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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옮겨 심는 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1. 6. 10:16

대나무 옮겨 심는 날

 

20세기가 저물면서 인류는 초고속 장치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 컴퓨터가 토해내는 초고속 정보 앞에서 삶의 양식이 크게 뒤바뀌고 있다. 근대 과학의 모토는 스피드였다. '빠르게, 더 빠르게, 좀더 빠르게' 그 결과가 바로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생활의 모습이다. 온갖 통신 수단과 운송 수단들은 좀더 빠르게를 맹신하고 있다. 우리는 편리해진 것만큼 잃는 것도 많다. 속도에 휩쓸린 나머지 무엇보다도 차분하게 생각하면서 음미하고 누리는 여유가 사라졌다.

 

그러나 인류가 발명한 연장들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을 위한 것이라면 좀더 빠르게 대신 '안전하게, 더 안전하게, 좀더 안전하게'가 되어야 한다. 도시와 시골을 가릴 것없이 빠른 것 앞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무참히 희생되고 있는가. 곰곰히 생각해보라. 어째서, 무엇을 위해 우리가 이렇게 빠르게 쫓겨 가야 하는가를.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생명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문화는 유용한 것이지만, 생명을 한낱 수단으로 다루는 것을 문화가 아니라 재앙이다.

 

올림픽 슬로건은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라고 한다. 얼핏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이런 구호야 말로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가를 직시해야 한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를 위해 멀쩡한 젊음들이 피를 말리고 뼈를 깎으면서 환호하고 좌절한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하는지, 사람이 참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묻게 한다.

묵은 기록을 깨뜨리고 오로지 새로운 기록을 세우기 위한 그와 같은 행위가 과연 스포츠 정신에 합당한 것인가. 그 '높이'와 '멀리'와 '빨리' 때문에 인간이 보다 빨리 망가지는 것은 아닐까.

 

사람은 쇠붙이로 된 기계가 아니다. 감성과 이성이 있고 아름다움과 가치를 추구하는 독특한 생물이다 이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만 뛸 수 있단 말인가. 너무 뛰지 말라. 조급히 서두르지 말라.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그 어디도 아닌 우리들 자신의 자리다. 시작도 자기 자신으로 부터 내디뎠듯이 우리가 마침내 도달해야 할 곳도 자기 자신의 자리다.

나는 요즘에 와서 나 자신의 성급한 버릇을 다스리기 위해 좀더 느긋하고 느슨한 쪽으로 생활 습관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덩달아 시류에 쫓기지 않고 주어진 여건 아래서 느긋하게 삶을 즐기려고 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더 높이는 더 낮게로, 더 멀리는 더 가까이로, 더 빨리는 더 천천히로 바꾸려고 한다. 어느 날 시속 100 킬로미터 구간에서 125 킬로미터로 과속했다고 딱지가 날아왔다. 고속도로에 설치된 카메라가 찍은 것이다. 나는 이 통지서를 받고 순간 당황했지만 내 생활 개선을 위해 친절한 충고로 받아들였다.

고속도로와 국도 상에서 이 나라의 교통 경찰관이 총을 겨누고 과속을 단속하는 살벌하고 야비한 단속 태도에 견주면 교통안전과 그 질서를 위해 무인카메라 쪽에 훨씬 신뢰감이 간다.

 

'절대 감속'이란 명령조의 표지판을 보고는 선뜻 속도를 줄이려고 하지 않던 운전자도 '제발 좀 천천히'라고 달래듯 써 놓은 표지판 앞에서는 속도를 줄이지 않을 수 없다. 이성보다 감성이 인간 행동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증거일까.

새로 옮겨 심은 소나무에 아침부터 박새들이 찾아와 이 가지 저 가지로 폴폴 날아다니고 있다. 바다 갈매기 한 쌍이 내 작업에 준공 검사라도 왔는지 돌 수각 위를 맴돌다가 날아갔다. 댓잎에는 아침 이슬이 구슬처럼 맺혀 있다.

 

- 법정스님의 <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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