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한 사유思惟를 사유하는 시
나호열(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교수)
1.
박주순은 특이한 이력을 지닌 시인이다. 그를 시인이라고 해도 맞는 말이고 아니라고 해도 맞는 말이다. 약관 弱冠의 나이에 시 동인 활동을 시작하고 이립 而立과 불혹 不惑을 넘기고서는 예술잡지의 편집장을 지낸 그는 지천명을 바라보며 등단을 하고 침묵하다가 이순 耳順에 가까워오는 지금 첫 시집 『매킨토시와 성황당』을 상재하게 되었으니 문학판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그 시간들이 숙고의 시간이었는지, 게으름의 시간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십 여 년에 가까운 세월 속에서 그가 결코 시를 놓아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른 봄날」, 「는개 내리는 산사에서」, 「어느날」세 편은 2006년 계간지『미네르바』 겨울 호에 게재된 등단작인데, 이번 시집에는 제목 자체가 바뀌거나 (「이른 봄날」은「허연 뼈다귀」로), 세 편 모두 퇴고된 것으로 보아 결코 그가 시심 詩心을 멀리 한 것이 아니었음은 틀림없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다소 길기는 하지만 「이른 봄날」과 「허연 뼈다귀」를 비교해 보기로 하자
아직은 이른 봄 햇살이기는 하지만
하얗게 얼음이 허연 뼈다귀로 녹아드는데
스산함과 따스함 사이를 배회하는
회색 그림자가 등을 돌린다
칼바람의 내공이 쇠잔하여
울먹이며 칼집으로 들어가는
아직은 성숙하지 못한 봄날
뒷짐지고 8부 능선을 어슬렁거리다
나른한 졸음하고 한판 놀아나 본다
머리고 가슴이고 지랄이고
두둑한 주머니면 우쭐 될 수 있는
무언가 부족한 듯한 세상에서
게슴츠레한 눈길을 거둘까
차라리 감아버릴까
망설임은 부메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가야할 곳을 서성이다
입냄새가 역겹다는
생뚱맞은 생각에 당황스럽다
허연 뼈다귀만 남기고
잔상으로 사라진 하얀 얼음 위
부의라고 또박또박 쓴다
햇살 한가닥 꺾어들고.
-「이른 봄날」전문
하얀 얼음에 허연 뼈다귀로
봄빛마저 주저하는 지금
스산함과 따스함을 배회하는
회색 그림자 만난다
칼바람의 내공이 쇠잔하여
칼집에서 울어대는 나른한 봄날
뒷짐으로 8부 능선을 어슬렁 올라
나른한 졸음하고 놀아나 보자
머리고 가슴이고 지랄이고
두둑한 주머니 우쭐 되는 더러운 세상에서
게슴츠레한 눈길을 거둘까, 감아버릴까
망설임은 부메랑으로 돌아오는데
허연 뼈다귀 남기고
잔상으로 사라지는 얼음 위
조심스럽게 부의 전한다,
봄날 햇살 꺾어들고.
