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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가치의 내면화, 진정한 글쓰기의 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2. 11. 15:46

문학 가치의 내면화, 진정한 글쓰기의 힘

                                      허 만 욱(문학평론가•남서울대 교수)

 

1.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 변화와 창조의 수용과 실천

 

우리는 지금 낡은 패러다임이 사라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되는 문화적 전환기에 살고 있다.‘뉴미디어 시대’,‘멀티미디어 시대’,‘다매체 시대’,‘전자매체 시대’,‘영상매체 시대’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시대지만,한 가지 특징은 우리가 수많은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영화, 비디오, 광고, 패션, 팝송, 랩, 신문, 잡지 등은 날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강력한 미디어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미디어들은 상업주의와 결탁해 경박한 표피문화와 천박한 가치관, 그리고 찰나적인 유행을 산출하기도 하여, 자칫 진지한 사고와 심오한 사색을 불필요하고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다.

전통적인 문학가들이나 인문학자들에게는 그러한 변화가 충격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필연적이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고 문화의 패러다임도 바뀌었기 때문이다.‘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변하지 말고 관습과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수구적 태도는 문학이나 인문학의 미래를 위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새로운 문화 읽기’는 절실하고도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생겨난 새로운 문화현상을 빠르고 정확하게 읽어내어 시대의 변화를 올바로 파악하고 그것에 대처하는 것이 지금 그 무엇보다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비록 문학이 지금 위기에 처한 것처럼 보이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문학적•인문학적 소재들과 상상력과 가능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문학은 장르의 해체와 확산, 재구성 작업 등을 통해 타 매체와의 활발한 대화와 제휴를 시도해야만 할 것이다. 이청준은 자비(慈悲)라는 말을 설명하면서 자(慈)는‘자기 자신과 빛’을, 그리고 비(悲)는‘타자와의 감정 공유와 그리움’을 의미하며,“순수문학은 자기만 위로 올라가려는 것이지만, 대중문학은 타자와 더불어 살려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문학이 융성하기 위해서는 이제 자신과 순수의 영역을 확장해 타자와 대중을 포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상하게도 변화를 곧 변절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시대에 따른 변화는 필연적이고 변하지 않는 모든 것은 결국 부패하게 마련이다.

 

2. 수용과 창작의 통합적 수행, 새로운 길 모색과 자아실현

 

문학 작품은 복잡하고도 섬세한 심리적 수용 과정을 거쳐 의미 있는 하나의 가치로서 수용자의 마음에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독서를 통해 수용된 인식은 이전까지 수용자가 인식하고 있던 세계를 조절하기도 하고,새로운 가치로 동화시켜 나가기도 한다. 결국 삶 속에서 문학과 같은 가치적인 세계를 즐겨 접하고 일상화하여, 문학과 함께 사는 것, 즉 문학의 내면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독자가 문학 활동의 결과를 내면화하여 자신의 삶으로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창작의 경험이 요구된다. 이 내면화는 필연적으로 전이(轉移)와 연결되는데, 문학의 경우에 있어 내면화의 전이는 문학을 써보는 행위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독자는 단순한 수용자 이상의 생산적 독자로 성장하게 된다. 생산적 독자란 주체적 독서와 분석 과정을 통해 도출된 감상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있고, 그 결과를 언어로 표현하고 생산할 수 있는 성실한 독자의 모습을 뜻한다. 그리하여 글쓰기의 과정에서 겪어야 할 고통은 오히려 즐거운 체험으로 전환되는데, 그 즐거움의 요체가 바로 내면화에 있는 것이다.

창작의 과정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과정이다. 글을 쓰면 서 작가는 지속적 물음을 제기한다. 그리고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망설이고 주저하며, 선택을 하고, 다시 결단을 내린다. 그리하여 과정을 통해 삶 가운데 빚어지는 심리적 괴리 현상에 평형감각을 회복할 수도 있고, 감수성이 확충됨으로써 삶의 총체성을 체험할 수도 있다. 인간의 자기 탐구와 자기 성장을 도모하며,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문학 활동에 있어서 읽기와 쓰기, 즉 수용과 창작의 통합적 수행은 논리와 감수성의 분열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방법이 되며, 자아실현을 성취하는 일이 된다.

 

3. 독서, 관찰, 사색, 그리고 진정한 글쓰기

 

인간은 생래적으로 자기 표현의 욕구를 갖고 있다. 카시러(E.Cassirer)는“인간은 자신의 삶을 표현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고 했으며, 베르더(L.v. Werder)는“자아 표현의 욕구야말로 살아 있는 인간의 참을 수 없는 본능이기 때문에 자아 표현의 욕구를 거세시키지 않는 한 글쓰기의 능력을 배양하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표현의 욕구만큼이나 인간은 자기 노출의 공포와 고통도 함께 앓는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마치 삼투현상처럼 서로에게 침투되면서, 글쓰기의 즐거움과 괴로움은 교차하기도 하고,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혼융되기도 한다.

그런데 글쓰기가 재미있는 작업이든 아니든, 글을 쓰려면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한다. 이때 그 최고의 공급원이 되는 것이 바로 글읽기다. 즉 글읽기와 글쓰기는 원인요소와 인과요소로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잘 쓰기 위해서는 결국 깊고 넓은 독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이런 독서를 통해 쌓여진 에너지는 글 쓰는 사람의 내공을 배양시킬 뿐만 아니라, 글이 막힐 때 부지불식간 그것을 뚫어주는 통쾌한 힘으로 작용하여 글쓰기에엄청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독서는 글쓰기의 크나큰 자산 축적인 셈이다.

