류의 불안을 야기시키는 행성 충돌의 가능성을 상기하면서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공포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인류의 나약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 유의할 만하다. 시인이 이르기를, 아포피스는 2004년 6월 19일 미국에서 발견한 소행성이며. 이집트 신화의 태양신 라LA를 삼키는 거대한 뱀이고, 2036년 지구와 충돌할 확률이 있다고 한다.

 

“정말 우리는 20년 뒤에 재앙을 피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