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현장과 죽음의 리얼리티Reality
나호열
죽음은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없는데, 죽음이란 실제로 죽음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없지만, 죽음이 일어났을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해를 입을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면,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죽은 사람에게는 나쁜 것이 아니다.
- 에피큐로스 Epicuros
현장現場만큼 강열한 인상印象을 남기는 것은 없다. 인상의 힘이 강력할수록 현장의 기록은 선명한 만큼 건조해진다. 조광현 시인의 다섯 편의 시는 우리 곁에 가까이 있음에도 짐짓 모르는 체 하거나, 결말을 유보하고 싶어하는 노년의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경계를 환기시킨다. 그러면서 살다가 사라져야 하는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유를 슬며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모르는 체 하거나, 유보시키고 싶은 ‘죽음’의 현장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이 서늘해지는 일인데, 지금이 바로 그런 시간이다.
단순히 인간수명의 연장이 축복이 아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병든 채로 생명을 연장한다는 것, 자아에 대한 의식을 저 멀리 두고 식물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재앙임을 모르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본능은 자신에게 당도한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을 마지막까지 놓지 않기 때문에 삶은 애달파지고 두려워지게 된다. ‘5 병동의 김 노인’이나 ‘이어폰을 낀 그녀’나 모두 ‘마지막 정류장에 머문 사람들’이다. 마지막 정류장, 다시 말해서 요양병원은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온 종착지이다. 건강을 회복하고 돌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고, 영구차에 실려 세상을 떠나야 하는 사람이 더 많은 곳이다. “꼴깍 숨 넘어갈 때까지/ 한 웅큼 알약만으로 견디기”(「5 병동의 김 노인」) 위해, “뇌출혈, 강직성 사지마비, 의식마저 혼미”(「이어폰을 낀 그녀」) 해지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다. 태평양을 휘저어 다니었던 그가, 문주란의 노래를 좋아하던 그녀가 우리의 어제였는데 아쉽게도 우리의 미래가 어찌 될 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조금 전의 그들은 나/그들은 조금 후의 나일 뿐”(「어떤 배웅」 4연)이라는 사실에 선뜻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인 것이다.
근대자연과학은 이 세상이 확실한 법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시켰지만, 그와 동시에 그 법칙은 변화에 의해 ‘불확정성의 원리’에 제압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용인하게 만들었다. 이 불확정성의 원리는 우리 삶의 곳곳에 파고들어 오늘날의 삶은 더 한층 곤고해지고 위험해졌다. 대가족제도의 와해로 말미암은 장유유서나 효제孝悌의 정신은 유목 遊牧nomad 과 개인주의로 대체되어 버리고 말았다. 병들고 늙어도 스스로 몸을 일으켜야만 하는 시대를 맞이하여 노후에 대한 준비를 역설하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는 까닭이 그러하다.
‘경제적으로 여유를 가지고 아직은 건강하다면 70대가 가장 행복하다’는 미국심리학회의 연구 결과는 우리의 삶이 예전 보다는 더 치밀한 계획과 미래에 대한 예측, 자기 관리에 의해 영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인생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노년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지나온 반의 삶을 반듯하게 기획하고 예측할 수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이보다는 참살이well- being가 잘 죽음well- dying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노후 준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죽음에 대한 학습을 중요시하는 태도야말로 생명에 대한 존중감을 높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의 문화 인자因子가 그러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삶과 죽음을 대립 항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삶의 연장선상에서 죽음을 차분히 응시할 수 있는 내공을 쌓는 일 말이다.
시인이 내려놓은 시들이 우리들에게 보여준 풍경들은 장자의 물아쌍망관 物我雙忘觀 이나 불교의 無我論, 더 나아가서 여러 종교의 내세관에 귀의하라는 메시지로 읽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시인이 의도하는 바는 공자가 설파한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생활화를 넌지시 권유하는, 삶 속에서 죽음을 명상하는 내성 內省을 강조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시인은 자신이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에 빠진 적이 있다고 토로한다. 평생을 생명을 지키고, 연장시켜야 하며, 수많은 사망진단서를 쓰면서 느꼈던 죽음에 대한 무감각과 삶에 대한 무력감의 극복은 앞 서 언급한 ‘불확실한 오늘’이 허구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있었다.
벚꽃 만발한 봄날
나는 요양병원 난간에 서서
그를 배웅한다
먼저 가라고, 조금 먼저......
