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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에 대한 언어의 탐문/ 문효치 시집 "모데미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9. 9. 00:37

실존에 대한 언어의 탐문

나호열

1.

 

『모데미풀』(시작 시인선 0201)은 오늘날의 사회적 문제와 더불어 현재 시단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의 핵심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는 시집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적 문제라고 하는 것이 워낙 광범위하고 복잡한 연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를 축약한다면 전 세계적 현대문명이 야기한 폭력성으로 말미암은 생명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우리 시단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시의 난해성이 심화되면서 벌어지고 있는 시의 위의 威儀에 관련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그래서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는 라깡 Lacan의 선언이 일군의 시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인 까닭에 불가사의한 삶을 횡단하는 존재의 불안과 부조리를 증언하고자 하는 난해시의 범람을 쉽사리 논파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효치 시인의 열한 번 째 시집인『모데미풀』은 종심 從心을 넘어선 시인의 세계관이 개인과 집단, 시와 비시 非詩의 유역을 꼼꼼이 탐색하면서 그 대안 代案을 제시하고 있음을 눈 여겨 봐야 한다. 시력 詩歷 50년의 시인은 시류 時流에 휩쓸리지 않고 그 와류의 중심에 자신의 실존을 굳게 세워둔 채로 삶을 성찰해 왔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시는 경험과 상상 그리고 이런 것들의 적절한 연결과 결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거기에서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면서 ‘글자가 없는 책’인 세상을 읽어가고 있다.”

 

위의 글은 문효치 시인이「경험과 상상, 그 연결과 결합」(『나는 글을 이렇게 쓴다』, 문학관 books, 2015)에서 자신의 시법 詩法을 드러낸 것으로서 반 세기에 걸친 그의 시작 詩作이 단순히 현실에 대한 조응에 그치는 경험의 축적이 아니라 - 그의 지론을 따라간다면- 껍데기로 포장되어 있는 사물의 내면으로 들어가 사물의 본질을 찾아냄으로써 세계의 구조를 자기화하려는 노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시인에게 있어서의 경험은 ‘생명을 신봉하고, 생명이 신’(「시인의 말」)이라는 믿음이 현실로 귀결되는 질료였던 셈이다. 시인이 이순을 넘어서면서 상재한 시집이 이번 시집까지 9권에 이른다는 사실에서, 특히 역사에서 사라진 왕국 백제에 관련된 시집이 여러 권이라는 사실에서 그의 경험이 단순한 시간의 축적, 기억의 축적이 아니라 그의 상상력을 촉구하는 기폭제였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존재했지만 지금은 비어버린 공간이 나의 상상력이 뛰어놀 수 있는 마당이었다.’(「경험과 상상, 그 연결과 결합」(『나는 글을 이렇게 쓴다』, 문학관 books, 2015). 말하자면『백제시집』(2004년),『동백꽃 속으로 보이네』(2004년), 『계백의 칼』(2008년)『연기 속에 서서』(2008년), 『왕인의 수염』(2010년),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2011년), 『칠지도』(2011년)에 이르기까지의 시작은 특이함과 희소성을 추구하는 단순한 소재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유의 종착점을 예견하는 모험의 시작 始作이었던 것이다. 사라져 버린 것들, 잊혀진 사물들에 대한 시인의 관심은 시간의 연속성 속에 생명이 숨 쉬고 있고, 그 숨결이 바로 사랑임을 증명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시「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를 읽어본다.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허공에 태어나

수많은 촉수를 뻗어 휘젓는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될

온몸을 태워서

찬란한 한 점의 섬광이 될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빛깔이 없어 보이지 않고

모형이 없어 만져지지 않아

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여,

 

무엇으로든 태어나기 위하여

선명한 모형을 빚어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되어라.

 

굳이 이 시를 넘쳐나는 인류애人類愛나 남녀 간의 절절한 감정의 절정으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 생각은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시로부터 단절된 역사(시간)를 살아 숨 쉬게 하고, 잊혀진 이름을 다시 호명하는 생명의 에너지로 ‘사랑’을 해석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시인의 전 생애를 걸친 경험으로부터 시작되는 상상의 자유가 궁극적으로 생명에 대한 경외로 안착되는 현장을 목도하게 되는 기쁨이 더 크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라져버린 역사를 상상의 공간에서 복원하고 있는 일련의 ‘백제시편’이나『별박이자나방』(2013년)과『모데미풀』에 드러나는 현존하는 미물 微物에 대한 관심이 별개의 주제가 아니라 일관된 사유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눈여겨보는 것이야 말로 시인의 면모를 강열하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직관이나 종교적 비의에 의지하지 않은 채 ‘너무 멀리 갈 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엘리어트)는 의지를 관철한 시인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2.

