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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11. 10. 23:59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의 분지인 경북 의성은 비가 적은 탓에 곳곳에 수많은 저수지가 있다. 지도를 펼쳐보면 깜짝 놀랄 정도다. 가을이면 의성 곳곳 저수지 수변마다 갈대가 피어나 장관을 이룬다. 안계면의 안계평야를 앞에 두고 개천저수지가 위천으로 흘러드는 물길에서 마주친 풍성한 갈대밭 풍경.


경북 의성은 지금 가을의 풍경이 한창입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너른 들을 갈아엎어 마늘을 심는 손길이 분주하고, 안계평야 너른 들에 물을 대는 물길마다 풍성한 갈대들이 넘실거립니다. 기와 추녀가 이어진 그윽한 반촌 마을의 한옥에서는 나무 장작을 때는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붉은 감을 가득 매단 토종 감나무의 가지가 그 무게로 휘어져 있고, 단단한 과육의 사과와 산수유 열매가 붉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의성이 여행지로 잘 알려지지 않은 건, 아마도 안동을 거쳐 가야 한다는 이유 때문일 겁니다.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안동 땅을 등 뒤에 놓은 뒤에야 의성을 만날 수 있으니 거기까지 가기가 쉽지 않은 것이지요. 그러나 이즈음 같은 가을날이라면 의성이야말로 놓칠 수 없는 여행지입니다.

# 오래된 절집으로 들어가는 단풍 숲길

오래된 절집으로 들어가는 모든 숲길은 특별하다. 수백 년 넘게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않아 거목이 된 나무들이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다. 그 길은 성(聖)과 속(俗)을 가르는 차폐이기도 하고, 둘 사이를 잇는 소통이기도 하다. 수행과 명상의 공간으로 이어지는 길은 때로 욕심과 집착을 생각하게 한다. 절집으로 드는 숲길 위에서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는 건 이 때문이다.

경북 의성에서 가을이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절집인 고운사의 숲길도 그렇다. 절집으로 드는 오솔길에 훤칠하게 솟은 소나무의 도열도 좋지만, 이즈음에는 소나무 아래로 촘촘하게 자라난 단풍나무들이 이 숲길의 주인공이다. 절집으로 드는 길의 붉은 단풍색이 참 곱다고 느껴지는 건 아마도 소나무의 초록이 배경이 돼주기 때문이리라. 푸른 것이 있으니 붉은 것이 더 붉다. 하나의 색이 다른 색에 힘입는다.

단풍으로 물든 숲길만큼 화려한 것이 고운사의 산문이다. 절집 아래 복지관 옆에 새로 지은 거대한 산문을 지나서 오솔길 끝의 마당에 덩그러니 세운 산문은 추켜올린 추녀와 겹겹이 겹쳐진 다포식 건축만으로 화려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다.

고운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양양의 낙산사와 영주의 부석사를 지은 의상은 남으로 내려오면서 여기 의성의 등운산 자락에 고운사를 지었다. 영주 부석사가 쇠퇴했을 때도 고운사는 366칸이나 되는 건축물들이 들어서 일대 계곡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이야 위세가 예전 같지 않아 대찰의 면모는 사라지고 고만고만한 건물 스물아홉 동만 남았지만, 고운사는 그래도 여전히 70여 개나 되는 말사를 거느리는 위풍당당한 절집이다.

고운사에는 신라 말의 학자이자 문장가인 최치원의 이름이 깊게 새겨져 있다. 고운사의 이름은 본래 높은 구름을 뜻하는 ‘고운(高雲)’이었으나 신라말에 최치원이 외로운 구름이란 뜻의 자신의 호를 붙여 지금의 이름인 ‘고운(孤雲)’으로 바꿔 달았다고 전한다. 나이 마흔이 넘어 관직을 버린 최치원은 여기 의성의 고운사 일대와 경주 남산, 지리산 쌍계사를 오가며 은거했다.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중국 당나라 유학을 떠나 17년간 머물다가 스물아홉 나이에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 그가 신라에서 마주한 건 골품제의 모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신라사회였다. 최치원은 개혁을 말했지만 권력을 휘두르는 진골 귀족들의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당대 최고의 문명국가였던 당나라에서 글과 학문으로 이름을 떨치던 그였지만, 신라에 돌아온 그는 한낱 육두품 신분에 불과했다. 시대가 알아주지 않으니 그는 구름처럼 떠돌았다.

