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 百家爭鳴의 작가정신
나호열
1.
지난 일 년 사이에 꽃처럼 피어났다가 스러진 이야기들이 있다. 이름께나 있는 소설가의 표절을 놓고 진위를 가리는 논쟁, 그런가 하면 패기만만한 젊은 작가의 외국 문학상 수상과 그 언저리에 들러붙는 한국문학 위상의 세계화, 날로 비대해가는 문학상을 둘러싼 유쾌하지 않은 뒷말들, 최근 SNS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성性을 둘러싼 문인文人간의 추문들, 급기야 우리나라 현대문학의 첫 장을 연 시인과 소설가의 이름을 빌린 문학상 제정 계획 발표(비록 무산되기는 했지만)로 야기된 친일파 청산의 문제까지, 설왕설래 說往說來는 풍성했으나 진지한 반성이나 전망이 제시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자신을 놔둔 채 패거리 문학을 질타하는 사람들의 속셈을 알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 문학계를 가로지르는 사소한(?)이런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검토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춘원 春園이나 육당 六堂, 미당 未堂의 친일 행적으로 말미암은 그들의 한국문학에 던진 첫 발걸음은 일고의 가치 없이 매장埋葬되어야 마땅한 것일까? 그래서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는 명확해진다. “작가(시인)가 지녀야 할 정신이나 덕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요즘 시단에 횡행橫行하는 난해시로 말미암아 독자들이 멀어져간다.”든가, 그리하여 “가난한 문인들에 대한 복지가 문제이다.”라고 하는 걱정도 지금 제기된 작가(시인)정신이 어떠해야 하며, 과연 그런 “작가정신이 작가(시인)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 되어야 하는지?”와 같은 의문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2.
냉정하게 말해서 춘원의「무정」이나 육당의「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오늘날의 우리 문학의 효시嚆矢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친일행각이며, 바로 그 지점에서 “작가(시인)는 어떠해야 한다.”는 모호한 명법 命法이 따라 나오게 된다는 점이다. 작가(시인)는 지식인이며, 공인 公人이기에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남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할 때, 그들의 친일행각은 작가(시인)로서의 본분에서 일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오늘날의 작가(시인)들도 그와 같은 명법에 따라야할 것이다. 과연 수많은 문인들의 사적 생활(공간)또한 그러한 명법에 의해 제어되고 있는가? 한 마디로 작품과 작가(시인)를 분리해서 보아야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문학의 내부에서 충분히 논구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적어도 작가(시인) 자신이 창작자로서 갖추어야 할 규율을 스스로 규정한다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과거와 같이 작가(시인)의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지 않다고 하여도 여전히 작가(시인) 가 지녀야 할 품격은 어디에서든 작동하기 마련인 것이다. 이 글이 진행해야 할 시평 詩評을 접어두고 먼 길을 돌아가고 있는 이유는 각각의 시인들이 지니고 있는 시인정신이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에서이다. 경제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시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이 호기심이 실제로 시를 쓰고 있는 필자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3.
‘산림문학’이라는 특수한 영역이기 때문인지 많은 시편들이 자연과 환경에 발을 묻고 있음은 당연지사이겠으나 ‘자연’과 ‘환경’의 지평이 시인의 삶에 어떻게 치열하게 삼투 滲透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정성적 定性的 감상의 의의임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자연에 대한 찬미를 읊어도 좋고, 환경 파괴에 대한 고발과 고뇌를 그려도 좋다. 자연에 빗대어 자신의 삶을 고백해도 무방하고, 자연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성찰을 노래한다면 더욱 더 좋다. 그러나 독자의 눈을 의식하고, 독자의 수준을 가늠하며 쓴 시는 압축이 풀리고 기계적이고 상식적 인식의 나열에 빠지기 쉽다. 요즈음 유행처럼 번진 난해시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바뀐 환경을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에 도전하는 최근 20~30대 작가에게서 희망을 발견한다. 재래의 언어로 비애를 표현하는 수준에 문학을 잔류시키지 않으려는 태도”(『조선일보』 2016년 9월 8일자)라고 문학을 갈파한 김주연 문학평론가의 주장을 마냥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춘향이 마음 抄.2’ 라는 부제가 붙은 박재삼의「자연」이라는 시를 읽어본다.
