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茶山을 생각하며

연표로 보는 다산 정약용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11. 30. 23:24

연표로 보는 다산 정약용

 

 

 

 

* 나주 정씨 가문으로 아명은 귀농(歸農), 관명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美庸)․송보(頌甫), 호는 삼미자(三眉子)․철마산초(鐵馬山樵)․다산(茶山)․사암(俟菴)․열초(洌樵)․열수(洌水)․열상노인(洌上老人)․자하도인(紫霞道人)․문암일인(門巖逸人)·탁옹(籜翁)·태수(苔叟), 당호는 여유당(與猶堂), 카톨릭 세례명은 요한, 시호는 문도(文度)

 

 

 

․ 1세; 1762년(영조 38)

- 음력 6월 16일 오전 10시(巳時)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馬峴, 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부친 나주 정씨(羅州丁氏) 재원(載遠), 모친 해남 윤씨(海南 尹氏)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이복 맏형 약현과 동복형 약전․약종과 동복 누이가 있었다. 이해 윤5월 21일에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죽음을 당하는 참극히 있어났다. 부친 정재원이 이해에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였다.

 

 

․ 4세; 1765년(영조 41)

-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기 시작.

 

 

․ 6세; 1767년(영조 43)

- 부친 임소인 연천(漣川)에 따라가서 경전을 읽기 시작.

 

 

․ 7세; 1768년(영조 44)

- 서당에서 학습 시작.

- ‘山’이란 제목으로 오언시를 지음(최초의 詩)

“ 小山蔽大山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운 것은

遠近地不同 멀고 가깝기가 다른 까닭이라네”

- 천연두를 앓았다. 그로인해 ‘삼미자(三眉子)’란 별호를 가짐.

 

 

․ 9세; 1770년(영조 46)

- 어머니 해남 윤씨(海南 尹氏; 공재 윤두서의 손녀-정약용은 자기가 외가 쪽을 닮았다고 말하곤 했다)를 사별.

 

 

․ 10세; 1771년(영조 47)

-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있게 된 부친에게 경서(經書)․사서(史書)를 수학. 1년간 경전과 사서를 본떠 지은 글이 키 높이가 되었다.

- 10세 이전의 습작들을 묶어 <삼미집(三眉集)>을 만듦.

 

 

․ 13세; 1774년(영조 50)

- 두시(杜詩)를 모방하여 원운에 따라 화답하는 운을 붙여 수백 수의 시를 지었다. 이때로부터 시명을 떨치기 시작.

 

 

․ 14세; 1775년(영조 51)

 

- 운길산 수종사에서 독서

수종사에 노닐며 시를 지음(游水鍾寺)

 

 

․ 15세; 1776년(영조 52)

- 2월 홍화보(洪和輔)의 딸 풍산 홍씨(豊山洪氏)와 결혼, 부친이 복직되자 집을 세내어 한양에서 살았다.

- 부친 호조좌랑(戶曹佐郞)이 되었다.

- 3월 영조 서거, 왕세손 즉위.

- 부친을 따라 경성, 南村 셋집에 거주.

- 장인 홍화보 홍국영의 미움을 받아 평안도 옥산으로 유배.

 

 

․ 16세; 1777년(정조 1)

-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유고(遺稿)를 처음으로 보고, 학문의 준칙으로 삼기로 결심.

- 채제공, 이가환, 권철신 등 성호학파 인사들과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과 교제 시작.

- 가을에 부친의 화순현감(和順縣監)에 임명되자 임지인 화순(和順)으로 따라감

- 청주, 전주를 유람하면서 많은 시편들을 창작.

- 가을에 전라도 동복현(同福縣)의 몰염정(勿染亭)과 광주의 서석산(瑞石山)을 유람.

「몰염정유람기」「서석산에서 논 기록」

- 겨울에 중형 약전(若銓)과 화순현 동림사(東林寺)에서 맹자(孟子)를 읽으면서 송유주해(宋儒註解)를 비판. 「동림사독서기」

- 눈내리는 밤에 이벽이 찾아와 경전에 대한 토론을 밤세워 함.

 

 

․ 18세; 1779년(정조 3)

- 2월에 중형 약전과 한양에 있으면서 과시(科詩)를 익혔으며, 태학승보(太學陞補)에 피선.