누구는 손짓하고 한숨짓지만
가는 이는 말이 없다
- 「어떤 배웅」 마지막 연
이쯤에서 이 글의 서두에 놓은 에피큐로스의 글을 상기해보자. 에피큐로스는 흔히 쾌락주의자로 지칭된다. 물론 그의 쾌락주의는 물질이나 감각에 의한 타자중심의 쾌락이 아니라 자성自省, 즉 정신적 쾌락을 스스로 체득하는 안정된 상태를 말한다. 그런 관점에서 죽음에 대한 에피큐로스의 주장은 철저히 ‘살아 있음’ 을 인정하고 ‘죽음’은 결코 증명될 수 없는 현상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의식의 상실 여부로 놓고 본다면 의식이 있는 한 죽음은 오지 않은 것이고,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에 죽음은 인식될 수 없는 것이므로 죽음은 그 누구도 체험할 수 없는 미지의 현상일 수밖에 없다. 앞에서 웰빙 well-being과 웰다잉well-dying을 동일선상에 놓은 이유와, 공자의 애이불상을 조광현 시인의 전언 傳言으로 이해하는 이유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음은 참으로 소중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시詩의 다양한 스펙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위의 威儀를 가늠하는 잣대는 대체로 주제의식의 강고 强固, 형상화 形象化, 형상화에 필요한 비유의 적절성임에 있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란한 수사修辭, 상상의 자유로운 행보도 현장성 reality를 앞지를 수는 없다. 거꾸로 강열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현장에의 증언은 비유의 남발이나 무한한 상상의 유혹을 억제시킨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상세히 조망해야 할 시는「이어폰을 낀 그녀」이다. 장편掌篇과 흡사한 산문체의 글은 긴급하면서 순간적으로 벌어지는 위급상황을 묘사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쉽게도 이 글의 초점이 실험적이고 주의를 요하는 이 시에 머무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조광현 시인의 신작시 다섯 편은 요양병원이라는 특수한 현장과 경각에 달린 환우들, 그리고 그 환우들을 의술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하는 의료인의 슬픔을 그려내면서 살아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살아 있는 우리가 오늘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바람보다 가벼운 배낭 하나 매고
지는 노을 하나 어깨 위에 걸치고
그냥
총총히 가야 하리, 뒤돌아보지 말고 가야 하리
- 「귀향길」 마지막 연
우리 눈에 익숙한 위와 같은 결구는 그저 머리 속에 맴돌다 사라지는 허언 虛言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방하착 放下着, 마음을 내려놓자고 하면서도 그리 못하는 까닭은 절대절명의 순간이 내게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누구나 서서히 꺼져가는, 점점 길이가 짧아지는 촛불과 같은 생명을 지니고 있으나 그런 사실을 직시하기도 힘들고, 초월하기도 힘든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읊조린다.
오랫동안 이곳에 머문 당신은 어땠습니까
그동안 당신은 어떤 애절함에 떨었는지요
속눈썹 짙은 당신의 눈에 시종 이슬이 맺혔습니다
그래 모든, 일에 목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렴풋 당신과 함께 가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속에 또 하나의 다른 나를 있게 한 당신
나는 종내 당신에게 세뇌됐습니다
- 「머물러 있겠습니다」 4,5연
먼 소문으로 듣기를, 미국에서는 요양원 숫자를 줄이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삶의 존엄은 태어나고 자라고, 가족이 있는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므로써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되비추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혈육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과 아픔을 준다. 죽어가는 이를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자괴감,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공포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집을 떠나 응급실에서, 영안실로 직행해야하는 우리의 현실은 죽음에 대한 숙고 熟考가 절실함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조광현 시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죽음을 초월하거나, 허무주의에 경도되는 그 양극단 모두를 거부한다. ‘죽어가는 이와 함께 가는 길이 있다’거나 ‘내 속에 또 하나의 다른 나를 있게 한 당신’과 아직 살아 있는 내가 ‘종내 당신에게 세뇌되었다’는 고백은 어쩌면 번아웃 신드롬에 빠지기도 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서성거리며 자탄에 젖으면서 체득한 시인의 소중한 자산이다. 이 자산을 함께 공유하는 기회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체념의 공간에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추체험 追體驗의 실체로 인정하기에 요양병원이라는 어두운 공간에서 떠날 수 없다고 시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름, 정류장에 머문 이들을 배웅하기 위함이고
어쩜 부족한 나를 보살피기 위함입니다
-「머물러 있겠습니다」7연 부분
지금까지 지구상에 약 1000억 명의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어리석게도 그들에게 다시 묻고 싶어진다. 죽음이 행복했냐고. 그러자 어느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
아! 좋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Kant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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