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그곳이 가고 싶다(신문 스크랩)

전북 순창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8. 29. 11:35

전북 순창 채계산 정상의 말갈기같은 암릉에서 바라본 유등면 일대의 풍경. 여기에 서면 부드럽게 휘어져 흐르는 섬진강과 그 주변의 논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체계산에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만, 쉬엄쉬엄 오른다 해도 30분이면 넉넉하다.


순창은, 비유하자면 ‘화장기 없는 여자’와 같습니다. 수더분한 데다 다양한 매력이 있어서 화장을 하는 대로 이렇게도, 또 저렇게도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굽어 흐르는 섬진강의 청류로 순창을 읽을 수도 있고, 곳곳에 숨어있는 명당으로도 순창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저기 손을 대서 만든 경관이긴 하지만 강천산의 그윽한 자연을 앞세울 수도 있겠고, 배롱나무 붉은 꽃으로 담을 삼은 정자의 풍류로 순창을 볼 수도 있습니다. 고추장뿐만 아니라 내로라하는 남도의 먹거리로도 순창은 빛납니다. 순창으로의 여행은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빈 종이 위에 그림을 어떻게 그릴지는 순전히 여행자들의 몫입니다. 적잖이 고민될 것이 분명한 건, 그림을 그릴 재료들이 순창에는 차고 넘치기 때문입니다.

# 이것만 있는 줄 알았다…고추장, 그리고 강천산

누구나 그럴 것이다. 순창이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고추장이다. 순창에 대해 말하자면 도리없이 고추장 이야기부터 할 수밖에…. 순창이 고추장의 명소로 꼽히는 건, 토질이나 기후가 첫 번째 이유겠지만, 고추장의 원조쯤으로 인정받고 있는 건 태조 이성계의 공이 크다. 고려말 이성계가 스승인 무학대사를 찾아 순창의 절집 만일사로 가던 중 점심때가 돼서 농가에서 고추장이 차려진 밥을 먹게 됐다. 그 맛이 어찌나 좋았던지 조선을 개국하고 왕위에 오른 뒤에 순창 현감에게 고추장을 진상토록 하명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이후라는 게 정설. 그러니 이런 얘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설화 정도로 해독하는 게 맞다.

어찌 됐든 순창의 고추장 맛의 특별함은 지금도 느껴진다. 전통 방식으로 담은 순창고추장은 알싸하게 매우면서도 적당히 달큼한 뒷맛이 이른바 ‘공장표’ 고추장과는 사뭇 다르다. 고추장 민속마을에는 전통방식으로 고추장을 담아 파는 40여 업소가 몰려있다. 고추장뿐만 아니라 간장과 각종 장아찌 등도 판다. 저마다 입맛이 다른 만큼 특정 업소를 추천하기 어렵다. 이즈음 가장 인기 있는 것이 보리고추장이라는 게 업소들의 귀띔이다.

압도적인 고추장의 명성 탓이리라. 순창에서 두 번째로 떠올리는 것을 대라면 입을 떼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나마 두 번째로 이름난 것이라면 강천산이다. 가을 단풍으로 이름난 강천산은 맨발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길이 순한 데다 폭포와 구름다리 등의 명소를 여럿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드러운 길은 마사토를 깔아서 조성한 것이고, 들머리의 병풍폭포는 인공으로 만들어놓아 시간에 맞춰 물을 틀고 잠근다. 구름다리도 끊긴 산길을 잇기 위해 놓은 게 아니라, 구름다리가 보여주는 풍경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낸 것이다. 자세히 보면 여기저기가 모두 손을 댄 인공의 것들이라 ‘등산’으로 접근하는 건 실망스러울 수 있겠지만, 녹음과 단풍 속에서 공원을 산책하듯 가볍게 다녀오는 데는 오히려 더 낫다 할 이들도 있겠다. 가벼운 행락객들에게는 어쩌면 아기자기하게 조성한 테마파크 같은 산이 더 반가울 수 있겠다는 얘기다.

순창읍에서 강천산을 향한다면 필시 올라서게 될 792번 지방도로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도 운치가 넘친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는 담양의 것이 이름이 났지만, 순창도 못지않다. 가로수 길을 걷는다고 담양처럼 야박스럽게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니다. 담양은 거기 가로수가 있다는 걸 알고 가는 곳이지만, 순창은 모르고 문득 만나는 것이어서 더 반갑고 감격적이다.