 

 

․ 19세; 1780년(정조 4)

- 부친 경상도 예천(醴泉)현감으로 전임

- 예천 관청 서재에서 독서

- 반학정에서 글을 읽고 「반학정기」를 지음

- 진주 촉석루를 구경하고 「진주의기사기」를 지음

 

 

․ 20세; 1781년(정조 5)

- 한양에 있으면서 과거에 응시.

- 7월에 딸을 낳았으나 닷새만에 사망.

 

 

․ 21세; 1782년(정조 6)

- 한양 창동(倉洞; 남대문 안)에 처음으로 집을 구입하여 체천정사(棣泉精舍)라 하고 살았다.

- 春日游水鍾寺 詩지음.

- 봉은사에서 글을 일었다.

 

 

․ 22세; 1783년(정조 7)

- 2월 세자(世子) 책봉 경축하는 증광감시(增廣監試)의 경의초시에 합격하고 태학생(太學生)이 됨,

- 4월 회시(會試)에 생원으로 합격. 선정전에서 정조와 최초로 만남.

회현방(會賢坊)으로 이사.

- 詩 過孤山亭遺墟, 上雲吉山, 宿水鍾寺, 三灘絶句.

- 9월에 장남 학연(學淵)이 태어났다.

- 정약전도 가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왔다.

** 이승훈(李承薰)이 사신을 따라 연경(燕京)으로 가서 포루투칼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음.

 

 

․ 22세; 1783년(정조 7)

<游水鍾寺記> 記文 씀.

 

 

․ 23세; 1784년(정조 8)

- 會賢坊 樓山精舍로 이사.

- 여름, 태학(太學)에서 공부하면서 임금이 내린 80여 조항의 의문점을 기술한 『중용강의(中庸講義)』를 이벽(李蘗)의 도움을 받아 작성, 정조에게 바쳤다. 맏형 약현(若鉉)의 처남 이벽(李壁)에게 천주교에 대해서 처음 듣고 서적을 보았다.

- 6월 반제에 뽑히고, 9월 정시의 초시에 합격

** 이승훈(李承薰)이 연경으로부터 서교(西敎)의 서책을 가지고 돌아옴.

 

 

․ 24세; 1785년(정조 9)

- 樓山精舍에서 같은 坊 *然齋로 이사.

- 반제에 거듭 뽑히고, 정시의 초시에 수석 합겨, 11월 감제의 초시에 합격

 

 

․ 25세; 1786년(정조 10)

- 2월 별시(別試) 낙방, 苕川으로 돌아옴.

- 7월 둘째 아들 학유(學游)가 태어남.

- 到記의 초시에 합격

- 苕川四時詞 지음.

 

 

․ 26세; 1787년(정조 11)

- 1월, 3월 두차례 반제에 수석 합격, 많은 상을 받음. 8월에 반제에 2등으로 뽑혀 「兵學通」과 교지를 하사 받음.

- 4월; 임금으로부터 「國朝寶鑑」을 상으로 받음.

- 9월; 詩 “秋日門岩山莊雜詩”

이미 陽根 벽계에서 논을 빌려 벼농사를 짓고 있었다.

 

 

․ 27세; 1788년(정조 12)

- 3월; 泮試(文廟)에서 수석 합격.

- 9월; 문암장에서 벼베기를 살피다.

 

 

․ 28세; 1789년(정조 13)

- 1월; 대과(大科) 급제.

- 3월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어 정조에게 『대학』을 강론.

- 5월에 부사정(副司正)이 되고, 6월에 가주서(假注書)가 됨.

- 겨울에 배다리(주교;舟橋)를 설치하는 공사가 있어, 그 규제를 만들어 바쳤다.

 

 

․ 29세; 1790년(정조 14)

- 2월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는데, 대간이 법식을 어겼다며 탄핵하자 여러 번 패초를 거부하다가 3월 10일 서산군 해미현에 유배, 11일 만에 풀렸다. 돌아오는 길에 온궁에서 사도세자 유적을 복원할 것을 지시해 노론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 9월; 정약전 대과 급제.

- 내각(內閣) 친시(親試)의 세말(歲末) 점수가 수석(首席)을 차지하여 특별히 구마(廐馬)와 호피를 하사받고 사은(謝恩).

