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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향해 날아가는 사랑의 메아리 : 전순선 시집『별똥별 마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5. 26. 23:29

우주를 향해 날아가는 사랑의 메아리

나호열( 시인․ 경희대학교 교수)

 

시인이 되기 위하여 시를 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감성이 뛰어나 흥興을 즐겼다. 일찍이 이 땅을 일러 삼천리금수강산이라 부른 까닭은 산수山水의 풍광이 뛰어나고 사계절의 운행이 뚜렷한 환경 속에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자연스럽게 체득하고 두레의 오랜 풍습을 통해서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고 도타운 정을 쌓아온 어진 마음을 공유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날과 같이 시인은 많으나 시를 읽는 사람은 드물다는, 걱정 아닌 걱정을 하는 이들도 많으나 이는 한낱 기우에 불과하다고 감히 이야기 하고 싶다.

 

물론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으나 아무나 시인이 될 수 없다.’는 말도 있듯이 시의 품격과 어우러지는 시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드물다. 재주가 뛰어나 뭇사람들의 총망을 받았으나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오로지 자신의 희로애락을 심미안으로 정화시켜 시를 칼처럼 자신의 마음에 들이대고 신독 愼獨하는 시인도 있다. 우리가 시를 쓰는 사람을 가家로 부르지 않고 인人을 붙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 序詩가 반세기를 넘어 오늘날까지 흠송되는 이유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는 마음’이 시인이 마땅히 지녀야할 덕목인 동시에 자신의 시를 통하여 그러한 측은지심 惻隱之心을 드러내야 하는 임무가 우리 모두의 삶에 자리 잡고 있음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를 움직이는 언어는 마음을 어지럽게 할 수도 있고 거꾸로 마음이 언어를 속이기도 하는 까닭에 옛 선인들은 언전 言詮, 즉 언어의 그물에 걸리지 않아야 함을 경계했다. 언어가 지닌 다의성多義性, 상징象徵과 비유가 시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임에는 틀림없으나 시를 짓는 마음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오직 시인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기에 시를 둘러싼 진정성의 문제가 항상 시와 시인의 족쇄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 전순선

 

노산의 진통으로 시 한편 낳을 때 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눈물겹도록 행복하기만하다

 

위의 글은 전순선의 첫 시집『별똥별 마을』의 자서에서 임의로 뽑은 몇 구절이다. 2005년 등단한 이후 1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야 첫 시집을 내는 신실한 마음이 담겨 있는 듯도 하고, 등단 이후에도 동인활동 등을 통하여 끊임없이 연마를 거듭해 온 이력의 일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 같기도 하여 마음이 절로 따스해진다. 시를 지을 때마다 부끄러운 줄 모른다고 하였으나 이는 절실한 삶의 토로이기에 부끄럽지 않은 일이며, 눈물겹도록 행복하다 하였으니 이는 시를 통하여 마음을 흥으로 승화했다는 뜻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 전순선은 고성 高城사람이다. 고성이 어떤 곳인가. 남북으로 갈린 강원도의 최북단에 자리잡고, 동으로는 푸른 동해 바다를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태백준령이 내달리는 천혜의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란 시인은 산과 바다가 주는 영감을 듬뿍 받아 누구보다도 정감이 가득한 지혜를 터득한 듯이 보인다. 논어 옹야雍也편에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능동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함을 누린다”고 하였는데(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인자함과 지혜로움을 함께 얻었으니 이는 참으로 축복 받은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는 단지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이 아니라 시인의 전 생애를 망라하는 시편들을 통해서 충분히 발산되고 있는 사실이기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총 4부로 나뉘어져 있는 97편의『별똥별 마을』은 모든 인간의 고향인 ‘어머니’에 대한 회고로부터 출발하여, 두 번째 고향인 고성 언저리에 머무는 마음과 그로부터 관계 맺어진 가족과 친우들에 대한 애정, 생활 가까이의 사물들에서 얻어 들인 혜안慧眼, ‘세월호’와 같은 공동체의 삶에서 빚어지는 비극적 애환에 이르기까지 시인이 어루만지는 대상은 날선 비판보다는 측은지심에서 시작되는 연민과 사랑의 온기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 기쁨으로 뒤바뀌어 버리기에 값진 것이다. 이러한 시의 여정旅程은 숨겨진 자아 blind self에서 열려진 자아 open self로 이행되어가는 것과 일치한다. 다시 말하면 각각의 개인이 지니고 있는 성향을 단순한 타고난 성품으로 고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추구해야할 보편적 자아로 성숙시키고 발화시키는 일인데 시집『별똥별 마을』에는 ‘어머니’라는 고향과 ‘고성’이라는 고향으로부터 시인의 숨겨진 자아를 발견하고, 숨겨진 자아의 속성이 ‘사랑’임을 인식하며 그 ‘사랑’을 전 우주로 확장시키려는 꿈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몇 편의 시를 통해서 시인 전순선이 추구하는 삶의 꿈과 사랑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 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어머니

