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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vs 기계 ‘권력 다툼’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4. 6. 12:47

한 없이 편하려는 욕망의 끝은 … 인간 vs 기계 ‘권력 다툼’

김대식 KAIST 교수 dskim@ee.kaist.ac.kr | 제366호 | 20140316 입력

인간보다 기계를 높이 평가했던 이탈리아의 미래파 화가 움베르토 보치오니(Umberto Boccioni)의 작품 ‘물체’(Materia, 1912년). 물체는 유치한 인간의 세상을 단 한번에 파괴시킨다.

그들은 정말 믿었을까? 유대인들이 유월절(Passover)마다 아이를 도살해 빵을 구워 먹는다고. 예수님을 팔아넘기더니 이젠 우물에 몰래 이물질을 넣어 선량한 시민들을 병들게 한다고. 무식과 질투는 터무니없는 소문들을 사실이라 믿게 했는지 모른다. 아니, 사실이 아니란 것을 다들 알았는지도 모른다. 단지 지긋지긋한 가난함과 따분함을 단 하루만이라도 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유럽인들은 이렇게 ‘헵-헵’(Hep-Hep) 노래를 부르며 유대인 게토(ghetto·격리 지역)를 불 지르고 약탈하고 학살한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십자군 기사들이 “Hierosolyma Est Perdita”(예루살렘은 끝장났다·H.E.P.)라고 외쳤듯 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설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기계기사’.
신화에도 험한 일 대신할 금속하인 등장
16세기 프라하. 모든 유대인들이 추방되거나 처형될 위험에 처하자 라비(rabbi·율법학자)인 유다 뢰브 벤 베자렐(Judah Loew ben Bezalel)은 결심한다. “골렘(Golem)을 만들겠다”고. ‘사람의 모습을 닮은 존재’라는 뜻의 골렘은 인류 첫 인간이라는 아담의 원래 이름이기도 하다. 흙으로 만들어진, 아직 영혼이 생기기 전 아담이다. 라비 뢰브는 유대 신비교인 카발라(Kabbalah)의 힘을 빌려 찰흙으로 만든 골렘의 이마에 큼지막한 단어를 하나 새긴다. ‘ERNET’(진실)이라고. ‘진실’을 통해 생명의 힘을 얻은 거대한 골렘은 천하무적이었다. 쳐들어오는 군인들을 모조리 무찌르고 피란하던 유대인을 구원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 같은 모습으로 사람 사이에서 살지만 사람이 아닌 골렘은 아름다운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소녀는 골렘을 두려워했고, 거절당한 골렘은 자신을 만들어낸 세상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결국 라비 뢰브는 모든 것을 원상태로 되돌리기로 결심한다. 이마에 새긴 ‘ERNET’ 에서 ‘E’를 지워 ‘RNET’라고. 히브리어 ‘죽음’(RNET)으로 바꿔 쓰자 골렘은 다시 흙으로 변한다. 흙에서 생명, 그리고 생명에서 다시 흙으로 말이다.

게토에 숨어 파리 목숨보다 나을 게 없는 삶을 살던 유대인들. 그들에게 ‘골렘’이란 터무니없는 전설은 ‘수퍼맨’이자 ‘배트맨’이었을 것이다. 나약한 ‘나’를 능가하는 존재. 내가 할 수 없는, 꿈에만 그리던 일들을 척척 해주는 전능한 존재 말이다. 어디 그들뿐이었겠는가?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불의 신(神) 헤페스토스는 험한 일을 대신 해줄 금속하인을 만들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묵자(墨子)와 노반(鲁班)은 인조 새를 만들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수학자 헤론(기원전 10∼70년)은 증기를 통해 움직이는 기계를 만들었다. 이슬람 공학자 알자자리(al-Jazari·1136∼1206년)는 수많은 자동 인형들을 발명했다. 사람 모습을 한 알자자리의 작품을 알게 된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전쟁에 내보낼 ‘기계기사’를 상상했다.

농사짓고 도구를 만들며 야생동물을 길들이고. 인류의 역사는 혁신의 역사다. 혁신은 부(富)를 창출하지만 부는 인구를 증가시킨다. 늘어난 인구는 언제나 늘어난 부를 다시 먹어 치웠기에, 극심한 빈곤과 미개라는 ‘맬서스의 덫’(Malthusian trap)에서 인간은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18세기 영국에선 이 공식이 깨졌다. 증기엔진과 기차가 이 무렵 등장했다. 인간의 팔과 다리의 힘을 수천~수만 배 증폭시킬 수 있는 기계들은 인류의 부를 단시간에 수천~수만 배로 부풀려주었다. 드디어 ‘맬서스의 덫’에서 탈출할 수 있는 원동력을 찾은 것이다. 물론 탈출의 대가는 컸다. 도시는 공해로 파괴되고 노동자들은 착취당했다. 산업혁명 전 존재하던 대부분의 직업들이 사라져 인간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는 듯했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란 이름 아래 기계들을 파괴하기까지 한다. 대량 실업·빈부격차·인류의 노예화. 미래 사회는 희망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산업혁명의 결과는 러다이트들의 걱정과는 정반대였다. 사라진 일자리보다 더 많은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영화 ‘메트로폴리스’(1927년)에 등장하는 ‘기계인간’ 마리아(왼쪽)와 영화 ‘터미네이터’(1984년)에서 인간을 사냥하는 미래 로봇. 
‘멜서스의 덫’ 벗어나게 한 산업혁명
기계에 일자리와 삶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러다이트의 걱정은 기우일까? 인간은 정말 안심해도 되는 것일까? ‘구글’(Google)은 무인 자동차를 개발하고 ‘아마존’(Amazon)은 ‘드론’(drone·무인 비행체)을 사용한 택배 서비스를 계획 중이다. 공장은 완벽하게 자동화되고 첫 전투로봇들이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결론은 명백하다.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기계혁명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이 18개월마다 두 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Moore’s law), 지구의 모든 존재들을 연결시켜줄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데이터 마이닝(data mining·방대한 양의 데이터로부터 유용한 정보를 추출하는 것), 기계학습, 뇌 모방. 마치 중세기인들에겐 신비스럽기만 하던 카발라 같이 개개인의 능력으론 완벽하게 이해하기 불가능한 최첨단 기술들의 조합으로 인류는 이미 기계에게 지능을 심어주고 있다. 이해 불가능한 기술은 마법과 별 차이 없다. 그런 마법 같은 기술로 기계에 생각과 인지 능력이 주어진다면? 그들은 인간의 뇌만이 할 수 있었던 일들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두개골이란 공간적 한계에 구속 받는 인간과는 달리 기계는 무한의 지능과 인지능력을 가질 수 있다. 더 싸고, 더 빠르고, 더 완벽하게 생각하는 기계가 등장하는 순간 수많은 화이트칼라들, 비서·변호사·교수·기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미 ‘신(新) 러다이트’들이 등장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선 성난 시민들이 ‘구글’의 통근 버스 운행을 방해하고 무인자동차 책임연구원의 집 앞에서 반대 시위를 하기도 한다.