 

 

․ 30세; 1791년(정조 15)

- 4.12 아들 구장(懼장) 죽음

- 5월에 사간원 정언, 10월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

- 겨울에 『시경의(詩經義)』 800여 조목을 지어 올렸다. 임금께서 “평소의 온축이 깊고 넓지 않고서는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하시며 크게 칭찬. 『홍재전서(弘齋全書)』에도 200여 조목이 실려있다.

- 이해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권상연이 부모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한 진산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계기로 천주교 배격운동이 일어나자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 배교.

 

 

․ 31세; 1792년(정조 16)

- 홍문록에 오르고 이어서 수찬이 됨.

- 4월 9일 진주 임소에서 부친 진주공의 상(喪)을 당해 광주에서 여막살이를 하면서,

- 여름 마현 石林에 望荷樓를 짖고 記文을 씀.

- 겨울에 왕명으로 수원 화성의 성 쌓는 제도를 정리하여 바쳤다. 또 임금이 내린 『도서집성(圖書集成)』과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고하여 인중(引重)과 기중(起重)의 기계장치를 마련하여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바쳤다. 성이 준공되자 임금이 “다행이 기중가를 사용하는 바람에 4만 냥의 경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고 하셨다.

 

 

․ 33세; 1794년(정조 18),

- 정월 hgkfn 딸 효순(孝順) 죽음.

- 6월에 부친 3년상을 마침.

- 7월에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

- 8월에 비변사랑(備邊司郞)

- 10월에 홍문관(弘文館) 수찬되었다가

- 경기도 암행어사(10.29-11.15) 명을 받아 연천, 삭녕 등의 고을을 암행했는데, 이때 경기감사 서용보의 비위사실을 보고하였다가 정조 사후에 보복당함,

10월 암행어사로 경기도 적성지역을 암행.

- 이어서 12월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됨.

- 수원성 축성공사 착공

 

 

․ 34세; 1795년(정조 19)

- 정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품계가 통정대부에 이름. 정조와 수원 현릉원 배알.

- 2월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되어 현릉원에 행차할 때 시위로 따라감.

- 3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

- 「화성정리통고」를 이가환.윤행임 등과 합작.

- 주문모 사건에 둘째형 약전(若銓)의 연좌로 7월 충청도 金井察訪으로 좌천.

- 금정찰방으로 있을 때, 온양(溫陽) 서암(西巖)의 봉곡사(鳳谷寺)에서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을 좌장으로 남인 학자들과 함께 모여 성호 이익의 유고를 가져다가『가례질서(家禮疾書)』를 교정하여 한 권의 온전한 책으로 엮었다. 이때 강학한 문답을 정리하여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를 지었다.

또 『퇴계집』반 권을 구해, 매일 아침 퇴계 선생의 편지를 한 통씩 읽고, 그 뜻을 부연하고 자신의 생각을 적어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지었다. →다산이 퇴계의 학문과 덕행을 사모하여 『퇴계집』의 서찰(書札)을 읽고 그 중에 특히 요절(要切)할 부분을 뽑아 강(綱)으로 삼고 다음에 부연설명하여 자신이 경성(警省)하는 자료로 삼기 위해 지은 책이다.

- 번암 채상공 제공에게 올리는 글

- 11.5 아들 삼동(三童) 죽음

- 12월에 국왕이 소환

- 12월에 용양위(龍驤衛) 부사직(副司直)이 되어 한양으로 올라왔는데, 이해 맏형 정약현이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 굶주리는 백성들(飢民詩) 지음.

 

 

․ 35세; 1796년(정조 20)

- 10월에 규영부(奎瀛府) 교서(校書)가 되어 이만수․박제가 등과 함께 『사기영선(史記英選)』교정작업에 참여.

- 12월에 병조참지(兵曹參知), 다시 우부승지, 좌부승지에 올랐다가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詩동호인 모임 결성

- 수원성 준공

 

 

․ 36세; 1797년(정조 21)

- 6월에 좌부승지를 제수받았으나 자신의 천주교 관계 전말을 고백하는 사직상소문을 올리고 물러났다.

- 윤6월에 황해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 번암 정승께 올리는 글

- 이문원(摛文院)에 들어가 두시(杜詩)와 『춘추좌씨전』을 교정.

겨울에 수십 종의 의서에서 천연두 치료에 관한 내용을 편집․정리하여 『마과회통(麻科會通)』12권을 찬술. 여러 자식을 잇달아 천연두로 잃은 슬픔을 이렇게 넘어섰다.

