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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매산과 지리산 바래봉을 가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5. 13. 00:43

봄의 끝자락, 그래도 철쭉이 있다

입력 : 2016.05.12 04:00

지금이 한창, 황매산과 지리산 바래봉을 가다
녹음 사이로… 우아하게 출렁이는 진분홍빛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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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황매산 철쭉 군락지의 철쭉이 지난주 태풍급 강풍을 견뎌내고 꽃을 피웠다. 사람 머리만큼 자란 철쭉은 꽃밭보다는 꽃숲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황매산과 지리산 바래봉의 진분홍빛 철쭉은 산철쭉이다. 같은 진달래목인 철쭉은 연분홍빛을 띤다. 소백산 일대에서 6월 초에 많이 보인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철쭉은 한반도에서 초여름인 6월 초까지도 피어난다. 평지 철쭉이 다 졌다고 의기소침하지 말자. 5월 하순이면 소백산 연하봉과 비로봉은 연분홍색 철쭉으로 물든다. 비슷한 시기 덕유산 향적봉 일대는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색 철쭉이 향적봉에서 남덕유 육십령까지 20㎞가 넘는 등산로를 따라 핀다. “봄철 덕유산은 철쭉 꽃밭에서 해가 떠 철쭉 꽃밭에서 해가 진다”는 말도 있다. 태백산 철쭉은 장군봉에서 천재단에 이르는 능선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유일사에서 장군봉으로 가는 길이 좋다고 한다. 6월 초에 만개한다. 한라산은 5월 말부터 6월 초에 걸쳐 철쭉이 피는데 철쭉 등산 대회 루트(어리목광장→윗세오름→영실)가 철쭉을 보기에 좋다.

합천 황매산

황매산(1108m) 철쭉 군락지는 초록 반, 진분홍 반이었다. 이파리와 꽃이 함께 나오는 철쭉의 매력을 십분 살리고 있었다. 약 35만㎡ 면적의 군락지를 보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예년에 비해 꽃이 절반 수준이라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꽃 없어요 없어." 경남 합천에 있는 황매산 기슭 한 휴게소에서 관광객이 건넨 대답에 힘이 빠졌다. 지난주 최대 풍속 초당 40m가 넘는 태풍급 강풍이 이틀 동안 황매산을 강타하면서 만개할 시기를 맞은 철쭉이 상했다. 주최 측은 곳곳에 "강풍으로 철쭉꽃이 많이 낙화했습니다. 황매산을 찾아주신 관광객 여러분의 많은 이해를 부탁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붙여뒀다. 철쭉이 예년 같지 않다는 말은 사실일 터. 비단처럼 깔려 있어야 할 철쭉의 바다에 녹색 잎사귀가 곳곳에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꽃도 성치 않은 모양새였다.

황매산 

 

1 황매산 철쭉 사이에서 10일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뒤편 늘어선 산은 한 폭 수묵화 같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2 경남 합천 황계폭포

 

그러나 예년의 기억이 없는 눈에 황매산 철쭉은 압도적이었다. 비유하자면, 잠실야구장 외야석 꼭대기에서 아래 관중석을 내려다본다. 관중석은 죄다 철쭉으로 뒤덮여 있다. 황매산의 철쭉이 그렇다. 꽃 속에 둥실 하고 떠 있는 기분이다. 꽃은 강풍을 버티고 강인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우거진 철쭉은 성인 머리 높이를 훌쩍 넘기는 '철쭉 터널'을 만든다. 꽃밭이 아니라 꽃 숲에서 노니는 기분이다.

철쭉은 신라 향가 '헌화가(獻花歌)'에서 수로부인이 꺾어달라고 했던 절벽에 핀 꽃이라고 한다. 평지보다는 산지를 좋아한다. 황매산 철쭉 군락도 해발 900m에 있다. 차로가 근처까지 뚫려 있어 주차장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다. 덕분에 남녀노소 쉽게 찾을 수 있다. 하루 5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리는 철쭉축제 기간(1~22일)에는 주말이면 원활한 출입을 위해 일방통행으로 바뀐다.