- 「허연 뼈다귀로」전문
「이른 봄날」(7연,22행)이 「허연 뼈다귀로」바뀌면서 5연, 16행으로 간결하게 바뀌었다. 봄이 온다고 해서 별 볼 일 없는 황금만능주의의 ‘두둑한 주머니 우쭐 되는 더러운 세상’을 관조하고 싶은 희망을 노래한 이 시는 「이른 봄날」이 「허연 뼈다귀로」바뀌면서 ‘무언가 부족한 듯한 세상’에서 ‘더러운 세상’으로 바뀐 인식의 확신을 드러내고 있다. ‘살’이 덜어내지고 ‘뼈’가 드러난 세상의 실체를 알아챈 순간 시인은 섣부른 희망이 가져오는 정신의 이완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불필요한 수식어가 삭제된 「허연 뼈다귀로」는 ‘이른 봄날’이 ‘허연 뼈다귀로’ 환치되기까지의 신고辛苦의 시간이 함축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는개 내리는 산사에서」는, 5 연 19행에서 5연 22행으로 오히려 시가 늘어나 있는데, 이는 산사가 의미하는 버림과 고요 속에서 ‘나비’로 상징된 우리 삶의 덧없는 애처러움이 더욱 강열해졌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고요한 수면 위
목련 하나 떨어져
제 그림자 지우고
그 파문에
화들짝 놀란 송사리
꼬리 끝 (에서)
바람이 인다
- 「어느 날」 전문
그런가 하면 위의 시는 짧지만 많은 여운을 준다. 인간과 자연,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의 관계 인식을 드러내는 박주순 시의 첫 출발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수명을 다한 목련꽃잎이 떨어지는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 때가 되었기 때문이고, 수면 위에 떨어진 가냘픈 한 장의 목련꽃잎에도 파문은 일어난다. 그 파문에 모든 생물이 놀라는 것은 아니고 작은 송사리만이 그러하다. 생각하지 않은 곳에 존재하는 언어처럼, 바람은 예고 없이 태어나는 것이다. 꼬리 끝 (에서)의 괄호 부분은 이번 시집에서 삭제되어 있는데, ‘꼬리 끝에서’가 바람을 일으키는 주체가 송사리임을 적시하는 것이라면 ‘꼬리 끝’과 ‘바람이 인다’는 인과율의 저촉되지 않은 독립된 현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가늠하기 어려운 크기와 방향을 / 만남과 헤어짐의 징표로 알고 있는/우리는 잔등을 맡기지 않더라도/ 서로를 확인시키기 위하여/ 풍향계를 지녀야 한다”(「뫼비우스의 띠」 마지막 부분)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각 개체의 독립성과 정체성을 존중하는 시인의 결기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2.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이다. 그 환경이 시인의 인생관을 만들고 그 인생관이 세계를 투시할 때 ‘나’(시인)와 타자 他者를 관류하는 아픔을 느끼게 된다. 시인을 일러 흔히 ‘타자의 슬픔을 대신 울어주는 존재’리고 하지만 이를 뒤집어보면 곡비 哭婢로서의 시인은 자신의 체험을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가난과 배고픔이 일상이었던 아날로그 세대로서 불현듯 맞이한 디지털로 대변되는 속도가 일구어낸 물신 物神의 시대는, 속칭 5060 세대에게는 천형과도 같은 상실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래서『매킨토시와 성황당』은 전편에 걸쳐 균질 均質한 어조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의 시대로, 농경사회에서 후기 산업사회로, 유교의 나라에서 서구 西歐보다 더 서구화된 삶의 궤적을 증언하는 시집으로서의 의의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매킨토시와 성황당』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그 첫 번째는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물신과 무한경쟁의 시대로 이행되어가는 와중에 마주친 인간성의 몰락을 증언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간을 넘어서서 자연의 법칙을 고찰하는 것이며, 일찍이 칸트가 역설한 ‘진리의 섬’, 즉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우주의 모순을 관찰한 끝에 마지막으로 체념을 넘어선 유한한 인간의 안식을 추구하는 서정의 세계로 이끌려가는 행로가 그것이다.
마주보는 거울 속 깊이에 매료되어
제치고 들어서다, 들어서다
돌아나오는 길 잃어버리고
회로 속에 감금되었네
봉인된 전류 속에서 시어 주저리며
충혈된 약시 弱視로 성황당에 이르니
길은 없는 듯 있으니
매몰된 심지 돋우고
무심한 듯 찾아보라 하네
기억 속에서 길은
하나인 듯 둘이었고
둘인가 하면 하나였네
기대 살아야 하는 수가 많을수록
장애는 폭과 깊이를 넓혀가며
높은 난이도를 요구하고
바람에 잘리는 나뭇잎은
탓도 않고 들어주기만 하는데
사소한 오동작마다 울리는
경고음에 깊어만 가는 협심증
고전 속 토선생마냥
물 찰랑 채우고
살랑살랑 강박감 씻어낼 수 있다면
돌무덤 빠져 나오는 바람결 비벼
동아줄이나 꼬고 있으련만.