아울러 글쓰기에 있어 중요한 또 다른 에너지 공급원으로 세상에 대한 관찰과 생각하기다. 글쓰기를 위한 지식 입력의 또 하나의 방도가 되는 것이다. 대저 독서는 항상 간접경험이다. 그러나 세상을 관찰하는 일은 직접경험이다. 그러므로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일지라도 글쓰기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관찰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삶에 대한 현실적 앎이 없으면 글쓰기에 진실이 결여되며,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현실 이해의 폭이 편협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러한 관찰은 관심을 갖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마음이 있어야 눈길을 돌리게 되고 성실하게 살펴보게 된다. 그리고 성실한 관찰은 사고를 자극하여 사색하고 성찰하게 만든다. 독서와 세상에 대한 관찰이 생각하는 행위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통해 글쓰기를 풍족하게 하려면, 생각하는 행위가 다른 행위들과는 구별되는, 곧 치열하고 집요하게 생각하도록 하는 버릇을 들일 필요가 있다. 러셀(B.Russel)은“생각한다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런 행위가 아니므로 고통을 통해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고 했다. 조금 더 심각하게 말하면 인고(忍苦)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글쓰기는 독서, 관찰, 사색 등과 서로 유기적 순환의 관계에 있다. 그리고 이 순환적 관계는 그들 각각의 행위뿐만 아니라 그들 전체로서 보람을 느끼게 한다.

 

4. 고통과 인내, 투철한 작가의식과 장인적 글쓰기

 

지금 우리 문학이 당면하고 있는 변화 양상들은 컴퓨터의 급속한 보급과 이에 의한 정보 개념의 확충, 후기 산업 사회와 빈곤으로부터 벗어나 풍요로운 경제적 발전 단계로의 상승, 그리고 거기에 이념과 현실의 무거운 인식론적 주제들의 탈피와 해체주의적 욕망이라는 측면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생성해 놓은 것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능주의적 가치관이 주도하는 시대를 맞아 작가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본연의 자질과 태도는 예술가적 장인 정신에 있다. 아울러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장인적 태도는 고전주의 시대부터 예술가에게 권고되어 온 미덕이기도 하다. 더욱이 오늘의 작가에게 있어서 장인 정신이란 단순한 예술적 성취에의 정신적 자세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와 미래 문화에 그것의 허위성을 부정하고 그것들이 내포하고 있는 불순성과 은폐성을 폭로하며 진실을 발굴해 내는 창조적 작업의 방법론으로 기능할 것이다.

적절한 어휘 하나를 선택해 내려는 작가적 고뇌, 또는 오직 자기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새로운 형식에의 모험은 때때로 매우 답답하거나, 혹은 전 시대의 귀족주의적 창작 태도로 매도되고 있다. 그렇지만 바로 그 고민과 고뇌와 모험을 통해서 이 시대와 사회가 은폐하고 있는 거짓과 상투성이 극복되고, 고통스런 진실 발견의 성과가 성취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치열한 장인적 글쓰기는 여전히 요구되고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엄숙한 창작태도다.

그런데 작가에게 글쓰기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작업이며, 더욱이 치열한 글쓰기는 될 수 있다면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창작 과정일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오랜 동안 글쓰기를 연구해 온 윌리엄 진서(William Zinsser)가 그의 저서『글쓰기 생각쓰기』에서 밝힌 내용들을 주목하기 바란다. “글을 쓴다는 건 힘든 일이다. 명료한 문장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심지어는 세 번째까지도 적절한 문장이 나오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절망의 순간에 이 말을 꼭 기억하기 바란다. 글쓰기가 힘들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글쓰기가 정말로 힘들기 때문이다”라고 했듯이, 글쓰기는 원래 고통스런 작업이다. 그리고 그는 서문에서 “그 원칙은 지난 삼십 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 앞으로 삼십 년 동안 또 어떤 놀라운 기술이 나타나 글쓰기를 배로 쉽게 만들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 글이 배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전히 필요한 것은 수수하고 오래된 노력과 언어라는 수수하고 오래된 도구”라고 했다. 즉 지금은 세상 누구나가 다른 누군가에게 글을 쓰고, 국경과 시간대를 뛰어넘어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온 세상에 블로거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이러한 새로운 조류는 매우 반갑기도 하거니와 글쓰기의 두려움을 줄여주는 발명품들은 에어컨이나 전구만큼이나 편리하

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컴퓨터로 글을 쓰는 이들은 글쓰기의 본질이 고쳐 쓰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글을 막힘없이 술술 써낸다고 해서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 바로 마술 같은 전자기술이 넘치는 새로운 시대에도 기본은 적확하고 정제된 치밀한 글쓰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성과 신진, 정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 장인적 고집과 변화에 대한 열린 마음의 상반된 존재들이 끈질긴 힘으로 길항하면서도 동시에 제휴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진지하되 앞으로도 열려 있고, 고집하되 새로움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문학적 풍토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  월간 예술세계 2009년 12월호 게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