뉘라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자연 自然은 글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춘향이의 충만한 연정 戀情을 그리면서 ‘자연’이란 시 제목을 붙이므로써 만물의 이치가 그러함을 포용하는 이 시는 낡은 듯 하면서도 새롭고, 혼자 웅얼거리는 독백 같으면서도 노래로 흥얼거리게 하는 묘미를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뻔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몇 구절의 반짝거림으로 시의 맛을 돋우는 시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고목과 늙어가는 인생을 빗댄 김관식의「고목」 일부분을 읽어본다.
봄 햇살이/ 내 얼굴에 보톡스 주사기를 꽂았다. / 지나온 과거처럼 꾸겨진 주름들이/점점 부풀어 오르면서 /팽팽해졌다.
고목에도 봄이 오면 잎이 돋고 가지가 벋는다. 비록 몸은 늙어가도 봄이 오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우리네 노년의 삶이 중첩되는 이 한 연 만으로도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는 충족되었다고 생각된다. 김금용의 「백두산 천지만 아는 일」 또한 웅혼한 백두산의 표상을 단걸음에 하나의 이미지로 응결시키는 힘이 있다.
늑대 울음소리가 올라온다 / 맑게 씻은 보름달이 백두산을 핥는다 / 겨우내 눈에 갇혔던 산이 출렁인다/ 목울대까지 올라오는 뜨거움에/ 홀로 눈사태가 난다
- 「백두산 천지만 아는 일」첫 연
이와 같이 개인적인 정서를 이미지로 응축하는 힘이 있을 때 시의 생명인 압축과 생략은 독자들로 하여금 연상의 여백을 즐길 수 있게 만든다. 싸리꽃과 쌀밥의 형상을 연결하면서 ‘고리와 고리를 연결하는 산 그리고 싸리꽃’ (김영자,「싸리꽃」 마지막 연)이나 아침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아침 해가 동산 위에 집게발을 /가볍게 올릴 즈음’(박명자,「나무의 아침 표정」첫 연)으로 처리한 기법 또한 예사롭지 않다. 이와는 달리 시인의 대상에 대한 인식을 표명한 시들도 있다. 윤준경의 「편백 숲의 눈물」은 임종국 선생이 평생 일군 편백 숲에서 느낀 감상을 그린 시이다. 숭고한 선인의 업적과 자신의 삶을 빗대는 과잉된 표정이 보이지만 ‘ 그가 이룬 산소의 숲에서 /세월에 마모된 /가슴의 모서리를 다듬는다’는 결구는 과잉된 표정을 충분히 다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연환의 시「저 이팝나무 좀 보아라」도 평범한 진술의 전개를 보이지만 마지막 연으로 말미암아 자연의 현상에서 얻는 소중한 삶의 교훈을 거두어들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에미야
둘째가 말을 좀 늦게 배운다고
남들보다 늦되다고
걱정하지 마라
저 이팝나무를 보아라
제 때가 있지 않는냐
마지막으로 필자의 눈길이 가 닿은 곳은 이진옥의 「산자고 山慈姑」와 진란의 「봄눈이 가렵다」이다. ‘산자고’라는 봄처녀라는 꽃말을 가진 꽃과 시인의 대화가 자근자근 귓가에 맴도는 나르시즘이 ‘ 꿈결인듯/ 조용히 피었다가 스러지는 전설 속의 그 많은 봄’이라는 마지막 연에서 삶의 여정을 뒤돌아보게 하는 판단중지의 순간을 맞이하게 만드는 공력이 돋보인다. 진란의「봄눈이 가렵다」는 알레지를 일으키는 포자를 봄눈으로 대치하면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애틋하게 교직하는 긴 걸음이 오래 시를 매만진 시력 詩歷을 드러내고 있다.
4.
기존의 가치체계를 무너뜨리는 전복 顚覆의 의식이, 가보지 않은 길을 스스로 걷겠다는 의지가 시인이 가져야 할 정신이다. 시인이기 때문에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가 무엇인지 회의 懷疑하면서 무수히 정의의 탑을 쌓고 무너뜨리는 존재가 시인이다. 오늘날 우리 시단에 장애로 남아있는 문제는 언어를 탐험하고, 언어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실을 외면한 채 손끝으로 재주를 부리며 허명에 매달린 그림자들이 펄럭이고 있음이다. 다시 돌아올 새 봄에 태어날 시들이 벌써 그리워지는 시간이다.
* 이 글은 『산림문학』 2916년 가을 . 겨울호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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