논이며 밭에는 가을걷이가 끝나가고 있지만, 경북 의성에서는 마늘을 심는 지금이 가장 분주한 때다. 마늘은 가을에 심어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6월쯤에 거둔다. 밭에 나온 부부가 마늘을 심기 위해 밭을 고르고 있다.



# 가운루에서 신선이 된 최치원을 보다

절집의 중심은 대웅전이지만, 건축적 미감으로 보면 고운사의 중심은 바로 최치원이 지었다는 이층누각인 가운루다. 개울 위에 세워진 누각인 가운루는 이쪽저쪽을 잇는 다리이면서 그 자체로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가늘고 긴 나무 가둥이 계곡 아래까지 내려가 거대한 누각을 떠받치고 있다. 옛 글에서 가운루의 공간을 ‘신선의 세계’라고 추어올릴 만큼 누각은 도교적인 색채가 짙다. 지리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돼 사라졌다는 최치원의 마지막 행적처럼 말이다.

고운사에서 또 특별한 공간이 있으니, 바로 연수전이다. 연수전은 절집의 건축물과는 확연히 다르다. 서원이나 향교의 사당을 연상케 한다. 불가의 터에 난데없는 유교의 공간이다. 연수전은 조선 왕조의 계보를 적은 어첩을 보관했던 사찰 안의 작은 건물을 1902년에 번듯하게 지어낸 것이다. 누구는 이것을 두고 ‘유불의 일치’의 경지를 사원 안에 녹여냈다고 평가하지만, 강력한 유교통치 이념 아래서 지방관리와 세도가의 자손들의 행패에 시달리던 사찰 측이 왕실을 상징하는 건축물을 지어 버팀목으로 삼고자 했던 쪽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연수전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단청과 벽화다. 건물 사방이 벽화로 채워져 있는데, 용과 학, 봉황과 사슴이 그려진 벽이 회색과 청색으로 빛이 바래 오히려 은은하고 독특한 미감을 빚어낸다. 지워져 퇴락했다기보다는 말갛게 세수한 모습이다. 여기다가 우화루 외벽에서 떼어져 식당 앞으로 옮겨진 호랑이 벽화도 독특하다. 호랑이의 눈이 보는 이의 시선을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해서 제법 유명해진 그림이다.

# 고려말 선승들의 자취가 남은 암자

경북 의성의 사찰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군데를 더 보탠다. 비봉산 중턱의 대곡사다. 비봉산은 산빛이 희미한 자주 빛을 띤다고 해서 자미산(紫美山)이라고도 불렸다. 비봉산이란 이름은 산의 형상이 봉황을 닮았다고 붙여졌다고도 하고, 일제강점기 일제가 산의 기운을 죽이기 위해 ‘봉황이 날아가 버렸다’는 뜻에서 이름을 붙였다고도 전한다.

대곡사에는 돌장승 너머로 우람한 범종각이 산문을 대신하고 있는데, 범종각의 자태가 늠름하기 짝이 없다. 법당 마당 앞에 얇은 석재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청석탑도 인상적이다. 지금은 적요한 절집이지만, 한때 대곡사는 대중과 교유하던 절집이었던 모양이었다. 삼월 삼짇날이면 예천, 의성은 물론이고 안동, 상주, 선산의 주민들이 몰려와서 진달래꽃을 따서 옷깃에 꽂거나 쌀가루 반죽에 빚은 두견화전과 살구꽃, 햇파, 미나리로 전을 부쳐 먹으며 즐겼다고 전한다.

대곡사에서 비봉산 정상 쪽으로 조금 더 오르면 암자 적조암이 있다. 본래 암자 자리는 절집을 창건한 나옹조사와 인도에서 온 지공선사, 무학대사 등 고려말 선승들의 영정을 봉안했던 영정각이었다. 영정이 도난되고 선객들의 선방으로 쓰이게 되면서 영정각 곁에 극락전과 산신각을 지어 적조암은 아담한 법당이 됐다.

고운사에 최치원이 있다면 대곡사에는 고려의 명문장가로 꼽히는 이규보가 있다. 전국의 명승지를 두루 돌아보던 이규보는 여기 적조암에 들어서 시를 남겼다.

“가벼운 바람은 조용히 연기 빛을 쓸어가고 / 지는 달은 새벽빛과 함께 밝구나 / …/ 외로운 마음 어느 곳에서 부는지 쓸쓸한 피리 소리 / 타향에서 병을 앓으니 쉽게 슬퍼지는구나.”

