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의 낭만을 달린다 파도소리에 노래가 절로 나온다
- 검푸른 바다를 곁에 두고 구불구불 해안도로가 이어진다. 동해안 7번 국도에는 그림 같은 해안도로가 곳곳에 숨어 있다. 삼척 새천년도로에서 드론(drone)으로 촬영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겨울바다 해안도로를 달린다. 동해를 옆에 두고 한반도 등뼈를 달리는 7번 국도 여행이다. 흥청거리던 여름 해변은 조용히 잦아들어 있다. 새삼 낭만이라 부르지 않겠다. 작은 번민 정도는 던져버릴 수 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해도 우리가 달려가는 한은 절대로 절망적이지 않다'(김연수 소설 '7번 국도'). 그리하여 숱한 가객(歌客)들이 '겨울바다'를 노래했다.
'겨울바다로 가자 메워진 가슴을 열어보자/ 스치는 바람 불면 너의 슬픔 같이하자/ 너에게 있던 모든 괴로움들은/ 파도에 던져버려 잊어버리고…'(유영석 '겨울바다'·1988년)
볼륨을 높여 노래 들으며 간다. 7번 국도는 부산 중구에서 동해안을 따라 함경북도 온성에 이르는 남북 방향 도로. 전체 1192㎞ 중 휴전선 밑 강원도 고성까지 남쪽 484㎞('위키백과') 구간이다. 4차선 도로로 확장된 곳이 대부분이다.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는 구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곳이 더 많다. 실망할 필요는 없다. 중간중간 옛 도로 또는 해안도로로 빠져 바다를 바로 옆에 두고 달릴 수 있는 길이 곳곳에 숨어 있다.
강원도는 고성에서 삼척에 이르는 해안도로에 '낭만가도'라는 이름을 붙였다. 낭만가도 홈페이지(www.romanticroad.kr)에서 '드라이브하기 좋은 길' '바다가 좋은 해변'을 미리 확인할 수 있다.
- 강릉 헌화로 심곡~금진 해안도로. 멀리 수평선에서 아침 해가 솟아오른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겨울바다 나가 봤지 잿빛 날개 해를 가린/ 갈 길 잃은 물새 몇이 내 손등 위에 앉더군'(김현식 '겨울바다'·1991년)
어느새 바뀐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달린다. 강릉 옥계에서 정동진에 이르는 헌화로는 바다를 바라보며 달리기 좋은 도로다. 그중 심곡~금진 구간은 바다에 딱 달라붙은 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바위에 부딪치며 솟아오른 파도가 도로를 덮친다. 날이 어두워진다. 정동진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이곳은 해돋이 명소로 유명한 곳. 이튿날 새벽 일출(日出)을 보러 다시 나섰다. 심곡~금진 구간에는 곳곳에 군(軍) 초소가 있다. 붉게 타며 솟아오르는 해돋이 장관(壯觀)을 사진에 담으려 초소 가까이 올라가려는데 젊은 장교가 멀리서 달려와 제지했다. "군법에 저촉될 수 있습니다." 주민증과 휴대전화 번호를 달라고 했다. "초소를 찍으면 안 된다"고 했다. 일출 사진 촬영을 막지는 않는다.
'물새도 가버린 겨울바다에/ 옛 모습 그리면서 홀로 왔어라// 굳어진 얼굴 위에 꿈은 사라져가도/ 떠날 수 없는 겨울바다여'(박인희 '겨울바다'·1977년)
헌화로 심곡~금진 구간을 벗어나기로 한다. 낭만가도라 불리는 해안도로가 여전히 이어진다. 삼척 새천년도로, 한재밑 해변과 맹방 해변을 달리는 해안도로가 상쾌하다. 궁촌 해변을 지나 대진항 인근 언덕 길에서 내려다보는 탁 트인 바다에 가슴이 시원해진다. 원평·초곡해변을 지나 내친김에 경북 울진·영덕 방향으로 더 내려가기로 한다. 영덕 해맞이공원에서 아래 바다를 내려다 보니 수평선이 저멀리 아득하다. 7번 국도를 달리기만 한다면 하루에도 갈 수 있다. 하지만 고성·속초·양양·강릉·동해·삼척·울진·영덕을 지나면서 낙산사·하조대·경포대·오죽헌 같은 명소를 한 곳씩만 들르려 해도 이틀이 모자른다.
'겨울바다로 가자 쓸쓸한 내 겨울바다로 그곳엔/ 사랑의 기쁨도 가버린 내 작은 고독이 있으리라'(김학래 '겨울바다'·1985년)
7번 국도를 달리다보면 'AH 6'이라고 쓰인 표지판을 함께 볼 수 있다. '아시안 하이웨이 6번 도로'라는 뜻이다. 이 길 북쪽으로 따라가면 함경남도 원산을 지나 러시아·중국을 거쳐 유럽까지 달릴 수 있다. 지금은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북녘 땅을 그저 '전망'하는 데서 그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