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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 時代精神과 작가정신 作家精神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8. 23. 14:49

시대정신 時代精神과 작가정신 作家精神

 

나호열

 

  SNS (Social Network Service)는 정보의 전파와 확산과 공유를 통하여 사회의 여러 풍경들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때로는 사실과 진실이 뒤섞이기도 하고 풍문이 진실이 되기도 한다. 요사이 우리 문단에 떠도는 풍문들이 사실과 진실의 갑론을박에 묶여있음을 목도할 때 그 누군가가 그 난마 亂麻를 풀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난 해 우리 문단을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던 모 소설가의 표절 행위의 진위는 냉소와 무관심 속으로 사라지고 있고, 외국의 저명한 문학상을 수상한 또 다른 젊은 소설가로 말미암아 우리 문학이 한 단계 올라섰다는 씁쓸한 자찬, 심심치 않게 입방아에 오르는 난해시에 대한 비평, 최근에 불거진 모 문학단체의 친일 문학가의 이름을 빌린 문학상 제정 발표와 취소의 해프닝, 이런저런 문학상을 둘러싼 나눠먹기식의 선정, 이번에는 기성시인이 백일장에 가까운 문학상을 받았다는 가쉽에 이르기까지 풍문은 또 다른 풍문을 키우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각기 달라보이는 이런저런 일들은 문학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신은 무엇이며 이러한 시대정신에 대응하는 작가정신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는 책무를 던져주고 있다. 한 마디로 예술은 과학적 분석을 거부하기에 따라서 정량평가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분명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과 이 시간은 다양성과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부조리와 불안을 뇌관으로 안고 있는 형국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는 안정되어 보이기는 하나 문명의 쇠퇴를 예감하게 할 뿐만 아니라 문화의 다양성을 제약함으로서 인간다움의 질문을 봉쇄하게 만든다. 분명히 이 시대는 다양한 생각과 사건 속에서 그 원인을 명확히 해명할 수 없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대의 풍경을 증언하는 일을 난해하게 발설하는 일이 폄하되어서도 안되고 그러한 난해시의 범람으로 독자들이 떠나고 있다는 진단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문학지가 수백 개가 넘고 문학상이 수백 개가 되는 나라, 수 만 명의 시인 묵객이 활동하는 판국의 저변에 깔린 대중주의에 적당히 영합하는 발언은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다.

 

  기득권과 지명도를 가진 문단의 어른들이라면 마땅히 풍문으로 떠도는 이야기들에 대해 설득력 있는 일침 一鍼을 가하는 것이 존경 받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문단에 엄중한 시대에 대응하는 작가정신을 보여주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헤아려보면 생각이 아득해지기도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예술은 정량평가보다는 정성평가가 우세한 분야인 까닭에 표절의 여부, 난해시의 범람, 문학상의 난립과 선정의 편파성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정말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작가 정신이 무엇인지를 정립하는 일이 될 것이다. 작품과 작가를 구분지어 놓고 본다면 친일과 변절의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작가는 역사적 사회적 책임을 질뿐만 아니라 도덕적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당위임을 인정하고 있다. 수많은 작가들의 이름을 빌린 상들은 도대체 그들의 어떤 정체성을 근거로 수상자와 수상작을 결정하는 것일까? 무슨 이유로 상금액수가 많아야 권위가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 상금을 걸고 기성문인들에게 공모 公募를 권유하는 세태는 무엇을 뜻하는가?

상은 말 그대로 공적이 뛰어나 귀감이 되고 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나 일에 내리는 의식이다. 이 각박한 세상에 서로를 격려하고 축하해 주는 일을 어찌 탓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니 상이 많다는 것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상이라도 그 상의 취지와 의미가 분명해야 하고 그에 따라 시상의 범위 또한 심사의 엄정한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 과 저 상의 변별성이 없다면 그 상의 권위는 그만큼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상도 받고 저 상도 받는 선배, 동료, 후배 문인들이 진심으로 나는 부럽다)

 

  茶山은 목민심서 束吏에서 목민의 책무를 맡은 자가 송덕비나 선정비를 살아 생전에 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물론 민중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떠난 이의 행적을 기리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제법 큰 고을 한 모퉁이에 말라 비틀어진 대나무처럼 서 있는 비석들을 바라볼 때마다 오늘날 힘깨나 쓰는 위정자들의 자화자찬을 보는 것 같아 쓸쓸하기 그지없다. 나라를 걱정한다는 사람들이 얄팍한 술수를 부리고 이편 저편 갈라서서 호객을 하며 是非를 논하는 이 백가쟁명의 시대에 또 하나의 시비거리가 있으니 걱정 아닌 걱정이 든다.

 

  어느 날 부터인가 우리 주변에 詩碑가 늘어나고 있다. 이미 유명을 달리한 시인들의 시를 기리며 後人들이 세운 시비야 말할 필요가 없으나 문단의 어른이라고 하는 분들부터 이제 시단에 발을 들인 신인에 이르기까지 이곳 저곳에 자신의 시비를 세우고 자랑꺼리로 삼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비싼 돌을 캐내어 다듬고 아무리 좋은 글씨로 새겨 넣은들 만고에 남을 명문장을 가려 읽고 마음에 간직하는 수준 높은 독자의 눈을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틀림이 없으나 자신의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 다시 말해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 자신의 언행이 훌륭함을 인정해 주는 이들이 없이는 불가능함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인생의 선배요, 문단의 선배일 뿐만 아니라 멀다고는 할 수 없는 인척이기도 한 어느 분의 이야기가 있다. 교단에서 은퇴한 시인은 생가에 당호를 짓고 화초를 가꾸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나는 그런 유유자적을 부러움 반 시샘 반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시비를 하나 둘 세우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럼 그렇지!

 

  그는 30개의 시비를 세우f고자 했는데 이제 28개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그곳에는 그의 시를 새긴 시비는 하나도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를 자비를 들여 자신의 마음 속에 들여놓는 일을 그 시인은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림잡아 몇 천 만원은 내놓아야할 그 일을 그는 몇 년 동안 뚝딱하고 해 놓았다. 詩歷 40 년에 가까운 시인이 스스로 아끼고 자랑하고 싶은 시가 어찌 없겠는가?

 

  나는 그에게서 신독愼獨의 경지를 본다.

 

  신독의 경지를 바라보고 정진하는 것이 작가정신의 본령이라면 우리 주변을 떠도는 유쾌하지 않은 풍문은 일거에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나의 생각은 망상에 불과한 것인가?

 

 

* 이 글은 요즘 우리 문단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재편집해 계간 시와 산문 가을호에 권두언으로 올린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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