고추장과 강천산. 웬만큼 여행을 다녀본 이들도 순창에서 이 두 가지 외에 떠올릴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못지않은 곳들이 많다. 섬진강이 휘감아 흘러가고, 바위가 뼈처럼 드러난 산들이 도처에 있으며, 명당이 즐비한 순창 땅에서 어디 이 두 곳만 있을까. 이런 때는 다른 것을 다 가리고 마는 고추장의 명성이 순창 입장에서는 좀 억울하기도 하겠다.

# 말 갈기 형상의 채계산 암봉에서 입체감 있는 풍경을 내려다보다

▲울울한 숲사이로 난 순창 강천산의 숲길, 50m 높이에 걸린 구름다리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이다.

채계산. 낯선 산이다. 순창 사람들 사이에서는 강천산, 회문산과 함께 3대 명산으로 꼽는다지만, 산의 크기와 높이로 보자면 다른 두 산에 어림도 없다. 산의 이름은 낭자의 머리에 비녀를 꽂은 모양새라 해서 ‘비녀 채(釵)’에 ‘비녀 계(계)’를 썼다. 바위가 책을 쌓아놓은 것 같다고 해서 ‘책여산’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산은 342m에 불과하다. 그러나 생김새는 범상치 않다. 산세가 마치 말의 갈기처럼 일어서 있다. 갈기 끝은 암릉이다. 거의 똑같은 형상의 산이 나란히 남북으로 두 개가 늘어서 있다. 그 사이로 도로가 지나가는데, 남쪽의 산은 순창 땅이고 북쪽이 산은 남원 땅이다. 그래서 남쪽을 순창 채계산, 북쪽을 남원 채계산이라고 부른다.

갈기로 일어선 산답게 처음부터 끝까지 등산로는 가파른 경사다. 정상까지 단 한 번도 경사를 눕히지 않는다. 경사는 산 아래쪽의 화산옹바위를 지나면서 시작된다. 화산옹바위는 흡사 진흙을 주물러 만든 듯한 기묘한 형상을 한 흰 바위다. 귀기 어린 생김새답게 누구든 바위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여 지나가야 변괴를 면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쉬엄쉬엄 오른대도 30분이 채 안 걸리는 짧은 거리지만, 오르는 내내 가슴이 터질 듯 숨이 가쁘다.

정상에 닿으면 채계산의 진면목을 알게 된다. 등산하는 재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산임에도 그 산을 오르는 까닭은 정상에서의 조망 때문이다. 채계산의 정상 조망을 만드는 건 산세다. 산 정상이 납작한 갈기 모양의 암릉이니, 거기에 서면 180도가 넘는 시야가 펼쳐진다. 저 뒤로 물결치는 산 능선이 펼쳐지고 그 앞으로 이제 막 여물기 시작하는 벼가 익어가는 들판이 펼쳐진다. 그리고 너른 들을 휘감으며 섬진강의 청류가 흘러내리는 풍경이라니….

채계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라서 풍경이 가깝다. 전체의 전경이 한 눈으로는 담기지 않아 고개를 빼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돌려가며 보아야 하는 것도 산이 높지 않아서다. 가까운 풍경이 만들어내는 건 밀도와 입체감이다. 채계산에서 강과 들의 풍경을 더 자세히 보게 되는 것도, 보는 풍경들이 또렷하게 입체감을 드러내는 것도, 다 풍경과 산 정상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아슬아슬한 암봉의 갈기를 따라 놓인 철다리를 타고 산불감시초소까지 건너가는데, 걸음이 자꾸 늦춰졌다. 이런 풍경을 두고 내려가는 게 아무래도 아쉬웠다. 정상의 암릉에 지어둔 나무 덱에 머문 시간을 따져보니 오르고 내리는 시간보다 정상에서 머무는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채계산에서는 누구도 그러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채계산의 매력이라면 이런 풍경을 30분도 안 되는 걸음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 섬진강이 순창에서 그려내는 것들

