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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란시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7. 29. 20:26

 

  • 정약용의 18세기 문예모임 '죽란시사' 명단-규약집 실린 계첩

  • 첫 발굴한여름 참외 막 익으면 모인다… 까닭없이 불참할 땐 벌주 석잔

  • 동아일보 | 입력 2013.07.29 03:08 | 수정 2013.07.29 10:09


"살구꽃이 막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막 피면 한 번 모인다.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막 서늘해지면 서지(西池)에서 연꽃 구경하러 한 번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장만하여 술을 마시고 시를 읊도록 한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여유당전서'에 실린 '죽란시사첩서(竹欄詩社帖序)' 중 유명한 구절이다. 다산은 1790년대에 한양의 명례방(지금의 명동)에 있던 자신의 집을 살롱 삼아 동년배의 남인 관료들과 죽란시사라는 문예 창작 모임을 결성했다. 다산이 쓴 죽란시사첩서는 그를 비롯해 채홍원 정약전 한치응 이유수 등 죽란시사 회원 15명의 이름과 결성 동기, 의의를 적은 산문이다.





[1]'죽란시사첩'으로 밝혀진 '익찬공서치계첩'의 표지.[2]새로 발굴된 '죽란시사첩'에 있는 '사약'의 일부. 첫 조항에 '선배들은 융성했던 시절에 많이들 동갑계를 만들었다. 이제 그 취지를 모방하되 범위를 조금 넓혀서 나이 차가 7, 8세가 나더라도 모두 포함시킨다'(줄친 부분)고 써 있다. 안대회 교수 제공





그동안 죽란시사첩의 서문인 죽란시사첩서만 남아 전해져왔다. 그런데 최근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가 죽란시사첩으로 확실시되는 고문헌을 발굴했다. 안 교수가 발굴한 문헌은 개인이 소장한 '익찬공서치계첩(翊贊公序齒(결,계)帖)'으로, 지난해 다산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전시회에 출품된 것이다. 전시 때만 해도 첩 안에 다산의 이름이 있어 다산이 간여한 계의 계첩이자 익찬공이라는 인물의 활동을 기록한 유물로 추정됐을 뿐이었다. 안 교수는 이를 면밀히 고증해 죽란시사첩의 실물임을 확신하고, 고증 내용을 담은 논문 '다산 정약용의 죽란시사 결성과 활동 양상'을 26일 연구모임 문헌과해석에서 발표했다.

익찬공서치계첩은 다산을 포함한 남인 관료 15명의 명단을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한 '서치(序齒)'와 모임의 규약인 '사약(社約)'을 담아 첩으로 묶은 필사본이다. 서치에는 회원들의 이름, 자(字), 생년월일이 정확히 기록돼 있으며 다산이 서문에 쓴 순서와 일치한다. 또 서문에는 회원끼리 나이 차가 많이 나면 거북하다는 이유로 회원의 연배를 다산의 위아래 네 살 이내로 제한했다고 써있는데 서치의 명단은 그 기준에도 들어맞는다.

8개 조항으로 된 사약의 내용도 서문의 내용과 부합하되 좀 더 자세하다. '아들을 낳은 계원이나 자녀를 결혼시킨 계원, 지방 수령이나 감사로 나간 계원, 품계가 올라간 계원은 모두들 본인이 잔치를 마련한다.' '매년 봄가을에 날씨가 좋으면 각 계원에게 편지를 보내 유람할 곳을 낙점하고 꽃을 감상하거나 단풍을 구경한다.'

사약에는 서문에는 없는 '벌칙'에 대한 조항이 있다. '연회할 때 떠들썩하게 떠들어서 품위를 손상시키는 계원은 벌주 한 잔을 주고, 세상 사람의 과오를 들춰내 말하는 계원은 벌주 한 잔을 준다.' '모두와 함께하지 않고 사사로이 작은 술자리를 갖는 계원에게는 벌주 석 잔을 준다. 까닭 없이 모임에 불참할 때에도 벌주 석 잔을 준다.'

안 교수는 "이처럼 규약을 문서로 남기는 문예모임은 드물다"며 "사실 죽란시사는 창작 서클의 차원을 넘어 남인 정치 세력을 결집하는 모임이었는데, 외부에 정치적 결사로만 보여 공격당할 것을 우려해 규약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계첩의 제목에 대해 안 교수는 "죽란시사 회원 중 한 명인, 익찬이라는 벼슬을 지낸 한백원이 소장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당시 계모임에선 관례적으로 계원의 명단과 규약 등을 담은 계첩을 회원 수만큼 제작해 각자 소장했다. 안 교수는 "익찬공서치계첩의 제목 글씨가 본문 글씨와 확연히 다른 데다 '공(公)'이라는 표현은 한백원이 죽은 뒤 붙은 것이어서, 그의 사후에 후손이 임의로 제목을 지어 쓴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안 교수는 또 "본문 글씨는 다산의 필체는 아니나 시사가 결성될 당시 회원 중 누군가가 쓴 것이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