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시창작 도움자료

시론(詩論)에 대하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7. 26. 23:51

 

시론(詩論)에 대하여 / 유종호 

 

시론은 대개 시의 이상형을 염두에 두고 전개되는 것이 보통이다.

 

시와 시 아닌 것을 판별하는 성질을 개념화하고 추상화해서 시의 본질을 정의하려 든다. 그러나 이렇게 추출된 본질은 어디까지나 이론 차원의 구성물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구체적인 시편에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 원론적인 시론은 잡다한 현상을 포괄할 수도 대표할 수도 없다. 그것은 구상자의 시적 이상을 보여 줄 뿐이다.

 

그럼에도 시의 본질을 설명하는 추상적 시론이 끊이지 않는 것은 잡다한 현상을 간명하게 파악해서 안도감을 얻으려는 인간정신의 경제 지향에서 나오는 것일 터이다. 가령 에밀 슈타이거가 긍정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서정적 자아의 소우주(小宇宙) 속에서 순간적으로 세계가 조명되는 것”이란 서정시의 정의는 매력적이고 계시적이긴 하지만 모든 서정시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

 

 또 낱낱의 시편을 해명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서정시의 일면을 밝혀 준다는 면에서 순간적인 덧없는 설득력을 갖고 있을 뿐이다. 시의 본질을 추구하는 일반론은 회색이고 청청한 것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낱낱의 시편이다. 개개 시편의 구체적 역사적 존재의 독자성을 두루 존중하는 추상적 일반론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

 

시에 대한 갖가지 이론이나 시화(詩話)의 명제치고 구체적인 반증(反證)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없다. 가령 동요와 시의 차이를 말하는 장르이론도 실제 시편 앞에서는 무력해지고 무의미해지는 수가 많다. 기억하기 좋은 시가 좋은 시라는 명제도 마찬가지다. 좋은 시의 특징의 하나가 쉽게 기억되고 외워진다는 점에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를 모든 시편에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이런 명제에 적합한 시편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좋은 시에 대한 일반론을 버리지 않은 것은 잡다하고 혼란스러운 현상을 일단 정리해서 이해하고 소유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혼란과 미궁 속에 서 있다는 망막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일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의 편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정 부분 이러한 명제는 유효성을 갖게 마련이다.

 

•시와 동시

쉽게 기억되고 외워지는 시의 원형은 아마도 짤막한 민요나 동요일 것이다. 동요는 현실의 혼돈을 반영하고 재현하고 노래하는 일을 원천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혹종의 서정시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또 민요는 소박한 현실 이해나 반응을 단순하게 표출한다는 점에서 동요에 근접하는 일이 흔하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김소월의 이 작품은 쉽게 외워진다. 짧아서 쉬 기억되고 또 운율적이다. 엄마나 누나 같은 환정적인 단어가 되풀이되면서 소박한 꿈이 노래되어 있어 누구나 쉬 공감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동요라 할 것인가 혹은 시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부질없는 물음이다. 어린이가 화자가 되어 있어 동요나 동시로 분류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좋은 동요는 또 좋은 시가 된다. 굳이 어린이를 위한 동시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동요라 할 수도 있고 그냥 어른을 위한 시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다. 대개 쉬 이해되고 기억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옛날 촌역(村驛)에

가랑비 왔다.

초롱불 희미한 밤

가랑비 왔다.

 

초롱은 종이 초롱

하얀 역(驛) 초롱

모량역(毛良驛) 세 글자

젖어 뵈는데

 

옛날 촌역(村驛)에

가랑비 왔다.

초롱불 희미한 밤

가랑비 왔다.

 

이 작품은 박목월 동요집《초록별》에 수록된〈가랑비〉란 동요의 전문이다. 알기 쉽고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고 단순한 되풀이가 끼어 있어 동요라 부르는 것이 적정해 보인다. 그러나 박목월이 시라는 이름으로 발표하고 시집에 수록한 작품에도 알기 쉬워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은 적지 않다.

 

대구는

백여리(百餘里)

 

서울은

천리

 

두 줄기 선로(線路)길에

해 저무는데

 

산비들기 구슬프듯

시계는 울고

 

램프에 불을 켜는

역부(驛夫)는 늙었다.

