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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에 제일 높은 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10. 4. 23:15

내 마음 속에 제일 높은 산

나호열

우리 땅의 높은 산은 다 올라가 보았어도 내게 남산만큼 높은 산은 없다. 남산의 동쪽 기슭 필동에서 공기 맑은 북한산 기슭 정릉으로 이사한 이후 육십 년을 북한산을 바라보며 살았으나 정작 처음으로 정상에 오른 산은 남산이었다. 아버지의 병고 病苦로 가계를 떠맡은 어머니는 어느 날, 을지로 어디쯤에서 맛있는 불고기를 들게 한 후, 퇴계로를 지나 가파른 남산을 쉬지 않고 걸어 올랐다. 남산 순환도로를 따라 케이블 카 승강장을 모른 척 지나치고 길을 건너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나면 팔각정까지 이어진 돌길은 열 살짜리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벅찬 길이었으나 어머니 뒤를 놓칠까 진땀을 흘리며 종종걸음을 쳤던 것이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이윽고 팔각정에 올라 무엇을 했는지,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사방으로 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바라보며 이 세상이 참으로 넓고 이렇게 많은 집이 있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이후에도 몇 번을 그렇게 어머니와 남산을 올랐으나 어머니가 왜 남산을 올랐을까 하는 궁금함을 어머니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난 지금에야 떠올리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아둔한 일인가!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어린 삼남매를 키워내야 하는 사십대 가장 家長 이 되어야 했던 막막함을 이제야 알아챈 어리석음을 어찌하랴!

 

누구에게 의지할 수도, 하소연할 수도 없는 냉엄한 현실 앞에서 마음을 다잡고 없는 용기를 얻으려고 어린 장남을 이끌고 산을 올라 풍진風塵 가득한 세상을 굽어보았던 것은 아닌지 어림짐작해 보지만, 반 평생을 홀로 감내했던 어머니의 외로움을 곱씹어보자니 자식들 앞에서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던 강인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대학에 들어가고서도 자정이 되어야 문을 닫는 가계는 나아지지 않고 도서관에 가는 대신 인적 끊긴 남산 길을 수없이 더듬으며 허튼 시상 詩想을 날려보냈던 치졸한 낭만은 어머니의 신고와 맞바꾼 부끄러움이 아니었던가.

 

남산은 삼백 미터가 되지 않은 얕으막한 산이지만 서울 어디에서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사시사철 울창한 푸르름을 잃지 않고 넉넉한 품을 드러내고 있으니 이 또한 감사한 일이다. 동서남북 어디에서 올라도 정상을 내어주고, 그 옛날 우리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슬프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호연지기浩然之氣 선사해주는 조망은 변함이 없다. 그 숲길에 슬픈 나의 발자국이 남아있고, 오늘도 남산은 내가 이 세상에서 올라야할 제일 높은 산이라는 사실이 기쁘다.

 

*  2016 서울문학인대회 기념문집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