골렘의 도시 프라하에서 활동하던 카렐 차페크(Carel Capek)는 1920년 ‘R.U.R’(Rosumovi Umell Roboti·로주모의 보편적 로봇)이란 작품에서 처음으로 ‘로봇’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체코어로 ‘노동’, 즉 ‘robota’를 의미하는 로봇. 인간을 위해 노예로 일하도록 만들어진 차페크의 로봇들은 반란을 일으켜 인류를 멸종시킨다. 그런가 하면 영화 ‘메트로폴리스’에 등장하는 ‘기계인간’은 인간과 기계의 근본적 차이를 묻는다. 기계 같은 삶을 사는 인간과 인간 같은 생각을 가진 기계. 우리는 누굴 더 불쌍히 여겨야 할까?

아픔 모르기에 두려움 없는 기계인간
금속하인·골렘·기계인간·로봇. 인간보다 강하고 튼튼하며 피곤해하지도 않는다. 한 여자의 다리 사이로 태어난 적이 없기에 늙어가는 부모님의 무력함을 알지 못한다. 무덤 안에서 썩어갈 그들의 시체를 상상할 필요도 없다. 아픔을 모르기에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이 없기에 절망을 모른다.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며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고민한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로봇들에겐 무의미한 질문들이다. 영원히 풀릴 수 없는 존재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주어진 이유와 원인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로봇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인간을 위해 일해야 하는 하인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국의 과학 칼럼니스트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는 로봇공학의 3대 원칙을 정했다.

첫째,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가해선 안 된다.
둘째,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가하란 명령 외엔 언제나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셋째, 로봇은 자신의 존재 보호를 위한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해를 가해서도, 인간의 명령을 어겨서도 안 된다.

폴란드의 공상과학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Stanislaw Lem)의 작품 중 이런 이야기가 있다. 우주를 탐험하던 주인공은 새로운 혹성에 도착한다.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듯한 혹성은 끝없이 많은 하얀 접시들로 덮여 있었다. 무한의 시간도 버텨낼 듯이 단단한 접시들은 완벽한 일렬로 정돈돼 있었다. 이 혹성에선 수많은 로봇들이 쉴 새 없이 접시를 닦고 정리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혹성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주인공은 얼마 후 진실을 알아낸다. 전쟁과 빈부 차이로 시달리던 사람들은 지능을 가진 기계를 만들어 명령한다.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 달라고. 모두가 행복하고, 영원히 전쟁도, 걱정도, 불행도, 분쟁도 없는 완벽한 사회를 만들어 달라고. 기계는 생각한다. 그리고 고민한다. 불가능에 가까운 문제였다. 오랜 생각 후 주어진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기계는 실천한다. 걱정·불행·전쟁도 없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완벽한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단단한 접시로 만들어 완벽한 일렬로 세워놓는 방법뿐이었다.

그렇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능을 가진 기계를 만들어 우리는 다시 한번 수천~수만 배 더 편하게 더 잘 살고 싶은 것이다.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보초니(Umberto Boccioni) 같은 미래파 화가들은 인간보다 기계를 더 높게 평가했다. 물질과 자동차와 엔진이 더 가치가 있다고. 유치하고 시시콜콜한 인간들의 이야기는 잊어야 한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모던해야 한다고. 과거를 버리고 미래를 숭배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두렵다. 인간보다 더 강하고, 똑똑하고, 현명할 미래의 기계들. 우리가 그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인간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할 기계들. 그들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일까? 인간은 기계를 지배할 자격이 있을까?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에선 기계가 지능을 가지는 순간, 인간을 사냥하고 멸종시키려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래서일까? 미국 카네기 멜론 대학의 세계적 로봇공학자 한스 모라베츠(Hans Moravec)는 주장한다. 인간이 동물을 지배하듯, 인간보다 우월한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기계들이 선심을 베푼다면 우리는 애완동물 정도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김대식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거쳤다. 이후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낸 뒤 2009년 말 KAIST 전기 및 전자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뇌과학·인공지능·물리학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과 비잔틴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