 

시인이 시집 속에 수록한 〈간이역(簡易驛)〉이란 작품 전문이다. 표제나 역부 같은 단어가 조금쯤 어렵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어린이도 능히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가랑비〉나 〈간이역〉이나 소재도 비슷하고 분위기도 비슷하다. 시인 자신의 규정 말고는 두 작품을 가르는 엄격한 척도나 기준은 없어 보인다. 낱말의 난이도에 대한 의식적 배려 정도가 차이점인데 초등학교 저학년이 아니라면 두 작품의 이해에 큰 장애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박목월의 경우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역이나 두 줄기 선로는 시골 어린이에게 먼 곳에 대한 그리움과 여행의 꿈을 안겨주는 유년기 특유의 정서적 풍물이다. 특히 교통망의 발달이 한결 초보단계에 있던 시절에 유년기를 보낸 박목월 세대에겐 그랬을 것이다. 동일한 주재의 색다른 변주는 〈축령산(祝靈山) lll〉에서도 찾을 수 있다.

 

호젓한 청평역(淸平驛)

삼등 대합실

 

설핏한 눈발에

해 다 저무네

 

차표를 안 파요

표가 없대요

 

서울은 백여리

길 끊어지고

 

앞 뒷산 눈보래

해 다 저무네.

 

시와 동요 사이의 경계가 흐릿한 작품의 밀도와 농도는 견고하지도 진하지도 않다. 그러나 최상의 박목월 단시는 훨씬 더 견고하고 농도 짙은 구도를 가지고 있다. 동시와의 차이성이 엷은 작품일수록 작품의 호소력은 여리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이 모든 작품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정지용의 〈말〉이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작품은 동시라 부르는 것이 적정할 만큼 동시에 접근해 있다. “말아 다락같은 말아” 같은 첫줄이 벌써 〈엄마야 누나야〉 같은 동시의 발성법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의 호소력이 여리어지거나 엷어지는 것은 아니다.

 

말아, 다락같은 말아,

너는 점잔도 하다마는

너는 왜 그리 슬퍼 뵈니?

말아, 사람편인 말아,

검정 콩 푸렁 콩을 주마.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데 달을 보며 잔다.

 

독자를 연민과 자비의 세계로 이끄는 이 짤막한 소품은 인지의 충격을 주면서 강렬한 심리적 심정적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가축들이 실은 이산가족으로 살고 있다는 인지는 인간 중심의 세계가 잔혹한 타자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무자각적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정지용의 작품 중에서도 뛰어난 작품이라 생각된다. 자기발견과 세계 발견으로 이어지는 이런 작품을 동시라 해서 가벼이 볼 수는 없다. 훨씬 쉽게 쓰인 유치환의 〈귀똘이〉를 읽어보자.

 

귀똘이

귀똘이

귀똘이가 타이른다

 

목숨은

목숨은

아껴야 하네라고

 

귀똘이

귀똘이

귀똘이가 타이른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서 목숨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은 자유연상의 상상놀이이다. 교훈의 가락이 어른이 쓴 시임을 시사한다. 시와 동요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흔들리고 있는 이 작품을 그러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작품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범하지만 또 아무나 쓸 수 없는 시다. 그런가 하면 동시 흐름이기 때문에 도리어 시로서도 빛나는 작품도 있다. 윤동주의 〈새로운 길〉이 한 사례가 될 것이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청년 화자를 상기시키기는 하지만 어린이가 읽어도 이해하기 쉽다. 동요와 시 사이에 놓인 시편이고 이러한 사례는 적지 않게 발견된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란 낭만주의 시인이나 후속 정신분석의 명제를 상기하지 않더라도 동심과 시심의 유사성은 누구나 시인할 것이다.

 

좋은 동요나 동시가 그대로 좋은 시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동시와 시의 장르 이론을 무색하게 한다. 다시 한 번 중요한 것은 구체적 존재이지 일반론이나 추상적 본질론이 아니다.

