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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빚은 고봉밥 같은 시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12. 14. 00:09

가난이 빚은 고봉밥 같은 시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긍정적인 밥

                     함민복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긍정적인 밥>은 아름다운 시다. 아름다움이 미사여구가 만드는 공허한 감미로움이 아니라면 그렇다. 아마도 이 시는 시의 현실적 효용가치를 직접적인 언술로 따지고 묻는 최초의 시가 아닌가 싶다. 시 한 편의 고료로 3만 원은 정당한가, 혹은 시집 한 권의 값이 3000원이라는 게 정당한가, 라는 이 질박한 물음 속에서 시 한 편, 혹은 시 묶음의 효용가치를 국밥이나 굵은소금 한 됫박에 견주면서 어떤 진정성을 구한다. 시쓰기도 노동이라는 총체에 포섭되는, 노동의 일부다. 근육의 운동이 필요 없는 조금 느린 템포의 노동이다. “노동이 원자의 진동이며 별들과 태양을 움직이는 힘”(에른스트 융거)이고, 모든 스포츠와 향락조차 노동의 맥락에 포섭된다면 사물을 응시하는 것, 비와 구름과 노을에 대한 마음의 섬세한 감응을 언어로 옮기는 것이 굳이 노동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사람의 일 보다, 논에서 종일 허리 구부려야 하는 농업 노동보다 시쓰기가 덜 고되어 보이지만 시쓰기는 언어로써 生佛(생불)이 되는 것, 그런 까닭에 어떤 경지에 다가갈수록 어려운 게 詩業(시업)이다.

 

 밥은 함민복 시의 중요한 화두다. 밥은 개별자의 생존을 위해 불가결한 것이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살고, 입에 들어갈 밥을 구하려면 일을 해야 한다. 한 사람의 윤리의식은 대개 밥을 구하는 노동의 정당성이 그 기초를 이룬다. 이를테면 “일요일에도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 / 암청색 추위 속에서 옷을 입고 / 주일 날씨 속의 노동으로 욱신대는 갈라진 손으로 / 불씨를 살려 불을 지폈다. / 누구도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로버트 헤이든, <그 겨울 일요일들>)라는 시에서 주일 겨울 새벽에 일하는 아버지가 먹는 밥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이 노동은 타자의 필요에 자발적으로 응하는 것이고, “엄격하고 외로운 과업”을 수행한 까닭에 아버지의 입에 들어가는 밥의 정당성에 아무도 이의제기를 할 수 없다. 거꾸로 보자면 개별자에게 심각한 도덕의 위기는 밥이 제 입에 오기까지의 경로가 투명한 윤리성을 결락했을 때 생긴다.

 

 시집 한 권과 국밥 한 그릇을 한저울에 올려놓고 그 효용가치의 무게가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를 견주는 심리의 이면에는 시쓰기가 육체적 필요의 수준을 넘어서서 객체와 주체를 창조적으로 융합하는 매개로서의 노동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회의가 잠복해 있다. 이 의문과 회의의 뿌리는 시가 건강한 일꾼들의 노동과 존재를 하나로 묶어 주는 일이 될 수 없다는 불안이다. 노동은 삶 그 자체인데, 시는 자주 삶이라는 기반에서 剝離(박리)된다. 시쓰기의 기쁨은 노동에서 분리되고, 그 노력은 보상에서 분리된다. 시쓰기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빵을 굽고 메마른 대지를 비옥하게 만드는 공익적 가치를 지닌 노동보다는 한량들이 즐기는 유희에 더 가깝다. 사람 모두에게 두루 유익한 富(부)를 만드는 노동이 아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보면 좋은 예술은 늘 노동의 아들이었다. 좋은 그림과 시는 노동에서 분리되지 않고, 노동의 효용성과 그 생산의 기쁨과 의미를 밝혀 준다. 아울러 시쓰기는 찰나마다 변화하는 실존의 느낌을 언어로 고정시키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삶에서 비속함의 더께를 덜어 내 그것을 성스럽고 윤택하게 하는 일이고, 존재와 무, 추와 미 사이에서 우리가 쉬이 놓치는 본질과 기쁨들을 언어라는 닻으로 붙잡아 두는 일이다.