나그네의 쓸쓸한 심사를 드러내는 이 시가 새삼스러운 건 날짜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1196년 8월 17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820년 전의 기록이다.

대곡사에서 제법 거친 비포장길을 차로 오르면 비봉산의 턱밑에 닿는다. 해발 580m의 비봉산 정상까지는 여기서 걸어서 10분 남짓. 정상에 오르면 남쪽의 다인면과 안계 평야 일대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른 아침 정상에 올라 굽어보니 일대가 운해로 넘실거렸다. 막막한 구름바다. 건너편 운암사의 봉우리만 그 바다 위에 섬처럼 떠 있었다.

개울에 기둥을 받쳐 지어진 고운사의 가운루. 고운사에서 은거한 최치원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 새끼와 함께 탑에 앉은 사자 네 마리

의성에는 옛 절집의 자취에 세워진 빼어난 탑들도 여럿 있다. 내로라하는 탑만 둘러보는 데도 반나절쯤은 걸릴 정도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탑이 바로 국보인 금성면 탑리 오층석탑이다. 화강암을 잘라 지은 돌탑이면서도 목조탑의 수법도 엿보이는, 하늘을 향해 치솟는 듯한 기운이 넘치는 탑인데 아쉽게도 지금은 해체 보수 중이다.

대신 빙산사지 오층석탑을 찾아간다. 탑리 오층석탑 못지않은 위용을 자랑하는 탑이다. 빙계계곡의 차가운 물길 곁에서 단풍나무를 두른 채 오랜 시간을 건너온 석탑이 깊은 가을로 빠져들고 있었다.

우람한 두 기의 석탑에 밀려 아는 이들이 적지만, 사실 탑의 미감으로 보자면 관덕리의 삼층석탑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훌륭한 비례감에다 탑에 새겨진 사천왕상과 보살상이 그윽한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다. 탑의 삼층에는 4구의 사자상이 얹혀져 있는데, 사자상은 말끔한 흰색이어서 한눈에 보아도 근래 앉혀두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놓여 있던 사자상 2구는 일제강점기 때 도난당했고, 나머지 2구는 대구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그러니 지금 앉혀둔 사자상은 복제품인데, 암사자가 양 앞발 사이 배 밑에 3마리 새끼 사자를 거느린 모습이 이색적이다.

# 운치 있는 대청마루, 매혹적인 정원

▲ 의성 관덕리의 삼층석탑. 탑의 굄 위에 복원된 사자상이 놓여 있다. 진품은 대구박물관에 있다.
의성에는 또 옛 정취가 그득한 옛 마을이 두 곳 있다. 한 곳이 자하산을 배경으로 금성산과 마주하고 있는 북쪽의 사촌마을이고, 다른 하나가 금성산을 마주 보고 있는 남쪽의 산운마을이다.

자연스럽게 한옥과 슬레이트집이 뒤섞여 있는 사촌마을은 박제된 전통마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 옆으로 자그마한 구멍가게와 낡은 간판을 단 상점들이 있고, 오래된 양옥집 옆으로는 400년 묵은 향나무가 이끼로 뒤덮인 채 우람하게 서 있다. 사촌마을에서 느껴지는 건 이런 자연스러움이다.

사촌마을의 한가운데는 만취당이 있다. 영남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서애 류성룡의 외조카인 김사원이 자신의 호를 따서 지어낸 대청이다. 만취당의 현판은 집주인과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문인 한석봉의 솜씨이고, 목조 천장의 대들보 한쪽에 얹힌 꽃문양은 서애 류성룡의 어머니가 하회 시댁 나들이에 타고 다녔던 가마틀이라고 알려졌다.

만취당은 1989년 소설가 김문수가 실천문학에 발표한 단편소설의 ‘만취당기’에도 등장한다. 한국인의 출세욕과 그에 맞서는 청빈사상을 풍자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김문수는 그해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금성산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 산운마을도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살던 반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마을이다. 학록정사를 비롯해 소우당, 운곡당, 점우당 등 전통 고가옥이 30여 채에 달한다. 한옥의 돌담 안팎에는 유독 회화나무가 많다. 영천 이씨 집성촌인 마을에 급제자가 생기거나 벼슬을 하면 심어 기른 나무들이다.