- 매킨토시와 성황당」전문
위의 시는 ‘매킨토시’로 상징되는 오늘의 삶과 ‘성황당’으로 비유된 과학이 배제된 무속 巫俗의 시대를 기억하는 화자話者의 넋두리를 받아 적은 것이다. “매킨토시Macintosh 는 미국의 애플사가1984년 1월 24일 처음 출시된 개인용 컴퓨터로 줄여서 맥(Mac)이라고도 부른다. 사용자들이 보다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raphic user interface/GUI)를 채용해 대중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처음 클래식 모델 때에는 플로피디스크 드라이브와 128k의 메모리만 갖추고 있었다”. (『다음 백과』인용) 화자는 0과 1로 이루어진 이진법을 채용한 컴퓨터 앞에서 그 매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해 ‘사소한 오동작마다 울리는 /경고음에 깊어만 가는 협심증’ 에 망연자실하며 이미 우리의 삶에서 무력해진 성황당에 기대어보지만 ‘길은 없는 듯 있으니/ 매몰된 심지 돋우고/ 무심한 듯 찾아보라’ 는 절망감에 휩싸인다. 그 엣날 천지신명에게 바치던 기도는 더 이상 빅 데이터를 이기지 못하니 ‘컴맹’이라는 신조어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을 비트는 조롱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컴퓨터 혁명과 동시에 우리에게 닥친 현실은 도시화의 문제이다. 골목이 사라지고, 아이들이 뛰놀던 공터에 시멘트로 구축된 거대한 아파트의 성城은 개인주의와 익명성 같은 고립과 반목, 투쟁의 대상으로서의 인간관계를 퍼뜨려 놓았던 것이다. ‘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달라던/ 원주민의 간절한 바람은 / 억장 무너지는 먼지로/ 가늠할 수 없게 흩어지고’(「두껍아」1연)이른바 뉴타운이라는 미명아래 정든 터전을 떠나게 만드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속성은 “사람은 꽃 보다 아름답다”는 꿈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렸다.
때로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지만
지키지 못하고 잦아들기에 아쉽다
... 중략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순간이
물질로 올린 사금의 반짝임 뒤로 숨어
좀체 드러내지 않는다
시「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워」의 1연과 4연에 보이는 바와 같이 시인은 ‘꽃 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희망을 버리지는 않지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순간이 좀처럼 보이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대사회가 품고 있는 일그러진 풍경은「화장」,「자찬 묘지명」,「서로를 당기는 비슷한 것들은」과 같은 시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바이다. 그리하여 시인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얼토당토 않은 다음과 같은 헛꿈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개의 눈으로 바라보는 물상이 우리와 같을 수 없겠지만, 때론 개가 바라보는 대상 흘끔 훔쳐보는 처지가 애달프다. 개가 개같지 않고 사람이 사람같지 않은 헛갈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쯤 개를 개라고 부를 수 있을까
- 「개」부분
3.
위와 같은 절망적인 삶은 도피하거나 체념하거나 적극적으로 극복하는 세 가지 중의 한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은둔하거나 절대적 신에게 귀의 하거나 철저한 사유로서 절망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 시인이 선택한 방법은 이러한 궁핍한 사유가 ‘우주 전체를 포섭하는 자연의 법칙이나 원리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시편들, 이를테면 「사이」, 「뫼비우스의 띠」, 「박쥐」, 「분재」, 「교차로에서」, 「색깔 테러하기」, 「직선 구부려 곡선 만들기」, 「등식 ․ 비등식」 등등의 시들은 사물과 현상에 대한 오랜 관찰과 사색의 결과물이며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자연은 코스모스 cosmos의 세계가 아니라 끊임없는 카오스caos(혼돈)의 세계라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매킨토시 컴퓨터에 내장된 작동원리를 모르면서 자판을 두드리는 것처럼 우리가 이야기 하는 희망이나 조화의 세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관조나 종교적 믿음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유한한 삶을 무한의 세계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시인은 역설하는 것이다.
서로를 거울로 삼으며
뒤틀어 맞잡았다 하여
각각의 얼굴 내세워
한 모퉁이 돌면 나의 모습으로
지나치면 너의 모습으로
교차점 잃어버린 우리는
꼬리 물고 돈다
-「 뫼비우스의 띠」 1연
오래 전부터 진화와 노화는
동침하면서 다툼하였으나
부정한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 「박쥐」 6연
겉은 매끈하지만 속으로 울면서
퇴적되는 울분의 지층
- 「분재」 4연
벽은 하나였으나
각자의 의미를 가지면서
두 개가 되어버렸다
...중략 ...