- 정약전은 성균관 전적을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 37세; 1798년(정조 22),

- 4월에 『사기선찬주(史記選纂注)』를 완성해 올렸다. 이는 왕명으로 앞서 엮은 『사기영선』의 찬주가 지나치게 번잡한 것을 산삭하여 요점만 간추린 것이다. 이를 올리자, 임금이 “글로 올린 것이 뜻에 적합하니 매우 다행스럽다”는 말씀을 내렸다.

- 정약전은 왕명으로 『영남인물고』를 편찬.

- 곡산에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곡산부사 재임시 만든 상세하고 정확한 호적부는 역사상 처음의 것으로 통계청 사업의 효시. 「곡산북방산수기」등 저술.

 

 

․ 38세; 1799년(정조 23)

- 2월 황주(黃州) 영위사(迎慰使)로 사신을 접대하고 4월 내직으로 옮겨져 병조참지, 부호군을 거쳐 형조참의를 제수받았다. 6월 대사간 신헌조가 정약전을 탄핵하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직.

- 넷째 아들 농장(農牂)이 태어났다. 아들의 이름 농장에는 낙향의 삶에 대한 꿈이 담겨있다.

 

 

․ 39세; 1800년(정조 24)

- 박제가와 함께 종두설을 연구 실험.

-『종두설(種痘說)』저술

- 봄에 처자(妻子)를 데리고 낙향, 정조가 내각 서리를 보내 곧 부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6월 28일 정조가 갑자기 승하.

고향으로 돌아와 저작에 주력하면서 ‘여유당(與猶堂)’이란 당호를 지음. 「여유당기」지음

- 홍명한이 잘못을 지적한 내용이 적힌 『문헌비고』를 빌려, 그 메모를 바탕으로 『문헌비고』의 오류를 차례대로 지적한 『문헌비고간오(文獻備考刊誤)』1권을 완성. 임금께 올려 살피시도록 하려 한 것인데, 갑작스런 승하로 올리지 못했다.

- 마현의 石林에서 노닐며 記文씀.

- 초여름 ‘苕上烟波釣叟之家’라는 뱃집을 만들고 記文을 씀.

 

 

․ 40세; 1801년(순조 1)

- 사간원 논계로 체포되어 국문을 받았다.

- 2월 9일 셋째형 약종(若鍾; 세례명 아오스딩) 사형, 둘째 형 약전은 신지도로 유배, 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

竹山(그믐날 유숙)-嘉興(초하룻날 유숙)-3월 2일 하담 도착 친산(親山)

- 3월 9일 장기(長鬐)에 도착, 유배 시작 『삼창고훈』을 참고하여 字學에 관해 정리한 『이아슬(爾雅述)』6권 지음. 또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지었는데, 겨울 옥사 때 잃어버렸다.

여름에 우리나라 속담을 운을 달아 알기 쉽게 정리한 『백언시』지음. 이는 1820년에 ‘이담속찬’이라는 이름으로 확장․완성하였다.

- 10월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사건으로 둘째 형 약전은 흑산도(黑山島)로 이배,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이배.

 

 

․ 41세; 1802년(순조 2)

- 유배 초기부터 8년간 떡장수 노파가 제공하는 비좁은 뒷방을 얻어 생활. ‘사의재’라 칭함. 벗 윤서유가 사촌동생 윤시유를 시켜 위로함.

- 넷째 아들 농장이 요절.

 

 

․ 42세; 1803년(순조 3)

- 봄에 『예기』『단궁(檀弓)』편의 옛 주석 중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단궁잠오(檀弓箴誤)』6권을 완성했다. 이 가운데 많은 부분이 뒤에 『상례사전(喪禮四箋)』에 들어가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다산은 뒤에 『상례사전』에 활용되고 남은 것들만 따로 추려 별도의 『단궁잠오』를 남겼다.

- 여름에 23칙으로 된 「조전고(弔奠考)」를 완성했다.

- 겨울에 『상례사전』중 「예전상의광(禮箋喪儀匡)」17권을 완성. 「士喪禮」3편과 「喪服」1편과 그 주석을 취해 이경증경(以經證經)의 방식으로 대의를 밝힌 내용이다.

- 김대비의 해배명령이 있었으나 서용보의 반대로 풀려나지 못함.

- 詩 ‘哀絶陽’ 지음.

