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우리나라 풍류의 큰 산맥을 이룬 대학자다. 우리 사상에는 크게 세 줄기의 흐름이 있다. 하늘같은 자기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철저히 수양에 몰두하는 수양철학의 흐름, 이 세상을 지상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정치적 실천철학의 흐름, 하늘같은 높은 차원에서 모든 것을 아우르며 초연하게 살아가는 초탈원융철학의 흐름이 그것이다. 이 세 흐름은 고려 말 이색이라는 ‘거대한 호수’에 흘러들어가 하나로 합류되었다가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다시 세 줄기의 흐름으로 나뉘어 흐른다.

 

세 줄기 흐름의 최고봉을 이룬 대표적 선비는 공교롭게도 16세기에 동시에 출현한다. 수양철학의 최고봉은 퇴계 이황, 정치적 실천철학의 최고봉은 율곡 이이, 초탈원융철학의 최고봉은 남명 조식이었다.

 

남명은 1501년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났다. 퇴계와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시대를 살았다. 한국사상의 핵심은 천인무간(天人無間) 사상이다. 천인무간 사상이란 하늘과 사람이 사이가 없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사상이다. 이는 훗날 천도교의 핵심 교리인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늘은 자연과 인간사회를 포함하는 전체로서, 인간의 모든 요소를 포괄하면서 초월한다. 그러므로 천인무간을 전제하는 한국 성리학은, 하늘에 비중이 주어질 경우, 세속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유학· 노장철학·불교 등을 포함하는 초탈원융철학의 성격을 띠고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초탈원융철학의 흐름을 이어받는 사상가들은 세속의 정치에 초연하면서 유학·불교·노장철학 등을 융합한다. 유학과 불교를 융합한 대표자는 매월당 김시습이다. 그리고 유학과 노장철학을 융합한 대표자는 화담 서경덕과 남명 조식이었다.

2 산해정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천하길지에 자리하고 있어 아늑한 모습이다. 김경빈 기자

 

2 산해정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천하길지에 자리하고 있어 아늑한 모습이다. 김경빈 기자

 

과거 준비 『성리대전』읽던 중 종교적 체험
남명은 5세 때 부모를 따라 한양으로 이주하여 줄곧 한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남명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사람에 대해서만 가볍게 여길 뿐만 아니라 세상 자체를 가볍게 여겼다. 부귀, 영화, 재물, 이로운 것 등을 보더라도 무시하기를 풀이나 진흙처럼 생각했다. 그리하여 늘 세상의 일을 잊어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보면 세상사에 초탈하려는 기질을 타고난 것으로 보인다. 남명은 18세 때 노장철학자인 성운과 이웃하면서 노장철학에 심취한다. 노장철학에 심취할수록 세속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기 어려웠다. 그러니 과거시험 같은 것에는 안중에도 없었다. 과거에 응시하라는 어머니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어 마지못해 과거에 응시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과거에 도전하게 된 게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과거 시험 대비를 위해 『성리대전』을 읽던 도중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세상의 본질과 현상,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인 성리학의 핵심과 원리를 『성리대전』을 통해 깨닫게된 것이다. 세상 만물은 이(理)와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 이(理)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본질이고, 기(氣)는 시간과 공간에 의해 제한되는 물질적 존재이다. 사람을 구성하는 두 요소는 마음과 몸이다. 마음의 본질은 이(理)이고 몸은 기(氣)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몸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의 본질을 회복한다면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로 바뀐다. 성리학의 세계를 접한 남명은 아찔한 충격을 받는다. 훗날 이 때의 경험을 술회한 게 기록으로 남아있다.

 

“문득 아찔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부끄럽고 위축되어 정신이 아득하였다. 배움의 내용이 성리학 이상 가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마터면 한평생을 그르칠 뻔했다. 그전에는 윤리 도덕이나 인간의 일상생활이 모두 영원하고 무한한 진리가 표현된 모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소홀히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여 점차 그 본령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때의 기쁨은 마치 어린아이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어느 날 홀연히 인자한 어머니의 얼굴을 발견하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것과 같았다.”

남명은 구도자가 되었다. 학문의 길은 구도의 길이 되었다. 30세 가량 되었을 때 학문이 거의 완성단계에 접어들었을 정도였다. 큰 깨닫음을 얻은 남명은 처가가 있는 김해로 내려갈 결심을 했다.