 

•짤막한 호흡과 긴 호흡

“서정적 자아의 소우주 속에서 순간적으로 세계가 조명되는 것”이란 서정시 혹은 서정성의 정의는 짤막한 호흡의 시를 예상케 한다. 순간적인 조명은 길게 늘어진 호흡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리듬을 통해서 미를 창조하는 것이 시라고 정의한 가령 에드가 앨런 포의 시론에서 짤막한 호흡의 시편이 칭송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는 “긴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긴 시편이란 말은 단적으로 말의 모순에 지나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시는 영혼을 고양시킴으로써 흥분시킬 수 있어야 그 이름에 값하는 것인데 모든 흥분상태는 생리적으로 순간적이요 짤막하기 때문에 진정한 시는 짤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포 자신의 작품도 우리 현대시의 일반적인 길이에 비하면 상당히 긴 시편이 많다.

 

그러나 어쨌건 낭만주의 시대에 와서 문학 주류로 부상한 서정시가 상대적으로 짤막한 호흡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짤막한 시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외기 쉽기도 하다. 그래서 짤막한 명편은 외국 시에도 우리 시에도 허다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윌리엄 블레이크나 워즈워스나 에밀리 디킨슨의 시편은 널리 애송되는 것이다.

 

오 장미여, 그대는 병들었도다!

밤 중 울부짖는

폭풍 속을 나르는

보이지 않는 벌레가

 

그대의 침상에서

진홍빛 기쁨을 찾아냈으니

이 캄캄하고 은밀한 사랑이

그대의 생명을 망치도다.

― 블레이크, 〈병든 장미〉 전문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 워즈워스, 〈무지개〉 전문

 

예감은 해가 진다는 것을 알리는

잔디밭의 저 긴 그림자

어둠이 막 지나간다는 것을

놀란 풀잎에 알려주는 기별.

― 디킨슨, 〈예감은〉 전문

 

이러한 낭만주의 시인이나 은둔자로 산 여성 시인의 시편들은 보편적인 심성이나 삶의 국면을 간결하고 집약적으로 표현해서 젊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애송되었다. 괴테나 하이네의 서정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현대시인 가운데서도 독자의 기호에 따라 숭상받고 애송되는 시인들이 많을 것이요 김소월에서 정현종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울 것이다. 애송되는 시편들이 대체로 호흡이 짧은 단시라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일본의 전통 시가인 하이쿠가 구미에서조차 널리 수용되고 있는 것도 그 첨예한 간결성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단시만이 과연 시의 정수이며 요체일 것인가?

 

자기 자신의 경험담이 허용된다면 외기 좋은 단시 이 외에도 시의 매력은 가지가지요 다채롭다. 《청록집》에 수록된 박목월의 시편을 거의 모두 암송하다시피 했으나 쉬 외워지지 않아서 더욱 매력 있는 시편도 있었다. 쉬 외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끝내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뜸을 들이고 나서 외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님의 침묵》에 나오는 〈알 수 없어요〉이다. 어떤 계제에 “일찍이 이승길의 눈부신 초입에서 <알 수 없어요>를 통해 삶과 세계의 신비에 귀 기울이고 눈을 활짝 뜨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온몸이 설레는 감동이었지요.”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이것은 진솔한 실토이다. 시편이 하나의 계시처럼 따가 왔고 그것은 드문 경험이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루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의문으로 시종하는 시행이 깊은 샘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물처럼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세계의 모든 현상이 단순한 오동잎이나 푸른 하늘이나 향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발차쥐이기도 하고 누구의 얼굴이기도 하고 누구의 입김이기도 하다는 깨우침은 놀라움과 함께 무한한 외경심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현상의 배후에 있는 수수께끼를 알아내련다는 탐구의 설레임을 안겨 주었다.

