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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존재로 태어나기 위해 공중 부양하는 메주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1. 16. 17:29

다른 존재로 태어나기 위해 공중 부양하는 메주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메주

   정재분

   처마 끝에 매달린 소리 없는 풍경에게 긴긴 밤이 다녀가고 언 햇살이 스며들어 실핏줄이 자랄 즈음 묵묵한 어느 손길 윗목 구들장 내어 줄 제 담요를 뒤집어쓰고 기운이 차올라 하얀 꽃을 피우는 겁니다 고드름이 낙화하는 정월 보름 햇나물이 군내를 헹굴 즈음 항아리 하나 가득 바다를 길어 올리는 겁니다 검댕이 숯과 붉은 고추부지깽이로 불씨를 일으키고 훠월훨 사르며 시간 마루를 넘어서 다른 이름으로 태어나지요

 

 


  
  입동 즈음이면 김장을 끝낸 집마다 콩을 무쇠솥에서 삶아 내 메주를 쑤곤 했다. 하얀 김이 오르는 삶은 콩을 절구에 넣어 찧고 이겨 대개는 네모나게 빚고 그걸 짚으로 엮어 처마에 매달곤 했다. 이렇게 잘 띄운 메주는 이듬해 된장이나 간장을 담는 기본 원료가 되었다.
 
  정재분의 〈메주〉는 그 메주를 발효 숙성시킨 뒤 장의 원료로 쓰는 차례를 따라간다. 처마에 매단 메주는 긴긴 밤이 다녀가고 언 햇살이 스며들면 제 안에 실핏줄이 자라 생명이 깃든다. 그 메주를 더운 뜰아랫방에다 짚을 깔고 온도와 습도를 잘 맞춰 숙성 발효시켜 간장이나 된장 원료로 썼던 것이다. 메주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기운이 차올라 하얀 꽃을 피우”며 숙성 발효한다. 그 잘 띄운 메주를 이듬해 정월 보름 즈음에 큰 항아리에 깨끗한 물을 붓고 천일염을 섞은 뒤 숯(음)과 붉은 고추(양)를 띄운다. 양을 품은 물은 “불씨를 일으키고 훠월훨 사르며 시간 마루를 넘어서” 불이 되었다가 “다른 이름으로 태어”난다.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 메주는 장(醬)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거듭난다. 메주는 스스로 소진된 재이며 그 재 속에서 일어나는 불꽃, 즉 피닉스다. 메주에 실핏줄이 자라나고 하얀 꽃이 피어나 새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때 장은 땅(콩)과 하늘(바람·햇살)의 합쳐짐이며, 음(어둠·물·숯)과 양(볕·천일염·붉은 고추)의 섞임이다.
 
  메주는 “처마 끝에 매달린 (채) 소리 없는 풍경”이 되는데, 공간의 위계학에서 메주가 걸린 처마 끝 허공은 세속을 넘어 하늘로 나아가는 초입이다. 땅에서 나고 자란 콩이 불에 익혀져 짓이겨진 뒤 다른 이름, 다른 존재로 태어나려고 하늘의 신성한 시간으로 공중 부양한다. 처마 끝에 매달린 이 메주는 서정주의 〈冬天(동천)〉에 나오는 “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찬 하늘에 옮겨 심은 마음속 임의 “고은 눈썹”에 상응한다.
 
  시인은 그렇게 땅의 사물이 모진 시련을 거쳐 하늘의 신성성을 얻는 생의 비의적 과정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비약하자면 메주는 무의식의 심상계에서 비우고 고요해져 별이란 상징성을 얻는다. 비움이란 요동치는 마음과 삿된 생각의 매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완벽한 비움에 이르러 고요함을 지키는 것에 독실해질 수 있다. 致虛極, 守靜篤”(노자, 《도덕경》 제16장) 메주는 다시 땅으로 내려와 어느 집 더운 뜰아랫방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팽창과 수축운동을 하며 다른 무엇으로 거듭 태어나는 과정을 거친다.
 