- 「사의재기」지음.

 

 

․ 43세; 1804년(순조 4)

- 봄에 처음 배움을 시작하는 학동들을 위해 2천자문인 『아악편훈의(兒學編訓義)』 지음. 유형자(有形字) 1천 자와 무형자(無形字) 1천 자로 구분하여 연쇄적 방식으로 체계적인 학습이 가능하도록 엮은 교과서이다.

- 이청(李晴), 초의(草衣) 등의 제자들과 자주 시문을 논함.

- 겨울에 장남이 찾아왔으며 보은사(寶恩寺)에서 주역예기(周易禮記)를 강론함.

 

 

․ 44세; 1805년(순조 5)

- 여름에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3권을 완성, 겨울에 학연이 왔다. 보은산방(寶恩山房) 으로 옮겨 스님들에게 「주역」을 가르쳤다. 惠藏선사와 만덕사 주지로 부임하여 인연을 맺었다.

- 고금도 귀양살이 하던 벗 김이재가 돌아가는 길에 들림. 혜장에게 차를 구걸하는 글 「걸명소」를 보냄.

- 제자 이학래의 집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 45세; 1806년(순조 6)

- 詩 ‘水調歌頭(고향을 생각하며)’ 지음

 

 

․ 46세; 1807년(순조 7)

- 여름 沙村書室(黑山島 정약전) 記文

- 5월에는 정약용의 장손 대림이 태어났고, 7월에는 정약전의 아들 학초가 사망했다.

「형의 다들 학초묘지명」

- 「상례사전」50권 완성

- 다산팔경사(茶山八景詞) 및 다산화사(茶山花史) 20首 지음

 

 

․ 47세; 1808년(순조 8)

 

- 봄에 강진 도암면 만덕리 다산(茶山)의 산 밑에 있는 윤단(尹猯)의 산정(山亭)인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옮겨 저술을 시작, 『다산문답(茶山問答)』1권 지음.

- 제자들의 도움으로 동암․서암을 짓고, 연못을 파고 정원을 손질하였다.

- 아들 학유가 다녀갔다.

- 겨울에 『주역심전(周易心箋)』24권과 『독역요지(讀易要旨)』18칙, 『주역사해(周易四解)』․『주역서언(周易緖言)』 등 주역에 관한 책을 집중적으로 기술했다.

 

․ 48세; 1809년(순조 9)

-『시경강의산록(詩經講義刪錄)』 등 지음.

 

 

․ 49세; 1810년(순조 10)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 등 지음.

- 큰아들 학연의 상소로 해배명령이 내렸으나 이기경․홍명주의 방해로 인해 풀려나지 못함.

 

 

․ 50세; 1811년(순조 11)

 

-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등 지음.

- 헤장이 40세의 나이로 죽었다.

- 죽은 계부 정재진을 위해 「계부가옹행장」지음.

- 겨울, 「아암장공탑명」지음.

 

 

․ 51세; 1812년(순조 12)

 

- 『민보의(民堡議)』․『춘추고징(春秋考徵)』등 지음.

- 옹산 윤서유의 아들 尹昌模를 사위로 맞음.

 

 

․ 52세; 1813년(순조 13)

-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40권 지음.

- 7월 13일 庶母 金氏 사망 초장; 龍津의 산골짜기, 천장; 鳥谷의 亥方向

 

 

․ 53세; 1814년(순조 14)

 

- 4월 장령 조장한이 사헌부에 나아가 특별히 대게를 정지시켜 죄인명부에서 삭죄.

- 의금부에서 석방시키려 했으나 강준흠의 상소로 저지됨.

-『맹자요의(孟子要義)』․『대학공의(大學公議)』․『중용자잠(中庸自箴)』․『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대동수경(大東水經)』등 지음. 정약전은 정약용이 해배된다는 소문을 듣고 흑산도까지 오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우이도로 이주.

 

 

․ 54세; 1815년(순조 15)

 

- 『심경밀험(心經密驗)』․『소학지언(小學枝言)』지음.

- 정약전 『자산어보(玆山魚譜)』 완성

 

 

․ 55세; 1816년(순조 16)

-『악서고존(樂書孤存)』12권 지음.

- 6월 6일 형 약전(若銓) 유배지 내흑산 우이도에서 사망. 「선중씨정약전묘지명」지음.