 

『장자』에는 붕(鵬)이라는 새가 구만리 상공으로 날아올라 남쪽 바다로 날아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장자』에서는 남쪽 바다를 남명(南冥)이라 했다. 그의 호 남명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구만리 상공으로 날아오른 붕처럼 세상을 초탈한 상태로 남쪽 바다가 있는 김해로 날아간 남명은 그곳에 정자를 짓고 산해정(山海亭)이란 이름을 붙였다. 산해정은 태산에서 바다를 내려다본다는 뜻이다.

 

3 산해정 건물에는 신산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마루 뒷 편에 산해정 현판이 걸려 있다.

 

3 산해정 건물에는 신산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마루 뒷 편에 산해정 현판이 걸려 있다.

 

산해정은 경남 김해시 대동면 대동로 269번 안길 115(주동리 737)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원래의 산해정은 소실됐으나 몇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중건돼 오늘에 이른다. 조선 선조 21년(1588)에 김해부사 양사준이 향인들의 청을 듣고 정자의 동쪽에 서원을 짓다 왜란으로 중지된 것을 광해군 원년(1609)에 안희·허경윤 등이 준공하여 신산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그 후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순조 20년(1820)에 송윤중 등이 다시 중건했다.

산해정을 품은 주위의 산세는 수려하다. 정자엔 신산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마루 뒷 편에 산해정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산해정은 신산의 품에 안겨 있다. 산해정 마루에서 바라본 전망 또한 일품이다. 주민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산해정 앞이 바다였다고 한다. 왼쪽으로 솟아있는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은 까치산, 오른쪽으로 솟아있는 우백호에 해당하는 산은 돛대산이다. 까치산과 돛대산이 마주보고 있는 모습 또한 정겹다.

마침 산해정을 찾은 풍수지리학회 회원들과 조우했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산해정 뒤의 신산은 복호(伏虎), 즉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다. 산해정의 위치가 산의 정 중앙에 위치하지 않고 산의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는 듯이 보이는 이유를 물었더니, “산이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흘러내렸기 때문에 그 쪽에 집을 앉히는 것이 산의 맥과 통한다”고 설명했다. 오는 길에 동네 어구에서 멀찌감치 바라보니 과연 산해정의 장소가 신산에 잘 안기는 가장 편안한 장소임을 알 수 있었다. 풍수지리학회 회원들의 천하길지(天下吉地)라는 설명이 아니더라도 산해정의 위치는 참으로 좋은 곳임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장소에 있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오래 머물러 싶어진다. 산해정이 바로 그런 곳이다.

 

4 남명 조식 선생의 초상화. 김경빈 기자

 

4 남명 조식 선생의 초상화. 김경빈 기자

단성현감 사직 상소문, 조정 뒤흔들어

남명은 이곳에서 18년간 강학을 했다. 이후엔 다시 고향 합천으로 돌아가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합천에서 12년간 많은 제자를 길러낸 남명은 61세가 되던 해 지리산 아래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 산천재(山天齋)란 이름의 정사를 짓고 이주했다. 풍류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다. 산해정에서의 삶이 수양과 강학으로 일관된 삶이었다면 합천에서의 삶은 교육에 전념한 삶이었고, 산천재에서의 삶은 초탈원융철학으로 소요한 삶이었다.

 

남명의 일생은 세상사에 초연한 삶으로 일관했다.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명종 10년(1555년) 남명에게 단성현(경남 산청)의 현감이란 벼슬이 내려졌다. 그의 나이 55세때다. 남명은 벼슬을 내리는 임금을 향해 단성현감을 사직하며 상소문을 썼다. 조정을 뒤흔들어놨던 상소문의 한 구절은 간담을 서늘케 한다.

“대비(문정왕후)는 외부와 두절되어 있으니 깊은 궁궐 속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며, 전하는 어리니 단지 선왕의 고아일 뿐입니다. 이 수많은 천재와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진 민심을 무엇으로 감당하고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에게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이런 상소문을 쓸 수 없다. 당시 사관과 경연관들의 적극적인 만류가 없었다면 아마 사형을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기상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어졌다. 임진왜란과 구한말, 그의 기상을 이어받은 제자와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켜 목숨을 바쳤다. 남명의 기상은 이처럼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이기동
성균관대 동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