  이 시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메주의 생태가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수신(修身)과 양생(養生)의 과정이다. 메주는 풍찬노숙을 견디고, 언 햇살과 담요를 뒤집어쓰는 암흑의 시절을 이겨낸다. 이때 메주는 스스로 미래가 되는 태아이고, 거듭 태어나려는 질그릇 사람이다. 시인은 질그릇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누구에게나 복병이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 지병을 한둘은 짊어지고 있음이니 /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길이 보일 터, / 아픔과 인내로부터 도망하지 마라 / 그것은, 생명이 선택한 방법이니”(〈취급주의# 요하는 질그릇 사람〉)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생명이 선택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변화하고자 하는 것은 아픔과 인내에서 도망가지 말아야 한다. 아픔과 인내에서 도망하지 말아야 할 것은 메주도 마찬가지다. 메주의 본분에 충실하는 것, 이것이 메주의 덕이다. 메주는 제 마음을 다스리고 제 몸을 닦은 뒤 비로소 메주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태어”날 수 있다. 그것은 “혼에다 백을 실어 하나로 안고,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가? 載營魄抱一, 能無離乎?”(노자, 《도덕경》 제10장)라는 노자의 성찰을 떠올리게 한다. 혼(魂)에 백(魄)을 실어 혼백으로 살아난다.
 
  이때 혼백은 넋이다. 넋이란 죽어도 죽어지지 않는 생명이다. 메주는 어떻게 죽어도 죽지 않는 생명으로 살아나는가? 눈 감고 귀 닫고 마음을 유혹하는 오색(五色)・오음(五音)・오미(五味)를 멀리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는가? 《태상노군양생결》에 따르자면 여섯 가지를 멀리해야 한다. 그것은 이름과 이익, 좋은 소리와 여색, 재물, 재매, 번지르르한 말과 망령된 행동, 질투심 등이다. 그것을 물리치고 제 마음을 잘 기르는 것이 양생이다. 모든 시는 제 경험과 상상이 뒤섞인 자서전이다. 이 시는 땅 → 하늘 → 땅으로 이어지는 변증법적인 여정의 동선(動線)을 보여주는데, 시가 상상적 자서전이라는 맥락에서 〈메주〉를 읽으면 그 동선은 자아가 심오에 이르는 한 과정에 대한 상징임이 또렷해진다. 이 시가 메주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 메주를 빌려 제 삶의 수신과 양생에 대한 노래인 것이다. 메주는 손가락이고 그것이 가리키는 달은 의미론적 단위에서 무르익은 자아의 표상이다.
   
 
   정재분(1954 ~ )은 대구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정재분의 시는 일견 범속한 듯 보이지만 군데군데 창의가 번뜩인다. 단순화하자면 창의란 A를 입력해서 A’를 인출하는 것이 아니라 B나 C를 인출하는 것이다. 입력에 대한 특이한 인출이 창의의 바른 뜻이다. 이를테면 “청진기도 초음파도 들이대지 마라 / 열 달은 자궁의 일”(〈줄기세포〉)은 누구나 아는 것이라는 점에서 범속하지만 누구도 말하지 않은 것을 얘기한다는 점에서 창의의 발현이다. 2009년에 펴낸 첫 시집 《그대를 듣는다》에 따르면 시인의 오래된 기억은 여섯 살 때의 기억이다. 여섯 살 소녀는 “땡볕에 몽유하는 개울에서 / 여섯 살 계집아이 / 홀라당 벗어 겸연쩍은 / 민가슴을 서너 번 부비다가”(<낮잠>) 개울로 뛰어든다. 혹은 “똥 누러 간 사이 장대비가 쏟아지고 / 낯선 군인이 안마당으로 뛰어들어와 / 무턱대고 마루에 걸터앉았”을 때 홑치마만 입고 변소에 들어갔던 여섯 살 소녀는 부끄러움 때문에 나오지 못한다. 그 여섯 살의 성적 조숙은 당돌하다. 그 당돌함은 이 무렵에 이미 여자로서의 자아 정체성이 형성되었음을 암시한다. 이 느닷없는 성적 조숙은 기어코 소녀로 하여금 먼 미래의 시인으로 나아가게 하는 무의식의 동력으로 작용했을 터다. 2005년 계간지 <시안>에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 말석에 이름을 올렸으니, 늦깎이인 셈이다. 그토록 오랜 “은둔의 세월을 열고 / 밖을 나온”(〈배꼽〉) 것은 “얕은 숨으로 연명하고 있구나”(〈피아〉)라고 할 때의 의미화되지 않은 채 흩어지는 제 덧없는 삶에 대한 불만이거나 제 안의 열망이 임계치에 이르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열망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저의 질서는 머뭇거렸지만 당신을 마중 나갔어요”(〈나선 계단〉)에 따르면 당신을 마중 나가고자 함이다. 그 당신은 임이기도 하고, 혹은 절대의 진리거나 “시여, 오셔요” 할 때의 시이기도 할 터다. 시인은 시에게 “수십 년을 걸어도 뒤뚱이는 걸음새 / 길 잃은 나를 안아 연민하셔요”(〈숲에 내리는 비〉)라고 간청하는데, 그때 시와 임은 길 잃은 나를 안는다는 점에서 한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