섬진강은 순창 땅에 여러 명소를 만들어내며 흘러간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곳이 순창과 임실의 경계쯤에서 만나는 장군목이다. 장군목에는 강물이 바위를 휘감아 흐르면서 뚫어놓은 돌개 구멍이 있는 너럭바위들이 펼쳐져 있다. 여기에는 도둑맞았다가 찾았다고 해서 더 유명해진 요강바위가 있다. 요강바위란 물살이 바위에 뚫은 구멍 형상이 마치 요강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게가 20t이 넘는다는 거대한 요강바위는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사 온 외지인이 선심을 쓴다며 마을 주민을 모두 단체관광 보내준 뒤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중장비를 끌고 와서 싣고 내간 것이었다. 도둑은 바위를 정원석으로 팔려고 경기 광주의 한 야산에다 숨겨두었다가 붙잡혔다. 바위는 증거품이 돼 전주지검 남원지청의 앞마당에 놓였다. 남원지청 역사상 가장 무거운 압류품이었으리라. 이 바위를 원래 있던 섬진강가로 옮겨오는 데만 500만 원이 들었다. 이 돈은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거둬서 마련했단다. 요강바위가 3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온 내력이 이렇다. 장구목에서 머잖은 섬진강 강변에는 붉은 폭죽처럼 터진 배롱나무꽃으로 담을 삼다시피 한 정자, 구암정과 어은정이 있다. 정자도 정자지만 붉은 배롱나무꽃의 요염함이 더 돋보이는 곳이다.

또 한 곳 섬진강의 명소가 향가터널과 향가유원지다. 순창에는 예나 지금이나 기차역이 없다. 역은커녕 기찻길도 없다. 그런데 순창에도 기찻길이 놓일 뻔한 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에 순창, 남원, 담양 일대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순창에 철도건설이 시작됐다. 남원에서 순창을 넘어가는 옥출산 아래 터널을 뚫고 섬진강을 건너는 철도 교각도 세웠다. 그러나 철도건설작업이 본격화되기 직전에 해방이 되면서 기찻길은 없었던 일이 됐다. 그때 뚫어놓은 384m의 터널은 마을 통행로로 쓰였고, 교각은 쓸모를 잃고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2013년에 섬진강 자전거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터널은 차량 통행이 통제돼 도보나 자전거만 다니게 됐고, 섬진강의 교각 위에 상판을 얹어 자전거 길이 만들어졌다.

한여름에도 소름이 돋을 만큼 서늘한 터널을 걸어서 건너는 기분이 색다르다. 터널을 나오면 만나는, 섬진강을 건너는 다리도 차량통행을 막았다. 자전거도로에는 바닥을 유리로 마감한 전망대까지 놓았다. 이 길을 찾아가면 차량의 방해 없이 느긋하게 섬진강변을 산책할 수 있다.

향가유원지에 놓인 자전거길 다리 위의 전망대에서 섬진강을 바라보는 모습.




#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는 조선 최고의 명당

조선 땅에는 도합 여덟 곳의 명당이 있다는데, 풍수가들이 그중 맨 앞줄에 세우는 명당자리가 바로 순창에 있다. 이른바 ‘말(馬)명당’으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명당은 인계면 마흘리 대마마을의 용마산 아래의 둔덕이다. 둔덕 끝에 들어선 묫자리가 바로 기운이 맺히는 자리다. 거대한 봉분 모양을 한 용마산 아래에 세 기의 묘가 나란히 들어서 있는데, 이 자리를 찾아낸 함양 박씨 부부의 합장묘가 맨 뒤에 있고, 그 앞으로 박씨 딸의 묘가, 그리고 풍수의 정혈자리에 사위인 광산 김씨 김극뉴의 묘가 있다.

그의 묫자리가 명당임은 문외한의 눈으로 봐도 고개가 주억거려진다. 뒷산의 기가 모이는 둔덕 끝의 김극뉴 묘 앞에 서면 앞으로 탁 트인 들판이 펼쳐지고 양옆으로는 산줄기들이 내달린다.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산이며 묫자리의 모양이 분명하게 명당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이즈음에도 이 묫자리 하나 보기 위해서 전국의 풍수 호사가들이 자주 찾아오는데, 관광버스를 대절해 답사를 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최고의 명당에 묘를 쓴 결과는 어떨까. 놀라지 마시라. 광산 김씨 문중에서 문과 급제자만 265명이 나왔다. 다른 가문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숫자다. 여기다가 정승이 다섯, 대제학이 일곱, 왕비가 하나, 공신이 아홉, 청백리가 다섯이나 나왔다. 조선 중기의 사상가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도 김극뉴의 후손이다. 조상의 묫자리 하나 잘 썼다고 해서 이런 가문의 번창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 해도 신기한 노릇이다.

