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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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 내려가는시냇물(산문)

어린 노숙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2. 22. 13:32

어린 노숙자


검은 쓰레기 봉지를 뒤집어쓰고 걸어간다
걸어가는 쓰레기처럼 냄새를 풍기며
사람들 곁을 지나간다
코를 막거나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들 옆을
묵묵히 걸어간다. 뷹은 신호등 앞에서 멈추었다가
초록 신호등이 켜지자 다시 걷는 걸 봐서는
그는 아직 정신까지 버리지는 않았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창안을 들여다보다가
키득거리며 손짓하는 제 또래 여학생들을 피해
다시 걷는다
너는 누구냐 지나가는 경찰도 묻지 않는 그
인생이 노숙이라는 것을 너는 아느냐
망막에 눈물을 걸쳐놓으니 너도 참 아름다운 사람
열 다섯이나 되었을까 
제 몸보다 더 큰 가방을 매고
우주 속을 걸어가는 어린 왕자 같구나
낙엽 가득한 쓰레기 푸대 속으로 낙엽과 함께 사라지는 너
그런데, 왜 너의 발자국 소리가
내 가슴 속에서 쿵쿵거리는 지 
나는 알 수 없구나   

  며칠 전부터 우리 집 강아지 '번개'가 소변을 가리지 못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하다가 버릇이 고약해졌나 싶어서 야단도 치고 하다가 아무래도 이상하여 동물 병원에 갔습니다. 
 '번개'는 버림받은 개입니다. IMF가 닥쳐왔던 몇 해 전 겨울, 앙상하게 뼈가 드러난 채 우리 동네 아파트를 배회하더니 우리 집 식구들만 나타나면 뒤를 따라 왔습니다. 털은 새까맣게 더러워졌지만 머리에는 리본도 달려 있고, 귀여운 푸들이었습니다. 아파트에서 개를 기르는 것은 금지사항이지만, 말 못하는 짐승을 그냥 얼어죽게 할 수는 없어 집으로 데려와 목욕도 시키고 아파트 동네 게시판에 주인을 찾는 전단을 붙여 놓기도 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주인은 찾아오지 않았고, 동물병원으로 데려갔더니 미용을 한 것으로 봐서는 저 강 건너 남쪽 동네에서 온 개 같다고 그러더군요. '번개'는 전 주인으로부터 버려진 것이지요. 일 주일은 굶은 것  같다는 수의사의 말에 가슴이 찡하더군요. 며칠 동안 밥을 입에 대지도 않더니, 안정을 찾았는지 왕성한 식욕으로 먹어치우더군요. 성대 수술을 했나보다 했더니 제법 앙칼지게 짖어대기도 하구요. 그렇게 '번개'는 우리 집 식구가 되었던 거지요. 그렇게 '번개'는 비만한 푸들이 되었습니다.

  진단결과 내장에 염증이 생겼다고 합니다. 병 생긴 지 2, 3개월쯤 되었을 텐데 이상한 증세를 몰랐냐고 묻더군요, 통증이 굉장히 심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2. 3일 입원하고 난 후에 수술을 해야한다고 합니다. 기다리는 다른 개들을 보니 참 이쁘고, 앙징맞고. 귀엽더군요. 뒤늦게 환자(?)가 들어 왔습니다. 다들 오래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환자는 다리가 부러졌다고 
응급처치를 해야한다고 하는데, 아무도 순서를 바꿔주지 않더군요. 개들도 이쁘고, 주인들도 덩달아 멋있는데 다들 바쁘다고 그러는 겁니다. 할 수 없이 내가 순서를 바꿔 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내 순서는 한참 뒤로 밀리고요. 

  늦가을의 일요일 오전, 창 밖으로 낙엽이 떨어지고 뭔가 검은 것이 지나갔습니다. 그건 검은 쓰레기 봉지를 뒤집어 쓴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머리와 팔에 구멍을 내고 큰 가방을 들었더군요. 그는 천천히 걷고 있었습니다. 신호등 앞에서는 서고, 가게 쇼 윈도우를 가끔 쳐다보면서 그렇게 사라져갔습니다. 그는 노숙자였습니다. 누가 저 어린 소년을 버렸던 것인가요? 왜 저 소년은 찬바람 불어오기 시작하는 도시의 방랑자가 되었던 것일까요?  그 소년도 '번개'처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존재이겠지요. 그런데 나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지요. '번개'를 입원시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차도 한 잔 마시고 자리에 누웠더니 가슴이 쿵쾅쿵쾅 소리를 냅니다. 커피를 마셔서 그러나 싶었는데, 그것은 말 못하는 '번개'의 울부지음 이었고 어린 노숙자의 힘없는 발자국 소리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30 년 동안 써 왔던 나의 詩歷이 무너지는 소리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불의에 맞서 싸우는 시, 세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 인간 정신의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구도의 시... 수많은 시인들이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의 고귀함을 노래했지만... 언제나 완전한 사랑은 드러나지 못했지요. 온갖 금빛 수사와 장식 주렁주렁한 구호들, 그 속에서 나의 시는 오래 방황했던 것 같습니다. 
 아직도 나는 말조차 할 수 없는 뭇 생명의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지 못하고, 싸움을 모르고 투쟁의 깃발조차 세우지 못하는 버림받은 존재들에게 살겨운 말 한 마디 거들지 못했던 거지요. 이 세상에서, 그 누구에게,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쓸모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존재들이야말로 내가 시로 이야기하고 시로 보듬어야 할 보물이 아니었나 다시 생각해 봅니다. 버림받는 사람이나 동물, 심지어 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작은 벌레들에게 죄가 없습니다. 
버림을 주는 사람들은 권력을 폭력으로 휘두르고  이기의 장벽을 높이 세우고 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마땅히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