 

시가 그리움이나 슬픔의 특권적 순간을 불멸의 순간으로 만들어 주는 마법일 뿐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철리를 시사하는 비법이기도 하다는 생각은 시라는 장르에 각별한 위엄을 안겨 주기도 했다. 아쉬운 것은 《님의 침묵》에 수록된 시 전체가 〈알 수 없어요〉의 깊이와 높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20세기 한국시에서 한 편만 고르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알 수 없어요〉임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물 같은 만해 시편과 달리 초기 혜산(兮山, 박두진) 시편은 되풀이의 수사를 통해서 독자적인 마력을 발휘한다. 그 되풀이도 관형사에서 명사, 동사에서 대명사로 변화를 주면서 다양하게 되풀이되어 단조함을 피하면서 흥을 돋우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새로 푸른 동산에 금빛 새가 날러 오고, 붉은 꽃밭에 나비 꿀벌 떼가 날러들면, 너는, 아아, 그때 나와 얼마나 즐거우랴. 설게 흩어졌던 이웃들이 돌아오면, 너는 아아 그때 나와 얼마나 즐거우랴. 푸른 하늘, 푸른 하늘 아래 난만한 꽃밭에서, 꽃밭에서, 너는, 나와, 마주, 춤을 추며 즐기자. 춤을 추며, 노래하며 즐기자. 울며 즐기자.……어서 오너라.……

― 〈푸른 하늘 아래〉 중에서

 

혜산의 되풀이의 시학은 초기작에서 효과적이지만 메마른 이미지와 관념이 주성분이 되어 있는 후기 작품에서는 상대적으로 퇴색하게 된다. 그러나 초기 시편이 보여 주는 되풀이를 통한 지복(至福)의 도취경은 20세기 한국시의 크나큰 성취의 하나가 되어 있다.

 

이상에서 우리가 보아온 것은 시의 일반론이 하나의 편의로서 수용되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개개 작품을 이해하고 해명하는 데 별 적정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좋은 시 혹은 반복적인 감상과 음미에 값하는 시편은 각각 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으며 이를 총괄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일반론이 성립하기는 어렵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몇 개의 열쇠말로 한 시인의 작품 세계를 총괄해서 설명하는 것도 하나의 편의는 될지 모르지만 적정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이론의 그물에 빠져나가는 다양한 개개 시편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시론은 불필요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지도가 여행자나 현지 답사자에게 몹시 긴요하고 유용하듯이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몇 개의 일반론으로 낱낱의 구체적 시편을 분석할 수도 해명할 수도 없고 그것을 과신할 수 없다는 것일 뿐이다.

 

시론이 가장 유용한 것은 이론을 표방한 시인의 실제 작품을 이해하려 할 때이다. 대개 새로운 세계를 들고 나오는 시인들은 자신의 창작 구상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혹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해에 열의가 없는 독자들을 계몽하기 위해서 이론을 표방하는 법이다. 강력한 감정이 저절로 넘쳐 나오는 것이 시라면서 일상생활의 언어를 채택했다고 말한 워즈워스, 혹은 정신분석에 기대어 잠재의식의 해방을 지향한 초현실주의 시인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리의 경우엔 회화 지향을 통해서 근대성을 추구한 모더니스트 김기림의 비평적 노력이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워즈워스가 시집 ‘서문’에서 표방한 시론이나 김기림이 산발적으로 발표한 시론은 《서정담시집》과 《태양의 풍속》을 이해하는 데 아주 유용한 참고자료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또 영국 낭만주의 시나 한국의 모더니스트 시인을 이해하는 데도 얼마간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몹시 제한적인 부분에 국한될 뿐이요 보편적인 호소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학의 문과 인구가 늘어나면서 이른바 연구란 이름의 시인론이나 작품 연구가 무량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요즘은 외국 철학자의 명제를 열쇠말로 해서 우리 시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고 분석하는 결과물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우연히 상봉한 외국 사상가의 철저한 연구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지만 실제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외국의 사상가도 연구 대상인 우리 시인도 그저 요식행위를 위해 잠정적으로 활용되고 있을 뿐이란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이차문서의 범람 속에서 시와 시인이 문학 외적 지적 체계의 한 예증과 사례로 변하는 것이 문학의 지위 격상인지 지위 격하인지는 쉬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이론의 그물에 걸려 작품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사태가 불어나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모든 분야에서 비판적 절제와 선별적 응용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 유종호 | 1935년생. 1957년 《문학예술》에 〈불모의 도식〉 〈언어의 유곡〉으로 등단. 저서에 《유종호 전집》 전 5권 외에 《시란 무엇인가》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나의 해방전후》 등이 있고 유일 시집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를 2004년에 냈다. 대산문학상, 인촌상, 만해학술대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