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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로 참선하며 차나무처럼 뿌리내린 정약용의 운명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9. 1. 21:11

 

차로 참선하며 차나무처럼 뿌리내린 정약용의 운명

한겨레 | 입력 2013.09.01 19:50

[한겨레][나무와 성리학]⑧ 차나무와 수신(修身)

"이놈아, 빨리 서둘러라."

"스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서두르세요."

"나도 한 미친놈 때문에 미치겠다."

"대체 스님을 미치도록 한 미친놈이 누구예요?"

"다산이야."

"지금 저와 스님이 있는 곳이 다산이잖아요."

"글쎄 말이야, 그놈이 이 산의 주인이래."

"스님, 대체 이 산을 주인이라 생각하는 놈이 누구예요?"

"그놈이 옆에 살고 있는 여유당이라 부르는 정약용이야."

"네, 정약용이요. 그놈이 유배생활하고 있는 그 정약용이란 말입니까."

"잔말 말고 찻잎이나 빨리 따기나 해. 그놈이 지금 차에 환장해서 눈에 뵈는 게 없어. 자꾸 차 달라고 협박질이야. 성질이 아주 고약한 놈이지. 물에 빠진 놈 살리는 셈 치고 차를 보내달라는 거야. 그렇다고 찻값을 준다는 말도 없어. 막무가내로 달라는 거야."

혜장(1772~1811)은 정약용(1762~1836)의 시를 받은 후 조금 망설였다. 혜장은 자신과 만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정약용이 차를 달라는 태도에 적잖이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그는 정약용이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아 경상북도 포항시 장기로 유배 갔다가 강진에 도착해서 몸이 무척 상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움직였다. 특히 혜장은 정약용의 시 중 '장재'라는 구절에 콧등이 시큰했다. 장재의 '장'은 불가에서 한낮이 넘도록 굶는 것을, '재'는 굶는 것을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약용은 귀양살이에서 먹을 것이 부족해서 점심을 밥 먹듯이 굶었던 것이다. 그래서 혜장은 정약용의 지적대로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준다는 심정으로 차를 보내기로 작정했다.

혜장은 새벽에 일어나 대나무 소쿠리를 챙긴 후, 종을 깨웠다. 종은 영문도 모른 채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 스님을 따라나섰다. 늘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혜장이 도착한 곳은 바로 정약용이 시에서 언급한 백련사 만덕산 자락의 다산이었다. 이곳은 일찍부터 차가 자라서 다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혜장이 도착하니 정약용의 말처럼 다산 차밭에 찻잎이 깃발처럼 퍼지고 창처럼 돋아 있었다. 찻잎이 깃발처럼 퍼지고 창처럼 돋은 것을 '일기삼창'이라 부른다. 이러한 찻잎이 가장 좋은 상태이다. 혜장은 해가 뜨기 전에 찻잎을 따기 위해 종을 다그쳤던 것이다. 찻잎을 한 소쿠리 따자 강진 앞바다에서 해가 서서히 비치기 시작했다. 산길을 따라 고개까지 걸어가니 바닷물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 순간 안개는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혜장은 발걸음을 백련사 쪽으로 돌리려다 다시 바다로 돌렸다. 혜장은 종놈이 그 이유를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혜장이 다시 바다로 고개를 돌린 것은 고개 넘어 길이 끝나는 지점에 자신의 차만 기다리고 있을 정약용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몸이 좋지 않았던 것은
화를 쉽게 다스릴 수 없어서다
그는 차를 마시면서 수신했다
차와 참선이 하나되는 게 다도다
차나무는 옮기면 쉽게 살지 못한다
정약용도 강진 초당에서
오랜 유배생활을 하면서
조선 후기 차 문화를 부흥시켰다


백련사에 도착한 혜장은 따온 찻잎으로 정약용이 시에서 쓴 대로 정성껏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 차를 삼증삼쇄, 즉 세 번 쪄서 세 번 볕에 말렸다. 말린 차를 다시 아주 가늘게 빻았다. 그리고 가늘게 빻은 차를 돌샘의 물로 반죽했다. 반죽한 차를 다시 진흙처럼 완전히 뭉그러지게 찧고 다시 떡 모양으로 만들었다. 혜장이 만든 이른바 떡차는 중국 당나라 때 유행한 차였으며, 정약용이 가장 즐겨 마신 차였다.