 

 

․ 56세; 1817년(순조 17),

- 『상의절요(喪儀節要)』․ 『방례초본』, 『경세유표(經世遺表)』 49권 지음.

 

 

 

․ 57세; 1818년(순조 18)

- 봄에 『목민심서(牧民心書)』48권 완성.

- 8월 이태순의 상소로 18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남.

- 9월 강진을 떠나 9월 14일 고향 마현 본가로 돌아옴.

- 「효부심씨묘지명」지음.

 

 

․ 58세; 1819년(순조 19)

 

-봄에 『흠흠신서(欽欽新書)』완성.

-『아언각비(雅言覺非)』저술

 

 

․ 59세; 1820년(순조 20)

- 봄 3월에 선백씨(先伯氏)가 학순(學淳)을 데리고 춘주(春州; 春川)에 가서 며느리를 맞아올 때에 작은 배를 꾸며 협주(峽中)에 들어갈 때, 소양정(昭陽亭)에 올라 청평산(淸平山) 폭포를 보고 절구시(絶句詩) 25수, 화두시(和杜詩) 12수, 잡체시(雜體詩) 10수를 지었다.

- 4월; 江皐鄕射禮 베품.

- 4월 28일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를 수정 4일 만에 마쳤다.

- 겨울에 「옹산윤공묘지명」지음

 

 

․ 60세; 1821년(순조 21)

-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지음.

- 9월 맏형 약현(若鉉) 사망. 「선백씨약현묘지명」지음

- 겨울 「남고운지범묘지명」 지음.

 

 

․ 61세; 1822년(순조 22)

- 여름 4월 15일 학연(學淵)이 대림을 데리고 춘주에 가서 며느리를 맞아올 때 작은배를 꾸며 협중으로 들어갔다. 이때 고기잡이 배를 구하여 마치 집처럼 꾸미고 그 문미(門梶)에다가 ‘산수록재(山水綠齋)’ 라는 편액을 직접 써서 걸고, 좌우 기둥에 한쪽은 ‘張志和苕霅之趣(장지화가 초삽에 노닌 취미)’, 또 한쪽은 ‘倪元鎭湖泖之情(예원진이 호묘에 노닌 정취)라 썼다.

 

- 회갑을 맞아 스스로 ‘자찬묘지명’을 짓다. 이가환․권철신 등 신유박해 때 사형당한 남인들의 묘지문도 짓기 시작.

「윤지평지눌의 묘지명」, 「이장령유수의 묘지명」, 「녹암권철신묘지명」, 「정현이가환묘지명」

 

 

․ 66세; 1827년(순조 27)

- 대리청정하던 효명세자(孝明世子; 익종)가 정약용 등을 등용하려 하자 윤극배(尹克培)가 상소해 정약용을 무고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 白雅谷(검단산 북록)에서 五葉亭을 지어 놓고 人蔘 농사를 짓다.

 

 

․ 69세; 1830년(순조 30)

- 효명세자가 위독하자 정약용을 부호군에 단부(單付)해 약을 쓰게 했으나 조제하기 전에 효명세자가 사망.

 

 

․ 70세; 1831년(순조 31)

- 永明尉 洪顯周와 교유

 

 

․ 73세; 1834년(순조 34)

- 『상서고훈(尙書古訓)』과 『지원록(知遠錄)』을 개수해 21권으로 합편(合編)함. 순조가 위독하자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대궐에 도착하기 전 순조가 사망.

 

 

․ 74세; 1835년(헌종 1)

- 우두신방(牛痘新方) 시수 실시

 

 

․ 75세; 1836년(헌종 2)

- 2월 22일 진시(辰時)에 마현 자택 정침(正寢)에서 친족들과 제자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조용히 세상을 떠남, 이날은 풍산 홍씨와 결혼한 지 60주년이 되는 회혼일이다.

- 음 4월 1일 여유당 뒷동산,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안장됨.

 

 

․ 1838년(헌종 4)

- 부인 풍산 홍씨 사망

 

 

․ 1839년(헌종 5)

- 丁夏祥 처형(천주교 신자)

 

 

․ 1882년(고종 19)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 전부 필사되어 내각에 수장.

 

․ 1910년(순종 4) 7월 18일 정이품(正二品) 정헌대부(正憲大夫) 규장각(奎章閣) 제학(提學)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도(文度-博學多識하니 文이요, 心能制意하니 度)’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