은밀한 공간을 탐닉하면서
벽이라 불렀을 뿐
벽은 없었다
-「 사이」 2연과 마지막 연
백지를 들여다 보라
왕성한 식욕으로 무엇이든 집어 삼키는
검은 구멍이 웅크리고 있을 거다
- 「색깔 테러하기」 4연
지면의 부족으로 부득이 부분 발췌한 몇 편의 시에서 필자가 꼽은 ‘꼬리 물고 돈다’, ‘진화와 노화는 동침하면서 다툼’, ‘겉은 매끈하지만 속으로 울면서’, ‘벽은 하나였으나 벽은 없었다’, ‘백지/ 검은 구멍’ 와 같이 아포리즘에 가까운 표현들은 단순한 관찰이나 상상이 아니라 궁핍한 현실에서 오는 궁핍한 사유를 벗어나려는 시인의 참다운 의지에서 발현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4.
박주순의 시편들은 그의 인품을 닮았는지, 아니면 그가 살아오면서 겪어낸 시절 탓인지 한결 같이 강건하고 건조하다. 그렇지만 그가 내보이는 『매킨토시와 성황당』시편들은 오랜 시간 숙성된 한 편의 시처럼 균질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만화경」, 「만화경을 걸치고 다니며」, 「산정일기」와 같은 유장한 산문시가 있는가 하면 「풍경 속 풍경」, 「동안거」나 「눈꽃」 같은 서정을 담뿍 담은 짧은 시도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랜 시간을 습작한 공력이, 그리고 또 한참을 침묵한 그의 시적 모색이 결코 허술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필자는 모든 시의 정점이 서정 抒情의 회복에 있다고 믿는다. 어느 경로를 거치든 간에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측은지심이야말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건강한 아름다움으로 회생시켜주는 묘약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매킨토시와 성황당』을 대표하는 시로 「다랑쉬오름의 정+반 = 합」을 감히 추천하고 싶다. 이 시를 읽으며 문득 오래 전 시인과 함께 제주의 다랑쉬오름에 간 적이 있음을 기억한다. 필자가 체득하지 못한 제주의 애달픈 역사를 품은 오름을 유연하게 그려낸 시를 읽으며 그가 추구하는 시세계의 합 合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신하였다. 앞서 시인의 시가 강건하고 건조하다고 한 연유는 그의 시법이 대상에 자아를 동화시키기 보다는 자신의 관념을 소재(대상)에 의지하지 않고 관념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 불편한 사유를 사유하는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랑쉬오름의 정+반 = 합」은 기존의 익숙하게 보아왔던 서정시의 전형과는 다른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시는 그저 달관을 흉내낸 시가 아니라 불편한 사유를 사유 그 자체로 극복한 시인의 오래고 험난한 행로에서 얻어진 여유인 것이다.
흠찟
죽비소리에 놀란 은하수
출렁이다
제자리로 돌아서고
바람이 낳은 풍경소리
산등성이 타고 오르다
힌겨운듯 잦아드는데
눈솔가지 메아리로
뚝뚝 부러지는 모양
꿈결인듯
아련하기만 하다.
- 「동안거」 冬安居 전문
『매킨토시와 성황당』은 시인 박주순이 불편한 사유를 사유한 결과물이면서 불편한 사유에서 탈피하는 출발점이 되는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그의 활발한 시작을 기대한다.
'내가 쓴 시인론·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문영 시집 『소금의 눈』: 관물 觀物의 세계와 정화淨化의 시 (0) | 2017.05.28 |
---|---|
우주를 향해 날아가는 사랑의 메아리 : 전순선 시집『별똥별 마을』 (0) | 2017.05.26 |
칸딘스키적인, 전혀 아닌/ 강만수 시집 『검푸른 비망록』 (0) | 2017.02.18 |
단순함이 주는 시의 여백미 餘白美 (0) | 2017.02.15 |
시인의 위상과 품격 (0) | 2016.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