 

 함민복의 시들은 雅麗(아려)한 풍격을 갖고 있다. 그이의 감정과 기질에 깃든 맑은 기운이 시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까닭이다. 그는 자발적 가난을 겸손하게 누리고, 만물을 측은지심으로 대한다. “뱀을 볼 때마다 /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 말하는 사람들 // 사람들을 볼 때마다 / 소스라치게 놀랐을 / 뱀, 바위, 나무, 하늘 // 지상 모든 / 생명들 / 무생명들”(<소스라치다>). 뱀을 보고 놀란 사람에게 호들갑 떨지 말라고 넌지시 충고한다. 뱀이나 바위나 나무나 하늘의 처지에서 보자면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더 무섭고 놀라운 사건이라는 것이다. 저들은 사람을 해치지 않지만 사람은 언제라도 저들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착한 심성으로 시를 써서 밥을 구하는 제 삶을 지긋이 들여다본다. 시 한 편을 써서 버는 돈은 3만 원인데, 시 한 편에 들인 공력을 생각해 보면 억울하다고 적는 시인의 마음에 충분히 공감하는 것은 그게 그대로 시인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까닭이다. 시집 한 권이 팔리면 시인에게 돌아오는 저작료는 시집 정가의 10분의 1이다. 굵은소금 한 됫박과 바꿀 수 있는 돈이다. 시 한 편을 써서 받는 3만원은 쌀 두 말 값이고, 쌀 두 말은 서너 식구가 한 달은 먹을 수 있는 양식이다. 뒤집어서 시 한 편이 서너 식구의 한 달 양식이 될 수 있을까에 생각이 미치면, 시인은 시집 한 권의 저작권료와 시 한 편의 고료가 너무 박하다고 생각하다가 얼른 그 생각을 고쳐먹는다.

 

 함민복(1962~ )은 충청북도 중원군 노은면에서 태어났다. 학비가 전액 무료라고 해서 공고에 진학한다. 공고를 나온 뒤 학비 면제의 옵션에 따라 월성 원자력발전소에서 일했다. 그곳을 네 해 만에 그만두고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하며 시를 썼다. 1988년 계간지 《세계의문학》에 시 <성선설> 등을 내놓으며 문단에 나왔다. 그동안 시집으로 《우울 씨의 일일》 《자본주의의 약속》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등을 펴냈다. 서울 달동네와 친구 하숙방 등을 떠돌던 중 강화도 마니산에 왔다가 좋아서 아예 그곳에 주저앉았다. 바다와 인연이 없는 이 내륙의 사내는 제가 태어난 곳에서 멀리 떨어진 강화도에서 버려진 농가를 개조한 집에서 살았다. 강화도 남쪽 끝자락에 있는 강화군 화도면 동막리가 그곳이다. 물론 그이가 이웃으로 삼고 사는 벗들도 어민 후계자들이거나 바다 생물들로 생계를 해결하는 어민들이다. 그이는 마흔이 훌쩍 넘도록 三無(삼무)다.

 

 그이에겐 집, 아내, 아이가 없다. 대신에 가난을 벗 삼고 불우와 동거하는데, 貧者(빈자) 함민복은 이 동거가 불편할 텐데도 물리치지 않는다. 가난의 내력을 따지고 들면 그것은 그이의 숙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이는 씀바귀보다 더 쓰고 생마늘보다 더 아린 가난을 늠름하게 살아 냄으로써 드문 일이지만 가난을 맑고 명예로운 것으로 만들었다. 본디 비루한 것이 어진 마음을 가진 시인에게 와서 청빈이라는 새 이름을 얻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