그렇다면 이 명당 묫자리를 어떻게 잡았던 것일까. 전해지는 이야기가 이렇다. 근방에 천하의 명당자리가 세 곳이 있었다. 풍수에 도통한 박씨 삼형제가 그 자리를 하나씩 차지했는데, 맏형이 그중 최고인 순창의 말명당을, 둘째가 임실 갈담의 잉어명당을, 막내가 순창 인계의 금계포란형을 나눠 갖고 사후에 묻힐 땅으로 정해놓았다. 감찰 벼슬을 하던 맏형이 죽어서 말명당에 묻히려 했을 때, 그의 딸이 명당자리에다 흥건하게 물을 부어놓았다. 다음날 하관을 하러 간 후손들이 묘를 쓰려던 자리에 물이 나는 것으로 오인하고 그 뒤쪽에다 박씨를 묻었다. 딸이 물을 부은 건 아버지 대신 자신의 남편이 명당을 차지하게 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결국 둔덕 끝의 명당자리는 사위 김극뉴가 차지하게 됐고, 그 기운으로 광산 김씨 가문의 번성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명당의 기운은 거기 묘를 쓴 이의 후손에게 발복하는 것이겠지만, 그곳을 찾았다면 명당의 기운이 모인다는 자리에서 마음에 접어두고 있던 기원 하나쯤 내려놓아 보자.

# 지성으로 뜨거웠던 절집 구암사에서 무심(無心)을 보다.

순창에는 절집 ‘구암사’가 있다. 아니, 문장의 앞 뒤를 바꾸자. ‘구암사가 순창에 있다.’ 문장 순서를 바꾼 이유는 구암사의 중량감 때문이다. 구암사의 무게는 절집의 규모나 운치에서 나오는 건 아니다. 사실 구암사는 보잘것없다. 대웅전에 요사체 하나, 산신각 하나. 그나마도 근래 들어 건물을 다시 세운 것이어서 옛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백제 때 창건됐다지만, 그때 세워진 절집이 어디 한둘인가. 게다가 고려 때 구암사는 아예 기록에서 사라진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고, 다시 지어진 것도 6·25전쟁 통에도 흔적 하나 남김없이 다 타버렸다.

그럼에도 구암사를 기억해야 하는 건 그 절집에서 딸려 올라오는 인물들 때문이다. 먼저 스님 설파상언. 그는 300여 년 전 구암사를 화엄의 법맥을 잇는 화엄사찰로 키워냈다.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1000여 명이 넘는 스님이 몰려들었다. 구암사는 세속과 교유하던 절집이 아니라 학승들에게 불법을 가르치던 이른바 ‘불교 아카데미’였던 셈이었다. 설파는 대학승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의 문하에서 더 유명한 제자가 배출됐다. 그 제자가 바로 조선 후기 불교사에서 이름난 석학이었던 ‘백파’다.

백파는 온종일 화두에만 몰두하는, 이른바 ‘간화선’의 경지에 오른 스님이었다. 간화선이란 ‘이 뭐꼬’나 ‘무(無)’자 화두를 받아들고 수행을 거듭하면 불법을 깨칠 수 있다고 믿는 수행법이다. 서산대사가 닦았던 불법도, 경허선사가 도통했던 것도, 성철 스님이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 간화선이었다. 간화선을 내세운 백파는 전통적인 선법과 충돌했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이 추사 김정희였다. 추사는 백파가 인도불교의 전통을 배척한다고 비판했다.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도 추사에 동조했다. 백파와 초의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길었다. 논쟁은 구암사와 대흥사와의 제자로까지 이어져 근 100년 동안 계속됐다. 논쟁은 치열했고 논박은 거침없었으되, 이들은 서로를 존중했다.