 

모든 인간에게 어머니는 ‘나’를 이 세상에 보내준 고향이기에 기쁜 존재이고 다시는 그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슬픔으로 남는 존재이다. 수많은 시인들이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애태우는 사모思母의 시를 남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본능적 모성이 가지고 있는 희생과 인내를 통해서 우리는 최초의 사랑을 생득적으로 받아들인다.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배우고 자아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타자 他者라는 또 다른 자아를 느끼고 고독을 체험한다.

 

이러한 체험이 결여되게 되면 가족과 더 넓은 사회에서의 개개인의 자아는 성숙하지 못한 일탈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오늘날과 같이 가족이 와해되고 혈연의식이 희박해지는 세태 속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사회의 건강성을 담보하는 보루와도 같다. 삼종지도 三從之道와 같은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부조리한 담론은 통용되지 않지만, ‘어머니’가 지닌 삶의 전범으로서의 역할은 여전히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어머니가 현명하지 못하다면, 어머니가 자신의 삶에 연연해하며 혈육의 정을 떼어버린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시「거미」는 시인 자신이 느낀 어머니에 대한 회오悔悟의 토로인 동시에 구태의연해 보이기조차 한 효도 孝道의 문제까지 파고 들어간 시집의 수작 秀作의 한 편이다.

 

새끼들은 태어나자마자

어미 품에 파고들며 생존본능을 위해

어미의 가슴을 다투어 파먹는다

 

줄줄이 태어난 자식들은

피와 살이 가득한 엄마의 달콤한 젖가슴을

긴 세월 내리내리 파먹더니

가뭄이 든 빈 들녘처럼

엄마의 가슴은 흉흉 말라만 갔다

뽀얀 양분을 다 빨아먹고도

성이 차지 않은 듯

쭈그러진 가슴에 덜렁 마른 젖꼭지만 붙어있는

빈 가슴을 아프도록 물어뜯었다

 

속살을 다 내어준 어미는

노을빛 스러지는 들녘에 빈 껍질이 되어

바람의 모서리에 허방의 몸은 티끌처럼 바스러져갔다

여든 일곱 번, 생명의 줄을 멈춘 채

 

- 「거미」전문

 

시인은 거미의 생태를 통해서 자신의 어머니를 본다. 자신이 낳은 자식을 버리거나 죽이는 패륜에 대한 경고이면서, 자신 또한 어머니로서의 삶을 위로하는 이 시는 수많은 사모곡이 가지고 있는 평범한 비유에서 벗어나 있다. 탁란을 하는 뻐꾸기도 알이 부화하고 이소하기 전까지 둥지 주위를 맴돌며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어미의 목소리를 각인시킨다. 시「거미」에 우리가 주의를 환기하는 까닭은 어머니가 준 사랑이라는 각인이 아버지로, 오빠로, 남편으로 그리고 종국에는 불특정의 사회에까지 이르는 사랑의 통로가 되는 것임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기는 하지만 인간에게는 학습이 필요한 덕목이다. 더 강조해서 말한다면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양심 良心은 누구나 구유하고 있는 덕목이지만 실행에는 선택적 의지가 필요한 것처럼 사랑을 받고, 느끼고 배우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사랑 하는 일’ 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두 종류의 모태를 향유하고 있는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시인 전순선이다. 어머니라는 신체적 모태, 고성이라는 외형적 모태가 주는 사랑을 받았기에 시인의 사랑의 외연은 넓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 ‘시어머니’, ‘오빠’, ‘남편’과 같은 혈족으로부터 ‘공현진’, ‘쇠소깍’, ‘화진포’와 같은 지역, ‘유채꽃’, ‘억새꽃’, ‘벚꽃’과 같은 자연물과 ‘눈’, ‘비’, ‘바람’과 같은 현상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시선이 가닿는 그 모든 것엔 측은지심이나 양심과 같은 덕목을 넘어서는 아가페적인 사랑의 숨결이 단순한 감성 너머로 승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새해에는

그저 내 안에

천진스런 어린 아이 하나 살게 하소서

 

청년의 마음도

어른의 마음도 아닌

우우우 끝없이

세상을 쫓는 승냥이의 마음도 아닌

 

그저

속 작은 내 안에

누구라도 놀러와 웃을 수 있는

그런, 어린 아이 하나 살게 하소서

 

- 「새해 기도」 전문

 