올봄 황매산을 찾는다면 관련 사진은 찾아보지 않고 떠나기를 권한다. 최적의 상태를 박제한 과거의 기록과 비교하면 현재 황매산 군락지는 초라하다. 황매산을 찾아 지금보다 꽃이 딱 2배 더 피어 있는 풍경을 상상해보자.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오히려 관람객이 줄어든 지금이 황매산을 찾을 적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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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분홍이 곧 몰려올 녹음이라는 적과 맞서고 있었다. 철쭉으로 뒤덮인 지리산 바래봉 인근 팔랑치는 삼한시대 마한의 왕이 8명의 장군을 배치해 진한의 습격을 막으라고 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지리산 바래봉·팔랑치

소설가 문순태는 중편 ‘철쭉제’에서 “삼십여 리를 덮어버린 것 같은 꽃밭은 불난 것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고 했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맞은 철쭉의 분홍빛이 더 진했다. 남원 운봉읍에서 지리산 바래봉(1165m)에 오르는 길은 봄 철쭉을 벗 삼아 걷는 대표적인 산행길이다.

길 양옆으로 철쭉이 늘어선 오르막길을 1시간 30분가량 오르면 바래봉과 팔랑치(989m)로 가는 길이 나뉘는 ‘바래봉 삼거리’에 도착한다. 바래봉 철쭉은 만개하기 직전이라 팔랑치를 향해 ‘산철쭉 군락지’라는 팻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약 1㎞를 걷자 온통 푸른 지리산 연봉(連峰)과 능선을 병풍처럼 두른 진분홍색 팔랑치가 눈앞에 서 있었다. 팔랑치는 지리산 최대 산철쭉 군락지다. 사람 머리만큼 솟은 철쭉이 눈을 가득 채운다. 팔랑치에 도착하자 잠시 비가 그치고 해가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햇살에 철쭉꽃잎에 앉은 물방울이 빛났다. 채 피우지 못한 꽃망울도 군데군데 눈에 들어왔다. 팔랑치 주변은 8일쯤 철쭉이 만개할 전망이었지만 아직 틔우지 않은 꽃망울도 가지마다 두세 개씩은 있었다.

삼한시대 진한에 밀리던 마한(馬韓)의 왕이 지리산 깊은 산 속으로 피난해 북쪽 능선에 8명의 장군을 배치해 지키게 했다는 데서 팔랑치(八郞峙·팔령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나무 데크 길을 따라 철쭉으로 둘러싸인 팔랑치에 올랐다. 북쪽으로는 바래봉이 동쪽으로는 천왕봉을 비롯한 지리산 주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한 철쭉이 마한의 장군을 대신해 진한(辰韓)에서 물밀듯 몰려올 녹음이라는 적과 맞서고 있는 모습이었다. 바래봉 올라가는 길 따라 채 움트지 않은 철쭉의 붉은빛도 눈에 들어왔다. 바래봉 일대 철쭉은 5월 중순 지나서 만개한다. 녹색으로 물든 지리산 신록 속 진홍빛을 보고 있자면 능선을 따라 인근 부운치로, 정령치로 계속 발걸음을 옮기고만 싶어진다. 꽃 속에서 능선을 바라보다 보니 비가 다시 쏟아졌다. 애써 발길을 돌렸다.

황매산 지리산 개념도
바래봉과 팔랑치 인근 철쭉 군락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물이라고 한다. 운봉읍에 1971년 면양목장이 생기면서 양을 방목해 키웠는데 이 양이 못 먹는 철쭉만 남기고 잡목과 풀을 먹어치우면서 군락이 생겼다. 면양목장이 문을 닫은 뒤 남아 있는 철쭉 군락에는 산과 꽃을 찾아온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바래봉의 철쭉은 개화 시기가 해발고도에 따라 다르다. 평년 기준으로 하단부(해발 500m)는 4월 26일~5월 2일경, 8부 능선(해발 900m)은 5월 8~10일경, 정상 능선(해발 1000m)은 5월10~25일경이다. 빨리 피고 빨리 지는 꽃, 늦게 피고 늦게 지는 꽃. 각자 피어야 할 때 피고 또 진다. 사람에게도 자신의 때가 오고 또 간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철쭉이 피고 지는 사이 여름은 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