백파가 죽고 난 뒤 그의 제자들이 추사를 찾아가 백파의 비문을 부탁했다. 논쟁의 상대방에게 스승의 비문을 부탁한 제자들이나, 이에 흔쾌히 응한 추사나 다 보통 사람들은 아니었다. 추사가 짓고 쓴 ‘백파율사비’는 구암사에 세워졌다가, 6·25 때 사찰이 불타면서 전북 고창의 선운사로 옮겨졌다.

백파 이후로도 구암사에서는 간화선의 학통을 잇는 인물들이 줄을 이어 나왔다. 그중 한 명이 구한말 ‘조선의 천재’라고 불렸던 석전 이한영이다. 석전은 내로라하는 당대의 지성들과 교유하며 학문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서경보, 운허, 청담 등의 스님은 물론이고, 시인 서정주, 조지훈, 신석정, 최남선, 정인보, 소설가 이광수 등이 그와 교유하던 인물들이었다.

구암사에서는 절집에 눈길을 주는 대신, 두 개의 문필봉을 보자. 문필봉이란 학문의 기운을 품은 뾰족한 산봉우리를 말하는데, 구암사 마당에서 정면으로 하나가 솟아있고, 요사체 옆에 또 하나가 솟아있다. 절을 지키던 주지스님은, 이름난 선지식을 길러낸 기운이 여기서 나왔다고 했다. 대웅전 기둥에 한자로 내걸린 주련을 읽는다. 화두 같은 글귀를 풀어보자면 이렇다. “일체 만물에 무심하라/어느 것인들 막히고 걸림이 있으랴/쇠로 만든 소는 사자의 포효에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나니/나뭇조각 인형이 꽃과 새를 바라보듯이…” 주지스님의 밭은기침 소리를 뒤로하고, 기운을 다 해 쇠락해가는 절집에서 돌아 나오면서 ‘무심(無心)’ 두 글자를 마음에 새겼다.


순창 가는 길 = 호남고속도로 전주나들목에서 나와 반월교차로에서 우회전, 26번 국도를 타고 가다 대흥교차로에서 남원, 순창, 정읍 방면으로 우회전해 21번 국도를 탄다. 구이교차로에서 순창, 평화동, 모악산 방면으로 우회전, 27번 국도로 갈아타고 달리면 순창읍에 도착한다. 다른 곳들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말명당’은 찾아가기가 쉽잖다. 내비게이션에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 산 36번지를 치고 가면 마흘리 대마마을 쪽으로 안내하는데, 대마마을 한옥 영모재 앞에 차를 세우고, 건물 왼쪽으로 이어진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명당자리 아래 후손 무덤 3기가 있는데, 그곳이 아니라 가장 위쪽의 묘가 있는 자리가 명당이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순창읍 한가운데에 ‘금산여관’(063-653-2735)이 있다. 1938년 지어진 한옥으로 옛 여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지난 2007년 여관이 문을 닫은 뒤 8년 동안 비어있던 것을 지난해 6월 게스트 하우스로 다시 문을 열었다. 이름은 예전 그대로 ‘금산여관’으로 달았다. 실내는 다시 다듬었지만 외양은 툇마루가 있는 옛 여관 모습 그대로고, 간판도 옛것을 그대로 썼다. 여행자들이 편안하게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1인실 3만 원, 2인실 7만 원. 여성전용과 남성전용으로 나뉘어진 4인실 도미토리는 2만 원이다.



순창에는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한정식을 푸짐하게 내오는 한정식집이 곳곳에 있다. 새집식당(063-653-2271), 옥천골(063-653-1008)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두 곳 모두 음식을 차려 상째 내온다. 1인 1만5000원 안쪽에 푸짐한 상을 받을 수 있다. 더 근사한 상을 받고 싶다면 남원집(063-653-2376)이 있다. 자그마치 80∼90가지 반찬을 차려내는 곳이다. 2층으로 반찬 그릇을 쌓아서 내오는데,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점심에만 손님을 받고 예약은 필수. 최소 인원은 6명으로 1인 2만 원씩이니 한 상에 12만 원이다.


순창 = 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15년 8월 26일 수요일

'그곳이 가고 싶다(신문 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동도, 석모도 2  (0) 2015.09.15
강원도 평창  (0) 2015.09.02
교동도·석모도  (0) 2015.08.28
경북 포항  (0) 2015.08.25
‘천상의 화원’ 태백 분주령(2)  (0) 2015.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