그렇다! “사랑이란 우주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다.” (13세기의 페르시아 시인 잘랄루딘 루미(Jalal ad-Din Muhammad Rumi·1207~1273), 사디시라지(Abu-Muhammad Muslih al-Din bin Abdullah Shirazi·1210~1291)의 언명은 인식과 경험을 배제한 초월의 세계이다. 비록 그 초월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초월의 꿈을 꿀 수는 있다. 시인은 초월의 꿈을 꾸는 자, 청정무구 淸淨無垢를 가득 안은 어린 아이로의 퇴행의 꿈을 꾸는 자 임을 「새해 기도」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순선 시인에게 있어서의 시는 만물동근 萬物同根의 하나됨을 추구하고 있다고 단언해도 무방하다.

 

육신의 소멸과 고향 회귀의 의식

 

나를 낳은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고향으로서의 어머니는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다. “내 영혼의 쉼터를 찾아/ 빛을 쫓는 사람들”(「걷는 사람들」)이라거나, “자꾸만 내가/ 머뭇거리는 것은/ 길이 아닌 길로 가고 있다.”( 「그리운 길」)는 의식은 “문득 네가 보고파서/ 너를 안으러 미안함으로 달려가고/ 소갈머리 세상사/ 네게 쏟아 부으러 뻔뻔함으로 달려가는”( 「그리운 화진포」) 회귀의 열망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그리운 화진포」에서의 ‘너’는 단순한 바다가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난 어머니이며, 재회의 기쁨을 ‘청솔바람 거문고 타며 / 펄덕이는 해산물과 함께 춤 한 번 출 수 있는’(「그리운 화진포」끝 연)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회귀의식의 소산이다. 이 회귀의식은 시인에게 있어서 삶의 원동력이며, 사랑의 에너지이다.

 

굼벵이들이 사는 초가집에서는

늘 나무 냄새가 난다

 

마당 한 켠에 세워둔 지게 위의 검불더미에서도

빨랫줄을 괸 바지랑대에서도

어둔 방고래를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정지간의 매케한 연기에서도 나무냄새가 난다

 

긴 수염으로 서책을 즐기셨던 아버지의

무명저고리에서도 서툰 나무꾼의 송진 냄새가 나며

행주치마 두른 어머니의

두리반 밥상에서도 구수한 나무향이 배어난다

 

이젠

안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그저 옅어지는 나무냄새 폐부 깊숙이 들이키는데

신기하게도

입 열 때마다 그 때의 나무냄새가 난다.

 

- 「나무냄새」 전문

 

감히 필자는 시「나무냄새」야말로 시집『별똥별 마을』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는 시라고 생각한다. 비유의 적절성을 넘어, 시의 완성도라는 굴레를 벗어나 ‘사랑’과 ‘어머니’와, ‘고향’을 축으로 하는 시인의 세계관이 ‘나무’라는 식물적 이미지와 ‘냄새’라는 후각적 이미지로 포섭되면서 결코 분해되거나 이탈될 수 없는 생명의 원형을 그려내고 있지 않은가! 모든 사물에 배어 있어 뺄 수 없는 냄새가 ‘입 열 때마다 그 때의 나무냄새가 난다’는 술회로 드러날 때 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시인이 꿈꾸는 초월의 세계로 열리지 않은가! 나무는 하늘을 향해 서고,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며, 긴 수명 壽命을 자랑하지 않는다. 나무 한 그루 속엔 아버지도, 어머니도 살아 숨쉬고 있으며, 그 숨결이 배어 있는 시인이 던지는 모든 말(言語)속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시집의 표제시인 「별똥별 마을」은 결핍에서 비롯된 그리움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의 순환으로부터 빚어지는 평화로운 사랑의 시작이며 결말이다. 전순선 시인의 공력은 자신이 감지한 세계의 희로애락을 감상 感傷으로부터 끄집어내어 사랑과 평화의 심상으로 환원시키는데 있다.

 

고향 산모퉁이 돌아가면 별똥별 마을이 보인다

지상에 유성하나 떨어지던 날

내 어버이는 빛을 잃고

엷은 연초록 이부자리에 누워

세상만사 버리고 깊은 단잠에 빠지셨다

바깥세상과 무호흡으로 의절하고 나니

마냥 태평스럽기만 하신지

앞서고 뒤서고

잔디밭 돔 하나 분양받아 상봉하신 후

방해받지 않을 두 분 만의 사랑을 택하셨나보다

이웃에 버릇없다 하실까

까치발로 살금살금

부모님 발치에 조용히 다가가

막내사위 넙죽 엎드린다

전에는, 외꽃 핀 얼굴로 글썽이며 섰는데

이젠 남편과 함께 바라보니

별똥별 마을의 두어 평 연초록 돔은

어머니의 봉긋한 젖가슴처럼 아늑하기만 하다

산모퉁이에 어버이의 사랑이 분다

 