산운마을에서 가장 빼어난 고택은 소우당이다.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사랑채가 마당을 감싸고 있는 집은 별반 특징이 없지만, 안채의 바깥에다 돌담을 두르고 별당건물을 배치했는데, 이게 한눈에 반할 만큼 매혹적이다. 1600㎡(480여 평)의 공간에다 비대칭의 연못을 놓고 주위로 측백나무와 소나무, 산수유, 대나무 등을 심어 자연스럽게 가꿨다. ‘영남 제일의 정원’이라는 찬사가 무색하지 않은 한국식 전통 정원이다. 오후의 볕이 비스듬히 들면서 별당의 정원 전체가 온통 가을빛으로 물드는 모습은 가슴이 두근거려질 정도다.

# 초라한 오두막 앞에서 만나는 물음

경북 의성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곳. 바로 아동문학가 고 권정생 선생의 오두막집이다. 오두막은 경북 안동 땅에 있지만, 의성과 경계를 이룬 남쪽 끝이라 안동에서 일부러 들르기가 쉽잖은 곳이다. 오히려 중부내륙고속도로 남안동 나들목에서 고운사로 향하는 길에 있으니 의성을 찾는 길에 들르는 게 더 쉽다.

집만큼이나 초라한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면 허름한 다섯 평짜리 빨간 슬레이트집이 있다. 이곳이 권정생 선생이 거의 한평생을 기거하며 글을 쓴 곳이다.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던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은 ‘오두막을 허물어서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삶과 작품을 추억하는 이들에 의해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도 깔끔하게 단장하거나 가꾸지 않고, 그냥 그가 살던 당시의 그 모습을 그대로 두었으니 유언의 절반쯤은 지켜진 셈일까.

대문도 울타리도 없는 초라한 집에서는 주인의 흔적이라고는 창호문에 그가 손수 쓴 ‘권정생’이란 이름 하나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이 집 앞에서는 그가 생전에 입버릇처럼 말했던 “중요한 건 ‘어디서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이란 이야기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평생을 무소유의 삶을 산 그가 이 집마저 갖지 못하고 노숙 생활을 하던 시절에 썼다는 한 편의 시가 가슴을 울컥하게 한다.

“사람의 손이 만든 / 콘크리트 다리 밑 / 오늘 밤은 거기를 / 빌려 들었습니다 / 주님 / 어쩌면 이런 자리에 / 누추하게 함께 / 주무실는지요.”


◇고운사·사촌마을 가는 길 =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남안동 나들목으로 나와 직진하면 일직면 소재지다. 운산교차로에서 우회전해 경북대로를 타고 가다 망호교차로에서 좌회전한 뒤 팽목삼거리에서 직진하면 고운사다. 고운사까지 차로 들어갈 수 있지만, 절집의 숲길 단풍을 즐기려면 입구의 노인요양원 앞에 차를 대고 오솔길을 걸어 들어가는 편이 낫다. 사촌마을은 고운사 인근에 있다. 길을 되돌아 나와서 신기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이내 사촌마을이다. 대곡사는 의성읍의 서북쪽 끝에, 산운마을과 빙계리는 남쪽 끝에 있어 이동에 적잖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을 감안해 움직여야 한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금봉자연휴양림(054-833-6922)을 가장 추천할 만하다. 인근 대구 등지에서 찾는 이가 많아 주말 숙박 예정이라면 일찌감치 예약을 해야 한다. 게르마늄 온천수가 나온다는 탑산온천(054-833-5001)은 모텔을 겸하고 있다. 시설은 낡은 편이지만, 숙박객에게 온천입장권을 제공해 숙소에 머물며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

의성의 맛집으로 첫손을 꼽는 곳이 의성시장의 ‘남선옥’(054-834-2455). 대폿집 스타일의 허름한 한우 숯불구이집인데 가격대비 고기의 질이 좋은 편이다. 남선옥의 소머리곰탕(4000원)도 유명한데 장날에만 판다. 의성은 마늘을 먹여 키운 이른바 ‘마늘한우’로 유명하다. 봉양면소재지에 가면 의석축협에서 직영하는 식육판매장(054-833-9505)이 있다. 이곳에서 고기를 사서 지정음식점으로 가면 상차림 비용만 내고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다. 최근 상호를 ‘삼미통닭’에서 이름을 바꾼 ‘주영자 마늘닭’(054-833-0107)은 튀김옷 없이 튀긴 닭에다 마늘과 고추를 넣어 버무린 마늘닭의 원조로 꼽히는 곳이다. 단촌면사무소 앞에 있다.


의성(경북)=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16년 11월 9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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