혜장은 정약용에게 줄 떡차를 며칠간 만들어 정성껏 봉지에 담아 선반에 올리고 자리를 고쳐 앉아 붓을 들었다. 혜장은 붓을 잡고 잠시 정약용과 만난 순간을 생각했다. 그는 1805년 4월17일, 자신이 거처하는 백련사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찾아온 한 남자를 맞아 한나절을 보냈다. 그 남자는 혜장과 얘길 나눈 뒤 공양도 하지 않은 채 절을 나갔다. 혜장은 문밖까지 나가서 그 남자와 작별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 순간 혜장은 그 남자가 해남 대흥사에서 백련사로 오기 전 꼭 만나고 싶었던 정약용이라는 것을 알았다. 혜장은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모른 채 산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정약용에게 달려가서 옷소매를 붙잡고 백련사로 모셔와 용서를 구하고 밤새도록 <주역>에 대해 토론했다. 혜장은 이날 저녁 정약용의 '광팬'이 되었다. 혜장의 붓놀림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정약용은 혜장이 보낸 떡차를 받자마자 봉지를 뜯어 코에 댔다. 봉지를 여는 순간 차향이 허기진 정약용의 배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정약용은 서둘러 차를 끓이기로 했다. 우선 그는 약천에서 물을 길었다. 약천은 정약용이 초당에 와서 만든 약샘이다. 현재 다산초당 건물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정약용은 직접 끓인 차를 방으로 가져와서 찻그릇에 담고는 코를 그릇에 갖다 댔다. 차향이 코를 통해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천천히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서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몸이 녹아내리고, 그동안 앓았던 속병도 차 한 모금에 나은 듯 마음이 편안했다. 정약용은 차 한 잔을 마신 뒤에야 자신이 마신 차가 혜장이 보낸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좀 미안한 마음에 차를 몇 잔 마신 다음 혜장에게 답례시를 썼다.

정약용은 혜장이 보낸 차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숨기고 오히려 혜장이 차를 적게 준 데 대해 원망하고 있다. 그만큼 정약용은 차에 굶주렸던 것이다. 정약용이 속내를 숨기면서 혜장에게 차를 강하게 요구한 까닭은 차 없이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몸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몸이 좋지 않았던 것은 근본적으로 귀양살이로 영양보충이 쉽지 않았던 탓이지만, 정치적 탄압으로 화를 쉽게 다스릴 수 없었던 탓이다. 정약용은 자기 몸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차가 절실했던 것이다. 정약용은 20대 후반에 정조 앞에서 <대학>을 강의해서 <대학강의>를 편찬할 정도로 수신(修身)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수신은 <대학>에서 천자에서 서인까지 생활의 근본이었다. 정약용이 시에서 자주 당나라의 육우를 언급하고 있는 것도 차를 마시면서 수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우가 정립한 소위 다도는 차를 마시면서 '아름다운 행실과 검소한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다. 차와 참선이 하나라는 '다선일미'는 다도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다산이 머물렀던 다산초당과 혜장이 머물렀던 백련사로 가는 길은 최근 정약용의 유배길 코스로 유명하지만, 곧 도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차나무에 꽃이 피는 겨울에 이곳을 찾으면 정약용의 정신을 한층 만끽할 수 있다. 차나무는 겨울 즈음에 꽃이 피지만, 꽃이 핀 자리에 열리는 열매는 이듬해 다시 꽃이 필 때까지 달려 있다. 그래서 차나무를 열매와 꽃이 만난다는 뜻의 '실화상봉수'라 부른다. 차나무도 직근성의 동백을 닮아 옮겨 심으면 쉽게 살지 못한다. 그래서 전통혼례 때 부모는 딸에게 이혼하지 말고 시댁에서 뿌리를 내리고 잘 살라는 뜻에서 차나무 열매를 줬다. 정약용도 차나무의 삶처럼 강진 초당에서 오랜 기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조선 후기의 차 문화를 부흥시켰다. 그래서 정약용에게 차를 제공한 혜장이 머문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은 단순히 정약용의 유배길이 아니라 한국의 차를 부흥시킨 '찻길'이다.

1762년 경기도 광주군 마현에서 진주목사를 역임한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정약용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 작품을 편찬할 만큼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서양 학문을 접하기 전까지 정조의 측근에서 활동하면서 부승지와 참의까지 승진할 만큼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그는 정조가 죽은 다음해인 1801년 이른바 신유사화로 18년 동안의 유배길을 떠났다. 정약용의 긴 유배 생활은 그에게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차와 함께한 치열한 그의 수신은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는 1808년 귤동의 '다산초당'에서 1천여권의 서적을 쌓아 놓고 유교 경전을 연구했다. 그는 정말 지독한 독서광이었을 뿐 아니라 저술광이었다. 그는 독서와 저술 활동으로 '과골삼천', 즉 복숭아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 얼마나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복숭아뼈에 구멍이 세 번이나 났을까. 마지막까지 스승의 곁을 지킨 애제자 황상(1788~1863)도 죽을 때까지 스승 정약용처럼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강판권 계명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