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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위상과 품격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11. 6. 21:52

시인의 위상과 품격

 

나호열

 

소나기처럼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본다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지난 여름 잠시나마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던 육당 최남선과과 춘원 이광수 문학상 제정을 둘러싼 문제를 생각해 본다. 춘원과 육당이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효시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친일 행적으로 말미암은 훼절 毁節이 대중의 정서와 맞지 않음이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큰 사람일수록 행동거지에 일관성과 도덕성이 겸비되어야 하는 법인데, 불행하게도 문학적 광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적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논지에는 문학적 성과와 비례하여 시인(작가)의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공인 (公人)의 책무가 존재함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학상 제정으로 촉발된 논란은 그들의 친일 행적으로 말미암은 문학상 제정 취소로 그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의 본질이 시인(작가)에게 부여된 권리와 책무가 무엇이며 그 한계가 어디인가를 숙고해야하는 과제를 던져준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말이 쉽지 그 과제를 떠안는 순간부터 쾌도난마 (快刀亂麻)할 수 없는 또아리가 눈앞에 도사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그때그때 적당한 타협과 무관심으로 문제의 핵심을 피해 왔던 것이 아닌가. 쉴 새 없이 드러나는 표절, 문학상을 둘러싼 이런저런 뒷말들, 최근에는 등단제도에 대한 날 선 비판들에 더하여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시인들의 자질 논란과 난해시의 범람들에 대하여 진지한 논쟁과 반성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대안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을 다했는지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다층화되고 한결 넓어진 우리 문학의 스펙트럼을 넘어서서 시인(작가)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란 과연 무엇이며, 그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를,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지닌 사람을 다 공인이라 부를 수 있는지를, 그렇다면 지명도가 낮은 시인(작가)들은 공인이라 부를 수 없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인(公人)이란 누구인가?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 공무원을 일컫던 말이 이제는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을 공인이라 넓게 해석하는 까닭에 지명도가 있는 사람이라면 연예인도, 체육인도 스스로 공인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수의 선택받은 극소수의 시인(작가)들에게만 공인의 칭호를 부여해야 할 것이며. 그 외의 시인(작가)들을 영역 밖으로 몰아냄이 정당할지도 모른다는 해괴한 결론에 이르게도 될지 모른다.

 

2015년도 문화관광체육부의 통계를 살펴보면 시인들이 작품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순 수입이 연 이백 만원을 약간 상회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문학을 뒤로 밀어둔 채 생업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와 같이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까닭이 지나치게 난삽해진 시 때문이라고도 하고, 대중의 문화 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고도 자위하기도 하지만 이미 문학은 21세기의 대중들의 문화 성취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으며 문화 향수의 통로가 다양화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른바 프로슈머 prosumer - 생산과 소비를 자족하는 - 의 세태 속에서 시인은 더 이상 우러러보아야 할 최고의 지성인으로 대접받을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자괴감에 빠지지는 말자. 오래 전 김현이 말했듯이 “문학은 무용 (無用)하기 때문에 유용 (有用)” 하다. 쓸데없기 때문에 대중들이 내쳐버린 문제를 특별하게 다루는 이들이 시인(작가)이라면 그들은 오히려 특별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시인(작가)들은 스스로를 더욱 엄격하게 다루고 내칠 줄 아는 근력이 필요하다. 단순히 말놀이에 능숙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글이 사회와 대중에 미칠 영향을 숙고하고 자신의 글에 행동으로 책임질 수 있는 의지를 지녀야 한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추문으로 얼룩진 요즘의 문단의 사정은 바로 지금 불쑥 불거져 나온 문제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묵인되고 관습화된 폐해에 다름없다. 문제가 된 시인(작가)들이 사과를 하고 소속된 단체에서 제명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일시에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아무리 완벽한 제도를 만든다고 해도 사회의 지탄을 받는 행위들이 근절된다는 보장은 없다. 이천 오백 년 전 공자 (孔子)가 천하를 주유할 때 많은 사람들이 실현불가능한 인(仁)을 내세우는 공자를 비난했다. 그 때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 나의 뜻이 불가능함을 나도 안다. 그러나 나의 주장이 옳기 때문에 뜻을 펼친다.”

문학의 짜임새가 허구인 까닭에 작품의 진실 여부를 따져 묻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동시에 이 말은 작품과 별개로 시인(작가)의 도덕률은 엄격한 의식을 거쳐야 한다는 뜻을 지닌다. 문학적 성취는 독자들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때 비로소 시인(작가)의 공인으로서의 품격이 완성된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오늘의 시인(작가)들의 위상이 예전과 같지 않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위상을 높이는 일 또한 어렵지 않다. 스스로 범인 凡人과 다름을, 그 다름이 대중들의 인기를 얻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품격 品格으로 격상시키겠다는 의지로 발현될 때 대중은 시인(작가)의 위상을 되돌려 줄 것이다. 정민 교수의 글을 읽으며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진다.

시는 곧 그 사람이다. 굳이 알려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쓴 언어가 제 스스로 말해주는 사실이다. 언어가 그 사람의 기상을 대변한다는 것은 그 연원이 깊다. 이는 발전하여 말에 정령이 깃들여 있다는 언령의식 言靈意識을 낳기도 했다. 무심코 뱉은 말이 씨가 되고,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시화에 자주 보이는 ‘시참 詩讖’이 바로 이를 말한다. 시인은 모름지기 가슴 속에 호연한 기상을 품을 일이다. 떳떳함을 기를 일이다.

- 『한시마학산책』, 250쪽 

 

* 2016년 <<한국문학인>>가을호 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