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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소통하려면 서로 불편함 없는 ‘안전거리’가 중요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4. 6. 19:43

올바른 소통하려면 서로 불편함 없는 ‘안전거리’가 중요

언어사회학자 이병혁 명예교수

이동현 기자 | 제421호 | 20150405 입력  
“‘언니 저 마음에 안 들죠?’ ‘왜 눈을 그렇게 떠?’ 같은 표현을 언어사회학에선 ‘저지먼트(judgement·판단)’ 소통이라고 부릅니다. 상대방의 감정을 미리 판단해 표현한다는 의미죠.”

 지난 3일 언어사회학자인 이병혁(67·사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개인 연구실에서 만났다. 두 여성 연예인의 대화를 들려주자 이 교수는 무척 흥미로워했다.

 이 교수는 “우리말의 또 다른 특징은 구술문화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구술문화는 논쟁적이거나 감정적이고 상황에 종속되는 경우가 많다는 분석이다. 반면 문자문화의 성격이 짙은 서구사회의 말은 발화자(글쓴이)와 청자(읽는 이)가 분리돼 소통 과정에서 서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안전한 거리’를 유지한다고 봤다.

 그는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산업화·도시화를 이룬 서구 사회는 ‘낯선 이에게 말 거는 법’을 사회규약으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말 자체의 차이가 아니라 이런 합의가 언어습관에 투사됐다는 것이다.

 -‘저지먼트 소통’이란 어떤 의미인가.
 “심리학이나 언어사회학에서 의사소통을 구별하는 방법이다. 반대는 필링(feeling·감정) 소통이다. 남의 감정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떤 차이가 있나.
 “저지먼트 소통은 개인의 스트레스나 사회의 엔트로피(무질서도)를 높인다. 본질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태도를 주관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저 마음에 안 들죠?’ 같은 소통은 ‘나와 시비 붙자는 거지?’라는 감정적 의미를 담는다.”

 -우리말에 구술문화적 성격이 강하다고 분석했는데.
 “구술문화에 입각한 사고나 표현은 종속적이라기보다 첨가적이고 분석적이라기보다 집합적이다. 장황하거나 다면적이고 보수적·전통적 언어문화를 반영한다. 논쟁적 어조가 강하고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기보단 감정이입적이고 참여적이다. 개별적 상황에 휘둘리기 쉽다. 친밀하고 허물없는 관계를 전제하지만 스트레스가 많은 소통법이다.”

 -권재일 교수는 나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수직적 관계와 친밀도를 가리키는 수평적 관계가 일치할 때 조화로운 소통이 가능하다고 했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대화 중에 독립성과 연관성의 욕구를 동시에 충족하려 한다.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이를 ‘이중 제약(the double bind)’이라고 분석했다. 권 교수의 수직·수평 이야기도 같은 이야기다. 나와 친해지고 싶은 이는 연관성을 높이려 하고 내 독립성을 위협한다. 안전한 거리가 유지되지 않으면 불편함을 느낀다. 우리말의 반말은 방어기제로 작동한다. 문제는 ‘안전거리’가 합의돼 있지 않으면 자기방어가 과잉공격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이다. 때론 자기 약점을 숨기고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려 한다. 우리 사회는 아직 이 안전거리에 대한 합의가 부족하다. 같은 말에 대해 화자와 청자가 다른 판단을 하고, 불편하게 느끼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소통 과정의 갈등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을공동체식 친족어로는 산업화·도시화 시대 계약관계의 타자와 소통할 수 없다. 이질적인 사람은 배제하거나 왕따시킨다. 외국인 노동자나 다문화 가정에 대한 편견이 이런 언어 습관과 의식에서 비롯된다. 호칭을 새로 만들 순 없지만 소통방법을 달리할 순 있다. 결국은 시민교육이 필요하다. 평등한 사회계약에 따라 서로를 존중하는 시민교육을 통해 ‘안전거리’에 대한 합의를 이뤄야 한다. 말은 도구일 뿐 본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