시「나무냄새」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별똥별 마을」은 시인의 생명이 시작된 곳이며, 이 멀고도 넓은 세상을 관조하는 교과서이기도 하다. 슬프면서도 슬픔이 주는 위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데, 「별똥별 마을」은 바로 슬픔이 주는 위안을 우리에게 나지막하게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별똥별 마을

 

전순선 시인의『별똥별 마을』은 시인의 전 생애를 걸쳐서 이룩한 한 채의 집이다. 우리는 시집 속에 들어가 시인의 삶을 둘러보고 함께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 무엇보다 『별똥별 마을』에 드러나는 시인의 풍모는 세상 만물과의 대화가 스스럼이 없으며 그 스스럼없음은 가식 없는 시인의 진솔한 심성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다양한 소재를 다루는데 있어 두려움을 갖지 않으며, 그 소재를 통해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과거로의 퇴행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삶의 현장을 놓치지 않고 있으며 그 현장이 주는 핵심적 의의를 놓쳐서는 안될 대목이라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그런 좋은 예로 들 수 있는 시가「마트에 간 남자」와 「명태」이다.

 

오늘도 남자는

마트에서 사냥을 즐기고 있다

진열장에서 어떤 우유를 사냥해야 할지

고놈들 생긴 모양새가 비슷비슷해서

똑똑하고 착한 놈인지, 며칠 생인지, 몸무게는, 지방은

신중하게 이리저리 따지며 목표물을 살피더니

드디어 1.8리터의 저지방 우유를 포획하였다

 

정육코너로 이동한 남자

소 돼지 닭 오리들을 보고 흥분하며

하이에나 눈빛으로 먹잇감을 천천히 스캔하더니

소 안창살을 힘겹게 카트에 실었다

수산물코너에서는

눈빛이 살아있는 고등어와

은빛반짝이는 갈치를 낚아채고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짓는다

 

남자는 사냥터가 맘에 드는지

마트에 온지 3시간째,

시식코너에서 불고기를 먹고

과일진열대를 거쳐 식료품, 과자코너를 돌며

사냥한 물건들을 카트에 수북이 쌓고 있다

남자는 힘을 과시하며 또 다른 사냥감을 찾고 있다

남자의 아내는 약한 허리로 지치고 있다

 

마트에는 왜 그리

같은 종류의 가지 수가 많은지 정말 고르기 힘들다

 

-「마트에 간 남자」전문

 

내 이름은 명태다

그러나 사람들은 때때로

나를 생태, 동태라고도 부른다

어떤 이는 나를

코가 엮인 채, 건조되었다고 코다리라하며

북쪽이 고향이라고 북어라고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나를

어릴 때 노가리라 불렀으며

그 밖에도 내 이름은

황태, 애태, 선태, 망태, 낙시태, 춘태, 먹태 등

수십 가지로 불리어지고 있다

 

한 가지 이름만으로도

세상 속에 익숙해지기 쉽지 않은데

나는 여러 가지 애칭으로

사람들 곁에서 호강을 누리고 있다

동해안 최북단 고성에서는

매년 명태축제로

어버이 자식 기다리는 심정으로

실종된 명태, 간태 떼지어 돌아오기를 기원하고 있다

나는 어느새 귀한 존재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 「명태」전문

 

좋건 싫건 간에 세상은 변하여 부권상실로 대변되는 권위주의의 시대상은 사라져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컷의 사냥 본능은 사라지지 않고 소비시대의 상징인 마트에서 식품을 고르는 행태로 남아있다. 이런 유니크한 현장은 단지 남성 / 여성의 이분법적 사고의 해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는 힘을 과시하며 또 다른 사냥감을 찾고 있다 / 남자의 아내는 약한 허리로 지치고 있다’는 비판의 重意를 헤아려야만 이 시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태」또한 무분별한 남획과 기후변화로 우리의 어장에서 사라진 명태를 이야기하면서 수많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관계의 사회성’을 함의하는 동시에 ‘나는 어느새 귀한 존재로 /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언명을 통해 희소성에 의해서만 경각하는 현대인의 좁은 마음을 에둘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르게 이야기’와 ‘뜻 숨기기’가 시의 정의에 가깝다는 점을 시인이 깊이 체득한다면 앞으로 더 날카로우면서도 재미를 지닌 시편들이 탄생할 것이라는 예감을 가져도 좋을 듯하다. 전순선 시인의『별똥별 마을』의 상재를 축하하면서 시인의 장도를 빌어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