 

『모데미풀』에서 시인이 호명하고 있는 칠 십여 개의 이름을 친숙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실제로 접하지 못하고 실생활과 유리된 존재는 보편자로 받아들인다. 쉽게 말하면 다 같은 속성을 지닌 ‘풀’이나 ‘잡초’로 그들을 명명하면 그 뿐인 것이다.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진 개별자가 ‘풀’이나 ‘잡초’의 종속개념이 될 때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 ‘민중’이라는 보편자와 개인이라 불리는 각각의 개별자의 존재 양식은 또 어떻게 될까? 『모데미풀』은 저 중세의 보편논쟁을 다시금 불러일으킨다. ‘풀’이나 ‘잡초’(보편)는 각각의 이름을 가진 것들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실재론realism과 보편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름에 불과하다는 유명론 nominalism의 논쟁을 해결하자는 의도를 내비추지는 않지만 시인이 파드득 나물, 소경불알, 털여뀌, 뻐꾹나리 등등의 이름을 호명할 때 보잘 것 없고, 유용하지도 않은 개별자의 생명에 대한 관심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외로움보다 독한 병은 없어도/ 외로움보다 다스리기 쉬운 병도 없다’(모데미풀 5연 )는 언명은 사회적 평등을 갈구하는 경쟁의 종식을 노래한다. ‘집들이 때는/ 도깨비엉겅퀴 송장풀 개불알풀등/ 이름보다 훨씬 예쁜 놈들/ 안 좋은 집에서 태어나 멸시받는 애들/ 모두 불러다가 술 한상 내고/깽깽이라도 연주하면서/ 한번 신나게 흔들어보리라’(「깽깽이풀」마지막 연)는 희망은 신분의 고착화가 심화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드러나고 더 나아가서 ‘나를 밟고 가는 자들아/ 너네들이 쥐오줌이다// 너네들의 발에서는 / 고랑내와 지린내가 난다’(「쥐오줌풀」2,연,3연) 고 ‘인간’이라는 보편자를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이와 같이 시인이 추구하는 길은 관념과 실제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정치 定置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황혼빛에 선다

잠시, 잎 피고 꽃 피다가

사랑처럼 흘러버린 시간

 

온몸에 붉은 물 스며드는

황혼빛에 서서

 

외롭지 않은 척

슬프지 않은 척

 

저, 아슬아슬한

세월의 줄 위에서

흔들리는 몸

안간 힘으로 세우고 있다.

 

- 시 「마타리」 전문

 

서러워서 아름다운 이 시는 다시 우리에게 묻는다. 실존이란 무엇인가? 개별자이기 때문에 외롭고, 너와 내가 우리가 될 때 더 외로워지는 실존은 보편적 관념인가? 아니면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인가? 시인은 남/녀와 같은 모순개념이 아니라 흑/백과 같이 흑과 백 사이에 부유하는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무수한 반대개념(존재)이 진정한 실존임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3.

 

라깡의 선언을 다시 떠올린다.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그래서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는 말. 모두 다 알다시피 존재하지 않는 곳은 언어구조이며, 생각하지 않는 곳은 무의식이다. 시인은 이 두 개의 함정을 받아들이거나 극복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무참한 테러가 자행되고, 법이 무너지며, 새로운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세상에서 이런 세상을 비아냥거리며 증언하거나 결사의 의지로 극복하려는 선택은 자유이다. 문효치 시인은 시집『모데미풀』을 통해서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서정을 되찾고자 한다. 그의 시편은 난삽하지 않으며 지나치게 길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편을 전통적 서정시의 범주에 넣는다면 그의 시편을 지나치게 오독하는 것이 될 것이다. 세계의 자아화나 자아의 세계화로 규정하는 서정시를 동일성의 원리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간결함 속에 감춰진 철학적 사유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언명에 감춰진 진실- 의사소통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사유를 구속하는 존재로서의 언어-을 극복하려는 다양한 실험이 『모데미풀』에 전개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간단히 그 실례를 들어보자.『모데미풀』의 시편에 등장하는 화자 話者는 대상 그 자체일 때도 있고, 대상을 바라보는 객관적 실체(시인)일 때도 있다. 대상이 스스로 발언할 때는 편견에 휩싸인 인간을 향한 일침을 날리고 있으며‘ 밤마다 별처럼 찾아오는 그리움/ 그것 하나만으로도 내 생애는 빛나/ 이 어두운 숲도 다 밝히거늘// 이걸 모르고 사는 / 네가 홀아비(「 홀아비꽃대」 2.3연), 대상에 대한 묘사를 행할 때 그 대상은 화자의 반성을 일으키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상쾌한 보복 / 나는 오늘 또 한 수 배웠다’(「질경이」부분)와 같이 객관과 주관을 넘나드는 시법은 엄정한 상상력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서 몇 편의 부제가 붙은 시들은 인간과 대상과의 교섭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과의 소통으로 그 외연을 넓히고 있음을 볼 때 시 읽기의 즐거움은 배가된다.

 

회리바람꽃이라는 부제가 붙은 휘파람새가 그 예를 들어본다.

 

기름을 발라 꼬았을까

매끈매끈한 목소리 질기다

저 숲도 잡아당기고

또 저 강도 끌어온다

 

가수

입에서 뽑아내는 금빛 선율로

산 하나 거뜬히 동여맨다

 

내가 묶인다

어찌할꼬, 이 유쾌한 부자유

 

시는 짧지만 이 시가 품고 있는 이야기는 다양하고 풍성하다. 휘파람새는 우리나라를 통과하는 나그네새로 4월경에 찾아와 알을 낳고 가을에 떠난다. 회리바람꽃은 바람꽃의 한 종류로 4,5월에 꽃이 피고 7월 경에 열매를 맺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이 시를 회리바람꽃이 휘파람새 소리에 넋이 빠진 풍경으로 읽어도 좋고, 화자(시인)가 휘파람새 울음소리를 들으며 회리바람꽃을 찾아낸 끝에 감탄하는 시로 읽어도 좋다. 유類와 종種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활달한 상상력이 만개한 시를 읽을 때 나오는 탄성은 이러한 것이다.

 

내가 묶인다

어찔 할꼬, 이 유쾌한 부자유

 

* 이 글은 계간 << 리토피아 >> 2016년 가을호에 게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